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76
그는 원래 주작묘에서 나온 후 사도환과 함께 초나라에 돌아와 잡다한 일들을 처리한 뒤 떠날 생각이었다.
한데 초나라로 향하던 중 사도환은 어느 일반인 황궁을 보더니 친왕이 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는 곧장 모습을 바꿔 그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떤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바로 그다음 날, 본래의 황제가 그를 자신과 거의 동등한 자리에 책봉했다.
사도환은 그곳에서 즐겁게 지냈으나 주작성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바뀌지 않았는지 한제에게 떠나기 전 자신을 찾아오라고 번번이 일렀다.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던 여인이 그를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아저씨, 내 수련 진도 어때? 나 벌써 응기 2단계라고!”
여인은 은혜였다.
1년 전 초나라에 도착한 한제는 곧장 보탑을 소환해 은혜와 소백을 꺼내주었다. 보탑 안에 먹을 것들을 충분히 준비해두었던 터라 은혜는 그동안 굶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은혜는 한제에게 수련을 시켜달라고 졸랐고 이에 어쩔 수 없이 응기의 구결을 넘겨주었다.
은혜는 이미 성인이 되어 어느새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한제는 그런 은혜를 볼 때마다 어째서인지 모완이 떠올랐다.
“아저씨, 왜 그래?”
은혜는 가까이 다가오며 이상하다는 듯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미 한제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모완과 관련된 기억을 지웠으니 그녀가 모완에 대해 알 리 없다. 소백 역시 은혜에게 그 일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다.
은혜의 머리를 쓰다듬는 한제의 눈빛은 자애로웠다. 그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은혜와 비슷한 나이인 것처럼 보이는 그였지만 그런 자애로운 눈빛도 퍽 자연스러웠다.
“아저씨가 늙어서 그런가 너를 보면 옛사람이 떠오르는구나.”
한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은혜는 귀엽게 웃으며 은방울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가 어디가 늙었어? 그저께에는 막 입문한 어느 사제가 나한테 와서 묻던 걸? 아저씨가 내 오라버니냐고…”
한제는 빙그레 웃었다. 은혜는 그저께 분명 하루 종일 앉아서 좌선을 했다. 그러니 방금 그 말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수련한 지 벌써 6백 년이 다 되어간다. 이게 늙은 게 아니냐?”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이 노련하게 빛났다.
6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는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었던 그는 지금 주작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한제는 때때로 이런 과거와 현재 상황을 떠올릴 때면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인연은 여기까지
“여야, 아직 부모님 기억하니?”
한제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은혜가 몸을 살짝 떨었다. 눈에 아득한 빛이 스쳐갔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
“그냥 흐릿하게⋯⋯.”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한제는 무척 미안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은혜는 호랑이를 친구로 삼는 대신 부모 곁에서 순탄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터였다.
“집에 데려다주마.”
말을 마친 한제는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발아래에서 구름이 나타나 그와 은혜를 태우고는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아래에서는 소백이 구름을 뒤쫓으며 포효했다.
“아저씨, 우⋯⋯ 우리 부모님을… 찾은 거야?”
구름 위에 오른 은혜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물었다.
“그래. 부모님을 잘 모시거라. 효도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니까. 최선을 다해 효를 행하지 않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거야.”
한제의 눈가에 부모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던 은혜는 한제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저씨, 같이 주작성을 떠나자고 하지 않았어?”
한제는 은혜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야, 너랑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야.”
“아저씨!”
은혜는 몸을 덜덜 떨었다. 예쁜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붉어진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차 있었다.
“그만!”
한제는 그 한 마디만을 내뱉은 뒤 구름을 재촉하여 질주했다.
소백은 뒤에서 화가 난 듯 포효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마치 ‘내가 비록 느리지만 절대로 나를 떼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시위를 하듯…
★ ★ ★
봄꽃이 필 무렵의 이른 아침, 주작성 초나라 봉황성(鳳凰城) 밖의 어느 촌락. 촌락 곳곳의 민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개 짖는 소리와 아이들 장난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촌락의 동쪽 끝에서부터 다섯 번째에 있는 초라한 민가에서는 늙은 부인이 주방에 쪼그려 앉아 장작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밥 지을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등이 약간 굽은 그녀의 몸은 늙고 노쇠해 보였다.
