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91
잠시 후, 먼 곳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칠사제, 시간 있나?”
한제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성살도 사사저도 두렵지 않은 한제가 유일하게 기피하는 대상인 삼사형, 백미였다.
★ ★ ★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누각 밖으로 나갔다. 옅은 꽃무늬로 장식된 보라색 옷을 입고 선 백미는 매우 준수했고 늠름했다.
한제는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사형, 제게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백미는 씩 웃더니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볼일이 있지. 칠사제, 자네 아직 요패 등도 수령하지 않았잖은가. 내 자네를 대신해 그것을 받아왔네.”
말을 마친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저물대 하나가 한제를 향해 휙 날아갔다.
한제는 그것을 받아들고 신식으로 한 번 살폈다. 그 안에는 보라색 옷 두 벌과 영패가 들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한제는 포권을 하며 여유롭게 말했다.
“별말씀을… 이 자종산(紫宗山)에 대해 자네는 아직 익숙지 않을 텐데 내가 소개를 좀 해줘도 되겠나?”
백미가 웃으며 말했다.
한제는 기이한 눈빛을 띄며 단호히 거절했다.
“마음 써주신 것은 감사하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수련 중이니 다음을 기약하지요.”
말을 마친 한제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보기에 백미는 뭔가 이상했고 접촉할 때마다 불편했다.
한제를 바라보던 백미는 약간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칠사제, 내게 악의는 없네. 그저 자계의 상황이 약간 복잡할 뿐이야. 어젯밤 생각을 거듭하다 자네에게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는데 정말 듣고 싶지 않은 겐가?”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오른손으로 저물대를 두드렸다. 그러자 하얀 빛이 튀어나오더니 바닥에 탁자와 의자가 나타났다. 그 탁자 위에는 다기(茶器)도 놓여 있었다.
한제는 맑은 눈빛으로 의자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삼사형, 앉으시지요!”
백미는 가볍게 웃으며 한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찻주전자를 들어 한제와 자신의 찬을 채우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만났을 때만 해도 자네가 스승님께서 수련생으로 점찍었다던 그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네! 하하하!”
한제는 말없이 웃었다.
백미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칠사제, 대사형을 조심하게!”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백미를 바라보며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백미는 찻잔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대사형은 자계 제자 중 스승님을 가장 먼저 따랐던 이야.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일들을 알고 있지. 예컨대 스승님께서 천운성에서 수만 년 동안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제자 중 1만 년 이상 살아남은 수련자가 손에 꼽는 이유라든가 그런 것들 말일세. 스승님께서 일찍이 거두셨을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런 것은 우리 사형제 중 오직 대사형만 알고 있지.”
한제의 눈빛이 굳어갔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 역시 일찍이 의심이 갔지만 애초에 가진 정보가 많지 않아 답은 알 수 없었다.
“만약 우리 자계 제자 중 대사형을 제외하고 그 사항에 대해 알고 있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당시 일곱째였던 손운일 거야. 나는 그가 천운종을 배반하고 나간 것 역시 그 이유에 연관된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네.”
한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삼사형,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추측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백미는 기이한 눈빛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자계는 일곱 계열 중 가장 약하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적지 않지. 특히 대사형은 천운칠자에 들 기회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어제 패퇴시켰다고 해서 대사형을 얕잡아봐서는 안 되네. 본래의 수준은 지금과 같지 않았거든. 당시 대사형은 육사제와 천운칠자의 봉호를 놓고 싸운 끝에 패배하여 회복할 수 없는 내상을 입고 수준도 뚝 떨어졌지.
허나 굴하지 않고 수백 년 동안 폐관수련을 하며 그 치욕을 갚을 날을 기다려왔어. 허나 미처 회복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손운이 나섰지. 손운은 육사제와 대사형을 격파하고 천운칠자라는 봉호를 손에 넣었어.”
