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77
‘아저씨, 나는 계속 수련할 거야. 주작성을 떠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아저씨를 찾을 거야. 그때는 더 이상 아저씨한테 짐이 되지 않을께.’
그렇게 한제는 떠났다.
잠시 후, 소백이 집 밖에서 몇 번이나 낮게 으르렁거리며 못내 아쉬운 눈으로 은혜의 집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크게 포효하고는 몸을 훌쩍 날려 하얀 빛으로 변해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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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암!”
한제의 목소리가 운천종 가득 울려 퍼졌다. 그러자 곧장 한 줄기 긴 잔영이 운천종 안에서 날아와 1백 척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렀고 이내 철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암은 이미 화신기에 이르렀고 초나라는 그 덕분에 4성 수련국에 오른 상태였다.
“부르셨습니까?”
철암은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물었다. 한제에 대해 그는 아주 지극한 숭배심을 가지고 있었다. 주작성에서 한제는 이미 전설적인 존재였다.
한제이자 천우이기도 한 그는 홍접을 꺾고 건풍을 소멸시켰으며, 류미를 도망치게 했고 자심을 물리쳤으며, 주작을 밀어낸 뒤 한 마디 말로 무태를 15대 주작에 등극시켰다.
주작성 수련자 중 이런 소문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철암에게 한제는 하늘이었으며 그의 말은 곧 하늘의 뜻이었다. 절대 거역하거나 저항할 수 없었다.
한제는 저물대를 하나 꺼내더니 철암에게 건넸다.
“만약 은혜가 원영기 수준에 이른다면 이것을 주도록 해라. 허나 그러지 못한다면 알아서 처리하도록. 그 저물대에는 봉인을 걸어두었다. 간단한 봉인이니 전력을 다한다면 철암 자네는 며칠 만에 해결할 수 있을 거야.”
한제의 말에 철암의 안색이 변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은혜에게 주신 물건이니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안전하게 보관하겠습니다.”
한제는 그런 철암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면 안 되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는 자신이 받는 법이니까.”
철암은 떨리는 마음으로 신중히 다짐했다. 한제의 말을 그로서는 감히 듣지 않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제는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순간 그는 한 줄기 푸른 연기가 되어 흩어지듯 사라졌다.
어느덧 철암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한제에게서 받은 저물대를 잘 챙겨 넣은 뒤 운천종으로 돌아갔다.
★ ★ ★
주작성 북쪽 끝. 설역국이었던 이 땅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찬바람이 휘휘 불어 생명이라고는 피어날 수가 없는 곳이었다.
한데 언제부턴가 그 땅의 얼음 위로 장미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선연한 붉은색의 장미가 아니라 하얀색의 장미였다.
흰 장미들은 찬바람이 불어오는 와중에도 꿋꿋이 자라났으며, 그 향기 또한 끊이지 않고 사방으로 풍겼다.
이 땅의 동쪽 지역에는 얼음 계곡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는 짙은 남색 장미 한 송이가 활짝 개화한 채 홀로 외롭게 피어나 있었다. 그것은 찬바람에 맞서 얼음 결정을 가지로 삼아 산골짜기 안에서 자라났으며, 마치 여인처럼 외로우면서도 위풍당당한 멋을 풍겼다.
그 산골짜기로 하얀 옷을 입은 덤덤한 표정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가 산골짜기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그 짙은 남색 장미는 향기를 발산했다. 그 향기는 삽시간에 온 산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마치 아리따운 소녀가 산골짜기 안에서 홀로 춤을 추는 듯 기묘한 느낌을 주는 향기였다.
사내는 그 장미 곁에 멈춰 섰다. 그리고 한참이나 그 장미를 바라보다가 쪼그려 앉아 장미를 살짝 꺾어낸 뒤 몸을 돌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얼음 위로 자라났던 흰색 장미들은 떠나간 남자의 발걸음을 따라 하나하나 시들어갔다. 남색 장미가 다른 이에 의해 꺾인 순간, 그것들은 마치 스스로의 존재 이유도 가치도 모두 퇴색해 버렸다고 여기는 듯 떨어져 흩어졌다.
