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74
탁삼의 허상은 유성처럼 긴 잔영을 그리며 뒤쪽으로 나가떨어졌다.
1천 척 넘게 밀려난 탁삼의 허상은 흩어졌고 그의 체내에 있던 작은 원숭이의 두 눈빛도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내 녀석은 두 눈을 감으며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원숭이가 내뿜던 붉은빛으로 이루어진 허상은 약간 흩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응결되었다. 바람 한 번에 흩어질 듯 위태로웠지만 그 허상에서는 여전히 강자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법보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이한제, 내가 너를 얕잡아보았구나.”
탁삼의 목소리가 그 허상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서늘한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어디로 도망갈 수 있는지 보자!”
탁삼의 모습이 천천히 실체를 갖추어가며 앞으로 나섰다.
‘파멸의 법문으로도 탁삼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의식 한 조각조차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으니 그는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인가?’
한제는 억지로 한숨을 삼킨 뒤 오른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석주 공간에 들어간다고 탁삼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 갑자기 한 줄기 붉은 빛이 아래의 바다 안에서 훌쩍 튀어나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탁삼으로부터 1백 척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붉은 빛이 사라지고 그 안에서 가면을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오른손을 뻗어 탁삼을 가리키더니 기이한 눈빛을 번득이며 가볍게 외쳤다.
“봉인!”
순간, 탁삼의 안색이 변하더니 상대를 노려보며 뒤로 물러났다.
가면을 쓴 사내가 눈을 번득였다. 그러자 다섯 갈래의 빛이 그의 다섯 손가락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사슬이 되어 미친 듯이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 사슬들은 꿈틀거리면서 다섯 개의 거대한 각인이 되어 한데 모이더니 탁삼을 뒤쫓았다.
“내상을 입은 지금의 너라면 내 힘으로 충분히 봉인할 수 있다!”
사내의 외침에 중첩된 각인이 번쩍하더니 더욱 빠르게 탁삼을 추격했다. 안색이 급변한 탁삼은 다시 재차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가면을 쓴 사내는 대답 없이 기이한 눈빛만을 번득였다. 그 순간 각인이 허공을 관통하며 사라졌고 곧이어 탁삼의 뒤쪽에서 번쩍이며 나타나 삽시간에 그의 등에 찍혔다.
“크윽!”
탁삼은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맹렬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에서는 한 덩이 붉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고 몸은 천천히 흩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하늘에 남은 붉은 안개는 흩어지지 않고 뭉쳐진 상태 그대로 떠 있다가 잠시 후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탁삼의 얼굴로 변해갔다. 그는 가면을 쓴 사내를 노려보며 포효했다.
“네놈이 누구든 자유를 되찾는 날 내가 너를 찾아갈 것이다!”
꿈틀거리던 붉은 안개는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붉은 빛으로 산산이 부서져 눈 깜짝할 사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붉은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가면을 쓴 사내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자 붉은 빛이 퍼져나가는 와중에 하얀 빛이 나타나더니 한데 뭉쳐 하얀색 결정이 되었다. 동시에 건풍의 무쇠 검도 허공에서 나타나 그의 손에 들렸다. 그는 그 무쇠 검을 자세히 살피더니 챙겨 넣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제의 마음이 진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 사내에게로 쏠렸다.
운작은 경악한 모습이었다. 그는 상대의 수준을 파악할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다는 것에서 저 가면 쓴 사내의 수준이 문정기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작 역시 굳은 얼굴로 상대와 그의 손에 들린 수성의 결정을 응시했다. 방금 그가 허공에 흩어진 결정을 모았던 과정을 떠올리자 주작은 몸이 덜덜 떨려왔다.
“다… 당신은⋯⋯?”
가면을 쓴 사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작을 훑어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주작, 네 잘못을 알겠느냐?”
“여… 엽무우?”
운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주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튼 추측은 그만둬!”
주작은 이내 가면을 쓴 사내를 공손히 바라보며 말했다.
“연맹의 사자를 뵈옵니다. 제 잘못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수련 연맹의 사자!”
운작이 찬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감히 수성의 결정을 망가뜨리려 하다니, 이는 수련 연맹 안에서 가장 꺼려하는 일이거늘… 허나 그런 결정을 내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책임을 묻지는 않겠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라!”
사자의 말에 주작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사자님, 그렇다면 선유족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귀찮다는 듯한 사자의 대꾸에 주작은 미소를 짓더니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수명은 곧 끝에 달할 것이다. 건풍으로부터 수명을 빼앗은 것도 수련 연맹의 사자에게 들켰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다.