손운이라는 이름은 한제에게도 궁금증의 대상이었기에 백미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세 달 뒤, 스승님의 생신 연회는 우리 자계에서 다시 천운칠자의 봉호를 획득할 날이기도 해. 이번에 대사형은 결코 실패하려 하지 않을 거야. 육사제가 외래 수련에서 돌아오지 않는 한 자네와 같은 외부인은 대사형에게 제거 대상이 되겠지.”
한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운칠자라는 봉호가 무어 그리 중요하기에 그토록 목을 매는 겁니까?”
백미는 멍한 표정으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천운칠자의 봉호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나? 칠사제, 일단 천운칠자가 되면 온 천운성에서 자네는 수만 명 중에 일곱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란 말일세. 어떤 수련국도 자네를 따르지 않을 곳은 없을 것이며 많은 추종자도 생기겠지.
뿐만 아니라 천운칠자는 수련을 할 장소로 한 나라를 갖게 된다네. 온 천운성 어디든, 심지어 천운성 밖에 존재하는 별을 얻을 수도 있어! 허나 이런 것도 부수적인 이익일 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지.”
이미 엄청난 이야기들이었건만 그게 다 부수적인 이익이라니, 한제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운칠자
“자네와 나 같은 영변기 수련자들이 가장 염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나? 바로 문정기에 이르는 것이지. 허나 문정기에 이르는 순간 엄청난 위험을 맞게 된다는 걸 알고 있나? 심지어 다시 수련을 이어가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단 말일세. 허나 천운칠자가 되면 스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네. 그럼 문정기에 이를 가능성이 3할 이상 더 높아지지. 그러니 누가 욕심내지 않겠나?”
설명을 듣던 한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이 아닐세. 우리 같은 사람이 수련하는 데 필요한 선옥은 상상을 초월하지. 달마다 선옥을 받긴 하지만 그 양은 정해져 있고 수준이 높아질수록 선옥은 부족해지지. 하지만 천운칠자가 되면 천운종에 있는 선옥을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도 마음이 안 동하겠는가?”
한제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또한 천운칠자가 되어야만 스승님께 직접 전수받을 기회가 생긴다는 것 역시 알아두게. 스승님이 전수해주는 것은 진정한 선술(仙術)이지. 1천 년 된 천운칠자는 하급 선술을 전수받을 수 있네! 1만 년 된 천운칠자는 또 하나의 하급 선술을 전수받지. 심지어 스승님은 누군가를 지목해 수련 연맹으로 보내기도 하네. 그곳에서 깊은 연구를 통해 온 수련계를 진동시킬 신통력을 자랑하는 수련자가 되는 거야!”
“1천 년 된 천운칠자는 하급 선술을 전수받는다고요? 정말입니까?”
한제는 보기 드물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당연하지! 청계(靑系)의 이승남이라는 자가 1백 년 전 스승님으로부터 완전한 선술을 하나 전수받았다네. 아직까지도 폐관수련을 하고 있지.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그의 실력은 분명 두려워할 정도가 되어 있을 거야!”
한제는 기이한 눈빛을 번득이며 잠시 침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백미를 향해 포권을 했다.
“삼사형, 피곤하여 이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제가 찾아뵙도록 하지요!”
백미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알겠네. 피곤하다니 더는 방해하지 않도록 하지. 무슨 일이 있거든 날 찾아오게!”
말을 마친 그는 포권을 취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허나 몸을 돌린 순간,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지더니 음산함이 얼굴 가득 번졌다.
“대사형, 천운칠자가 되고 싶겠지만 이 백미가 살아 있는 한 절대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저는 매번 대사형을 실패시킬 거니까요. 그래야만 당시의 일을 앙갚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제는 자한각 안으로 들어가 생각에 잠겼다.
“완전한 하급 선술…”
사도환에게서 세 개의 필살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이전과 달리 한제는 선술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도환이 흠결이 있는 선술을 모방해 만들어낸 세 개의 필살기에도 그 정도 위력이 있는 것을 보면 완전한 선술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선인이 그토록 강력했던 것도 선보와 선술 덕이었다. 상급 선술을 익힌 선인이 상급 선보까지 가질 경우 존재 자체가 공포였으리라.