★ ★ ★
조나라, 대산 아래에 자리한 이 씨 집안 저택.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조용히 사당 안에 나타났다. 말없이 하나하나의 위패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가장 위 제단에 놓인 두 개의 위패였다.
남자는 잠자코 그것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지만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꼬박 하루 동안 말없이 위패를 바라보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이곳을 청소하러 온 하인은 하얀 옷의 사내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그 순간 풀썩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묵묵히 위패를 바라보던 사내의 눈에 추억을 더듬는 듯한 빛이 어렸다.
그는 그곳에 서서 꼬박 사흘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두 눈에는 오만 감정이 교차했고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기도 했다.
사흘 만에 움직인 사내는 천천히 꿇어앉아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가야 합니다.”
울음을 삼키며 한 마디를 내뱉은 사내의 눈빛이 단호하게 변하더니,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사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당 밖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어린아이도 늙은이도 있었다. 허나 하나같이 화려한 복장을 한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중에는 더러 수련자도 섞여 있었는데 수준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태만큼은 늠름했다.
그들의 가장 앞에 선 이는 바로 이산이었다.
전날 밤,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느낌을 받고 이곳으로 온 이산은 사당 밖에 이르러 한제의 기운을 감지했다. 이에 그는 모든 이 씨 가문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법보 제련
한제가 걸어 나온 순간, 이산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저택 앞에 모여든 이 씨 가문 일족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중에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높은 지위인 자도 있었지만 예외는 없었다. 그들이 무릎을 꿇는 대상은 다름 아닌 그들의 선조였다.
이 씨 가문에서 6백 년 전에 낸 신선!
그런 선조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자손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도리였다.
게다가 그는 주작성 안에서 가장 유명한 이였다. 이 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면 심지어 일반인들조차 그 유명한 이한제 가문 사람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이산은 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씨 가문의 모든 후손을 데리고 배웅하러 왔다.”
한제는 낯선 자신의 혈육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일어나도록…”
이 씨 가문 일족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한제를 바라보았다.
“내가 떠난 뒤 이 씨 가문은 네게 맡기마.”
한제는 이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한순간에 지나간 6백 년이었어. 잘 가. 가문의 일은 내게 맡기고…”
한제는 고개를 돌려 사당을 또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그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저택 안은 고요했다. 모든 사람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선조님!”
공손한 목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산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따라 한제가 살던 마을에 갔던 그 당시가 떠올랐다. 둘째 작은아버지 곁에 있던 소년은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 소년의 웃는 얼굴은 이산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커지더니 결국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한제야⋯⋯.”
이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더니 턱 끝에서 맺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 ★ ★
주작성 동부의 황량한 땅에서 한제의 모습이 나타났다. 뒷짐을 진 그는 흡혈 마수의 등에 탄 채 이동 중이었다.
형형한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표정이 돌연 살짝 변했다. 흡혈 마수는 한제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 하강해 눈 깜짝할 사이 평원에 착지했다. 그러더니 한제가 땅에 내려서는 동안 조용히 주위를 경계했다.
한제가 저물대를 두드리자 한 줄기 푸른 빛과 함께 뇌와가 튀어나왔다.
뇌와는 갑자기 몇 번 포효를 했고 흡혈 마수가 그에 응수하듯 한 번 길게 울더니 뇌와에게 다가가 거대한 주둥이로 쉴 새 없이 귀찮게 굴었다.
한제는 저물대를 열고 신식으로 그 안을 훑었다.
그가 이곳을 선택한 것은 이곳이 구석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한제는 떠나기 전 저물대에 있는 법보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제련할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꺼낸 것은 선검과 굽은 칼이었다. 이 둘은 한 번 훑어봤을 뿐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도끼 역시 제련할 필요가 없었다. 본체에게 줄 물건이기 때문이다.
네 개의 검집은 여태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주작성을 떠나기 직전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네 개의 검집이 떠올랐다.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 줄기 기운을 뱉어내 검집들을 감쌌다. 제련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