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84
한제는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앞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한 줄기 하얀빛이 된 그는 곧장 모완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도심⋯⋯. 도심!”
모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한제와 함께 점점 사라져갔다⋯⋯.
★ ★ ★
천운종 안의 보리수 아래에 있던 선량한 얼굴의 청년은 피식 웃었다.
“만약 스승님께서 그자를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분명 지혜로운 자겠지! 보통 사람들은 첫 번째 관문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피하던가 억지로 타파하려 하든가 둘 중 하나의 양상을 나타내. 헌데 이 자는 굉장히 흥미롭군. 진리를 추구하려 하다니!”
“재미있군! 저 방법은 당시 손운 사제가 택했던 것과 똑같아! 손운 사제는 67일을 버텼는데 저자는 얼마나 견딜 것인가?”
아래턱을 매만지던 선량한 얼굴의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은 평안했지만 그 깊은 곳에서는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천운자가 직접 허무의 공간에 마련한 이 세 관문을 통과해야만 천운종의 제자가 될 자격이 생긴다는 것은 절대 바꿀 수 없는 원칙이었다.
이때, 인(人)의 관문 안은 면사로 덮인 것처럼 몽롱하고 흐릿했고 그 깊은 곳에는 새가 지저귀고 꽃향기가 가득한 데다가 나무 그늘이 드리운, 마치 도원경과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이따금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어렴풋할 뿐이라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이 도원경에는 산촌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 사는 이는 많지 않았고 모두 대를 이어온 이웃이라 매우 가까웠다.
이 산촌의 북쪽에서부터 세 번째 집은 건물 하나만 있어 단출했지만 퍽 편안해 보였다. 그 문간에 자라난 풀들이 봄기운을 더했다.
마당에는 가지런히 쌓인 장작이 작은 언덕을 이루었고 그루터기로 만든 둥그런 의자들 옆에는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인 탁자도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 하나가 그곳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전혀 늙어 보이지 않는 그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고개를 들어 집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열 살 남짓의 아이가 작은 조각칼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홍목에 조각을 해나가고 있었다.
도(道)
노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아이는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글쎄다, 난 누굴까?”
아이가 막 뭔가 대답을 하려던 순간, 엄숙한 목소리가 집 안에서 들려왔다.
“호야, 할아버지 귀찮게 하지 말거라!”
뒤이어 집 안에서 문에 드리운 발을 걷고 한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돌아보지도 않고 한숨을 폭 내쉰 아이는 노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 다시 조각을 시작했다. 허나 아이의 눈빛에는 짙은 의구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내는 부릅뜬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다가 노인 곁으로 다가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노인의 잔을 다시 채워주면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내일 산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시종일관 자애로운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대문 밖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에는 왜?”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이 손에 푸성귀가 든 바구니를 든 채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중년 사내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바구니를 받아들며 말했다.
“어머니, 마을 동쪽에 사는 이우가 말하길, 산이 요즘 불안하답니다. 커다란 벌레가 있대요. 몇 사람이 모여 한 번 살펴보려고요. 운이 좋으면 호랑이 가죽으로 아버지 옷 한 벌 해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이에 뭔가 대꾸하려던 노파는 시종일관 손자만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중년 사내는 산에 오르겠다며 떠났고 며칠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노파는 밤낮없이 기다렸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온전치 못한 시체였다. 비통한 마음에 까무룩 혼절해버린 노파는 그렇게 깨어나지 않았다.
이제 집 안에 남은 것은 할아버지와 손자뿐이었다.
손자는 줄곧 나무에 조각하는 방법을 배웠고 노인은 그런 손자를 계속 바라보았다.
“이제 조각을 할 수 있느냐?”
어느 날 노인이 물었다.
“아직요. 너무 어려워서 아무리 해도 안 돼요.”
고개를 든 아이가 덤덤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게 몇 번째 조각이냐?”
노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83번째요. 다음번까지 멀지 않았어요.”
“끝내고 싶지 않느냐?”
노인이 안쓰럽다는 듯 말하자 아이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끝을 왜 내요? 이런 생활도 좋은데⋯⋯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점만 빼면요.”
“몇 번의 윤회를 거듭해도 매번 똑같구나. 아무런 변화도 없어. 넌 모든 사람이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와 같은 과정을 수도 없이 겪었어. 그런데도 모르는 것이냐? 네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를…”
노인은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지만 그 상태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노인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다시 나무 조각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끝내야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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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종 안, 보리수 아래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허무의 공간 안을 들여다보던 선량한 얼굴의 청년은 눈빛이 어두웠다.
“83일이라니, 만만치 않은 자로군! 세 개의 관문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것으로 스승님이 각고의 노력을 다해 만들어낸 것인데… 저 이한제라는 녀석은 첫 번째 관문에서 무려 83일을 버텼다. 저 자⋯⋯ 내버려둬서는 안 되겠어!”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고 눈빛도 불규칙적으로 번득였다. 잠시 후,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린 그의 손안에서 일곱 빛깔 광채가 나타났다.
“미래의 사제여, 이 사형이 도와주지!”
말을 마친 그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자 일곱 빛깔 광채는 순식간의 그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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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관문 안의 아이는 줄곧 고개를 숙인 채 조각을 하고 있다가 불쑥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내다보았다.
한 줄기 일곱 빛깔 광채가 하늘에서 나타나 밝은 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강렬한 그 빛이 닿는 곳마다 눈이 녹아 없어지듯 도원경 속의 새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향기로운 꽃 냄새도 더는 풍기지 않았다.
산촌의 집들도 순식간에 사라져 하얀 연기로 피어올라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결국 흩어져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북쪽으로부터 세 번째에 있는 그 집뿐이었다.
아이는 기이한 눈빛으로 일곱 빛깔 광채를 주시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조각칼을 휘둘렀다. 순간 한 줄기 은빛이 그 조각칼로부터 튀어나가 하늘에 떠 있는 빛을 향해 날아들었다.
꽈르릉!
하늘을 뒤흔들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사방의 모든 것이 진동하며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일곱 빛깔 광채는 바람에 흩날리는 촛불처럼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곧 그 광채는 기이하게 번득이며 서로 한데 모여들어 맑은 한 쌍의 눈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아이를 주시했다.
냉랭한 눈빛의 아이는 고개를 들고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당에 쌓여 있던 장작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아이가 두 손을 빠르게 움직이자 손에서 대량의 은빛이 튀어나와 장작들에 떨어졌고 그러자 장작들이 집과 사람 조각상으로 변했다. 이어 저절로 타오르면서 어스름한 빛을 냈고 그 빛은 타오르는 불씨처럼 미친 듯이 거대해지더니 결국 주위를 화마로 뒤덮었다.
불길이 사라졌을 때, 이전에 하얀 연기가 되어 사라진 마을 사람들과 집, 새 소리, 꽃향기 등 모든 것이 원상태로 회복되어 이곳은 다시 도원경이 되었다.
“네가 누구든 소멸시킬 것이다!”
아이가 덤덤하게 말했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하늘을 뒤덮을 듯 강렬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두 눈동자는 아이를 주시하다가 점점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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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종 보리수 아래에 있던 선량한 얼굴의 청년은 두 눈을 번득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랬군. 저자가 수련한 것은 윤회의 도야.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한 번의 윤회를 경험해 윤회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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