선술과 비등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한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고대 신 일족의 신통술도 선술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기억의 유산을 통해 한제가 알고 있는 고대 신 일족의 신통력은 많았지만 그 신통력은 오직 고대 신 일족만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필요한 요구 조건 역시 엄격하여 본체의 수준으로도 사용할 수 없었다.
“천운칠자라… 흥미롭군.”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계 제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영패를 맨 뒤 자한각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 줄기 바람에 한제의 옷과 머리가 나풀거렸다. 벌써 한낮이 되어 작열하는 태양에 공기가 후끈했다.
자종산 봉우리로 올라가는 한제를 본 자종 제자들은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상관없이 모두 우뚝 멈춰 한제를 향해 포권을 했다.
천운종은 주작성의 종파와 달리 강자를 선배라 칭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문파에 오래 있었던 이들을 상급자로 모셨고 본인보다 늦게 입문한 이들은 모두 후배라 여기는 듯했다. 이는 당시 천운칠자에 등극한 손운이 그 후로도 조성살을 사형이라고 불렀던 이유이기도 했다.
자종산은 매우 컸다. 허나 이전에도 몇 번 둘러본 적이 있던 터라 낯설지 않았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자종의 품영각(品靈閣)이었다. 이 누각은 평소 제자들이 단약이나 영석 따위를 받으러 가는 곳으로 백미가 옷과 영패를 받아간 곳이기도 했다.
천운자의 제자들에게는 일정한 권리가 부여되었다. 고정된 양 만큼의 선옥을 받을 수 있는 것도 그 권리 중 하나였다. 지금 한제가 이곳에 온 것도 선옥을 받기 위해서였다.
‘천운칠자의 봉호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영변기 중기까지 실력을 높여야 해. 천운성에서 횡포를 부리고 다니는 무뢰한이 되어야 한다. 이곳은 재주를 감출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누군가의 발판이 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천운자도 암묵적으로 그런 행위를 묵인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천운자가 어느 정도까지 묵인할지 알아내 그 선에 맞춰 움직이겠다.’
한제는 조용히 속으로 다짐했다.
품영각(品靈閣)은 자종산 중턱의 거대하고 평평한 대 위에 있었다. 이 건물은 총 아홉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멀리서 보면 건물에서 풍겨 나오는 짙은 영기가 파문을 이루어 사방으로 확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청옥 기와와 돌로 만들어져 오래된 건물의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벽 사이사이로 비취색 덩굴이 자라나 건물을 빽빽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 덩굴의 일정한 구간마다 피어 있는 작은 보라색 꽃의 향은 사람을 취하게 했다.
그 누각 아래에는 거대한 진 하나가 평평한 대 위를 완벽하게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의 중앙에 품영각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음양이 서로 교차하며 모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그 안에서는 진을 깨부술 듯 강력한 세 갈래 기운도 풍겨났다. 이 세 갈래의 기운은 하얀색의 긴 흔적이 되어 진 안쪽의 사방에서 돌아다녔으나, 기이하게도 서로 충돌하지는 않았다.
품영각 밖에서는 한 중년 남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그의 두 눈은 검처럼 날카로웠고 얼굴은 백옥처럼 희었다. 턱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수염은 바람도 없는데 흩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신선처럼 탈속적인 느낌이었다.
그의 수준은 완전히 가려져 있어 그보다 높은 수준의 수련자가 아닌 이상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은 세상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침착했다. 모든 심신은 무릎 위에 놓인 물건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두 무릎 위에는 7척 길이의 검 한 자루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벽옥색을 띤 이 검은 어스름한 빛을 발했으며, 햇빛이 쬐자 사방을 그 벽옥색 빛으로 뒤덮었다.
한제는 품영각으로부터 수백 척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저자의 수준은 화신기 후기의 절정에 이르렀군. 하지만 그에게서는 아주 깊은 곳에 숨겨진 듯한 검기(劍氣)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