눈을 감은 그때, 그의 머릿속에 돌연 1대 주작 엽무우가 남긴 서적의 내용이 떠올랐다. 주작성에는 언제나 수련 연맹에서 보낸 사자가 대대로 교체되어가며 아주 깊숙한 곳에 숨어 상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한제는 잔뜩 경계하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가능하다면 기회를 틈타 도망칠 생각이었다.
한데 그때, 연맹의 사자가 한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대우, 아직도 내가 기억이 안 납니까?”
한제는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자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한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의 상대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째서 차기 주작이 될 기회를 거절한 거죠?”
★ ★ ★
주작성 수마해의 고대 신의 땅, 그 안의 피바다에 자리한 거대한 돌기둥 위에서 탁삼은 맹렬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
“내 의식의 한 갈래를 파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 해방을 막을 수는 없다!”
탁삼은 허공에 나타난 한 방울의 암적색 피를 음산하게 바라보았다.
“이것만 있으면 머지않아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이한제, 일단 너를 찾아가 빚을 갚아주겠다. 다음번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묵지!”
한제가 허탈하게 상대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렇습니다. 한데 아직 제 물음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면을 벗은 사내는 어느 비오는 날 밤, 오래된 절 안에서 한제와 함께 생사의 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그 사람이었다.
“나는 주작이 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한제의 덤덤한 대답에 묵지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군요. 허나 귀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도 더 권할 수는 없지요.”
이제 그의 시선은 운작에게로 옮겨갔다.
“선유족에게는 주작성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땅을 줄 수 있다. 허나 천 년마다 구엽(九葉) 이상 수준인 부족원의 두개골 하나를 보내야 한다. 운작, 동의하는가?”
운작은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 말이 제안이지 이는 실상 통보나 다름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수련 연맹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운작은 한순간 폭삭 늙은 것처럼 보였다. 두 눈빛이 암담했다.
바로 그때, 주작묘의 붕괴가 다시 시작되려는지 해저에서 거대한 파도가 몰아쳤다. 성난 파도는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솟아올랐다. 이를 본 묵지는 오른손을 들었고 그의 손에 들린 수성의 결정이 밝게 빛났다. 그 빛은 사방으로 확산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주작묘 전체를 비추었다.
“합(合)!”
묵지가 가볍게 외쳤다.
그 한 마디에 붕괴가 멈추었고 허무로 돌아갔던 대지는 다시 응결되었으며, 곳곳에 드러났던 차원의 균열도 빠르게 맞물렸다. 열을 세기도 전에 주작묘는 원래와 같은 상태로 회복되었다.
묵지는 수성의 결정을 바다에 내던졌다. 바닷속으로 빠져든 결정은 곧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후 그는 앉아 있는 주작을 손으로 가리켰다. 심장 모양의 결정 하나가 주작의 정수리로부터 떠올랐다. 그 결정에는 깊은 흠이 빽빽하게 나 있어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았다. 허나 그 균열들 역시 맞물리더니 금세 원래 상태로 복구되었다.
“다음 주작은⋯⋯.”
묵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제에게서 떠난 그의 시선은 무태에게 이르렀다.
그 순간, 무태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해 몸까지도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청룡의 혈통이라 적합한 사람이긴 하나, 안타깝게도 수준이 영변기에 이르지 못했군.”
무태는 쓰게 웃었다. 자신의 수준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작의 봉호를 받기란 어려울 것임을 알았음에도 순간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묵지의 시선은 무태를 떠나 이번에는 그 곁에서 좌선하고 있는 자심에게 닿았다.
“기회와 인연이 딱 알맞으나⋯⋯ 제물이로군. 남의 것을 빼앗은 것에 불과하니…”
묵지는 두 눈을 번득였다.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제물이라고? 분명 뭔가 이상해’
한제가 두 눈을 번득였다. 그와 자심 사이에는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친구라기보다는 적에 가까운 사이였다. 또한 자심과 건풍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건풍의 제물이었다. 허나 자신이 건풍을 죽인 것이 어찌 그 여인에게 깨달음을 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제는 알지 못했지만 몇몇 신통술은 대들보를 훔쳐내 기둥으로 바꾸어 넣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는 기이하고 변화막측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신통술이기도 하다. 지금 자심은 건풍의 수준을 그대로 가져갔으나, 수많은 부작용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운작을 훑어본 한제는 내심 그와 큰 관련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사자님.”
잠시 고민하던 한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직 영변기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여 평생 영변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제의 말에 좌선을 하고 있던 자심이 돌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서늘한 눈으로 한제를 주시했다. 한제는 그녀의 눈빛에서 건풍의 기운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