“콜록! 콜록!”
불붙은 장작에서 피어오른 연기에 부인은 기침을 몇 번 하고는 얼른 부채를 가져와 아궁이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덕분에 연기도 어느 정도 가셨다.
“여 엄마⋯⋯.”
그때, 허약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주방 옆방에서 흘러나왔다.
부인은 부채를 내려놓고 두 손을 치마에 쓱쓱 문질러 닦은 뒤 얼른 그 방문을 열었다. 방 한쪽 침상에 늙은 남자가 누워 있었다. 움푹한 두 눈과 얼굴 가득한 깊은 주름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여인은 뼈와 가죽만 남은 듯한 남자에게 다가서며 눈물을 훔쳤다.
“여보,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남자가 손을 들자 부인은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여 엄마, 어젯밤 내가 꿈을 꿨어. 우리 딸이 돌아오는 꿈을⋯⋯.”
어둑했던 남자의 눈에 한 줄기 밝은 빛이 스쳐갔다.
“우리 딸이, 돌아왔어. 우리 딸이⋯⋯.”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곧 돌아올 거예요.”
“너무 후회가 돼. 그때 그 사람이 아이를 데려가게 둬서는 안 되었던 건데… 벌써 20년이나 흘러버렸어. 이제는 그 아이 소식조차 알 수가 없으니⋯⋯.”
남자의 흐릿한 두 눈에 원통함이 차올랐다.
부인은 눈물을 훔쳐낸 뒤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우리 딸이 얼마나 강한데요.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선유족과 주작성의 전쟁 때 피난을 온 이 부부는 바로 은혜의 부모였다.
어린 딸을 어느 도인에게 보낸 것은 두 사람의 마음에 한 가닥 가시처럼 남았고 그 가시는 세월이 흐를수록 예리해져 그들의 마음을 후벼 팠다.
은혜 아버지는 2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 일을 후회했고 깊은 후회는 결국 병으로까지 번졌다. 그 후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은 온전히 은혜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여인으로서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고 몇 번이고 은혜의 이름을 외치며 벌떡 깨곤 했다.
“우리 딸은 돌아올 거예요. 꿈을 꾸었다면서요? 그럼 틀림없을 거예요.”
부인은 재차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휴⋯⋯.”
은혜 아버지는 긴 한숨을 뱉어내고는 무심코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우뚝 멈춰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곳을 보고만 있었다.
부인은 흠칫 놀라 남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녀 역시 남편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활짝 열린 방문 밖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긴 머리가 찰랑거리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 여야…”
수십 년이 지났지만 부인은 단번에 딸을 알아보았다.
“엄마!”
여인의 눈물이 가득 담긴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몇 걸음 만에 부인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여⋯⋯ 정말 여야. 여보, 여가 돌아왔어요!”
부인은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주륵 흘리며 딸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함께 통곡했다.
은혜 아버지는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딸을 바라보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중얼거렸다.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딸이 돌아올 수 있게 해주셔서⋯⋯.”
집 밖에 있던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의 부모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두드리자 한 줄기 빛이 떠오르더니 조용히 움직여 은혜의 부모에게로 들어갔다. 그 순간, 은혜 아버지가 앓던 병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생기가 가득 차올랐다. 은혜의 어머니 역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생기가 돌았다.
‘여야, 아저씨는 간다.’
한제는 가볍게 미소를 지은 후 돌아섰다. 그 미소와 뒷모습은 퍽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때 은혜는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멀어져가는 한제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저씨, 내 삶이 끝나기 전까지 아저씨를 다시 볼 날이 있을까⋯⋯?’
은혜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에게 한제는 부모보다 더 중요한 존재였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곁에 있었던 이가 바로 한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