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06
한편 눈에 잘 띄지 않는 어느 공터 중앙에는 회색 옷을 입은 천운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어떤 선력의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호흡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근처를 지나던 한제는 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서서히 고개를 돌려 그 천운자를 바라보았다.
“회색? 천운자는 일곱 빛깔 색채를 신봉하며 거기에 검은색과 흰색을 더한 아홉 가지 색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한데 회색이라니…?”
한제는 기이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회색 옷을 입은 천운자를 보면 볼수록 한제의 눈빛이 변해갔다. 눈앞의 천운자의 용모는 이전까지 보았던 천운자와 똑같았지만 한제는 뛰어난 관찰력을 통해 눈앞에 있는 그가 다른 천운자들보다 약간 더 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젊은 천운자라⋯⋯.”
한제가 눈을 번득이며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도 깜빡하지 않고 회색 옷의 천운자를 살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 동안 회색 옷의 천운자는 마치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군!”
한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불쑥 손을 들어 올려 하나의 잔영을 허공에 띄웠다. 이것은 일종의 금제로 서서히 응결되더니 검은색 결인이 됐다.
한제가 그것을 회색 옷의 천운자에게로 내던졌다.
쐐액!
금제의 결인은 곧장 회색 옷을 입은 천운자에게 돌진해 몸을 관통했다. 회색 옷의 천운자는 조금의 변고도 일으키지 않고 그 금제를 따라 사라졌다.
흠칫 놀란 한제는 신식을 이용해 사방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회색 옷의 천운자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훌쩍 날렸고 하늘을 날면서 신식을 펼쳐 이 일곱 빛깔 색채로 가득한 세상 안을 살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제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그는 두 말 않고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빠르게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춘 한제는 전방 수천 척 밖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 회색 옷의 천운자를 발견했다.
한제는 1천 척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그 천운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저물대를 두드려 선검을 꺼내 들고는 곧장 휘둘렀다.
번쩍!
선검에서 검광이 튀어나왔고 그와 동시에 굽은 칼도 허공을 갈랐다.
특히 굽은 칼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여 눈 깜짝할 사이 회색 옷을 입은 천운자의 가슴을 스쳐갔다. 하지만 그 천운자는 허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런 상해도 입지 않았다. 뒤이어 달려든 선검의 검광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때, 회색 옷의 천운자에게서 돌연 살기가 끓어올랐다. 하늘을 뒤덮을 만큼 짙은 살기였다.
이 살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 미친 듯이 확산됐다.
먼 곳에서 호흡을 하거나 수련을 하던 다른 천운자들이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기이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곧장 이쪽으로 달려들어 눈 깜짝할 사이 회색 옷을 입은 천운자를 중심으로 반경 1만 리 안에 모여들었다.
“봉인!”
반경 1만 리를 에워싼 모든 천운자가 일제히 외쳤다. 그러자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기이한 힘이 엄습했다. 형태 없는 거대한 그물 같은 그 힘은 중앙에 있는 회색 옷의 천운자를 향해 내려앉았다.
허나 회색 옷의 천운자는 냉소를 흘리며 고개를 들더니 한 마디 외쳤다.
“꺼져!”
그 한 마디에 하늘과 땅의 색이 변했다. 그를 봉인하려 들던 무형의 그물은 순간 무너져 내렸고 상상을 초월하는 짙은 살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크악!”
“컥!”
여기저기서 비명이 이어지더니 거의 모든 천운자가 수만 리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이제 1만 리 범위 안에 남아 있는 것은 가장 강력한 위력의 술법을 발휘하는 몇 명의 천운자뿐이었다.
짙은 살기에 한제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그의 본체가 발휘하는 살기조차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한제가 지금껏 겪어본 것 중 가장 강력한 살기였다.
하지만 한제를 진정으로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조금 전에 회색 옷의 천운자를 둘러쌌던 천운자의 수가 꼭 3천 6백 명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한 명이 많아!”
한제의 시선이 회색 옷의 천운자 즉 3601번째 천운자에게 꽂혔다.
바로 그때, 회색 옷의 천운자가 처음으로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더니 한 쌍의 회색 눈동자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이 닿은 순간, 한제는 원신이 떨려오고 귓가에서는 천둥과 같은 우렁찬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해하지 마라!”
한제의 심신이 격렬하게 떨려왔고 원신은 미약해졌다.
한참 뒤에야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여 정신을 차린 한제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있던 회색 옷의 천운자는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이상하군.”
한제는 착 가라앉은 얼굴로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신식을 펼쳐 다시 회색 옷의 천운자를 찾기 시작했다. 지금 그에게 다른 천운자들이 가진 금지된 술법은 아예 관심에서 사라졌다.
살육 선결(仙訣)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제는 전력을 다해 탐색한 끝에 회색 옷의 천운자를 찾아내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회색 옷의 천운자는 그때마다 다시 모습을 감추었고 한제는 어떻게든 다시 그를 찾아냈다.
그렇게 회색 옷의 천운자를 마주친 횟수가 여섯 번에 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여섯 번째 만남은 한제가 천운자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천운자가 한제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날은 한제가 더 이상의 탐색을 포기하고 일전의 그 일곱 빛깔을 이용한 신통력을 발휘하는 천운자에게로 다가갔다. 이 술법이 그가 이곳에서 본 것들 중 가장 강력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술법을 배워야 할 모양이군’
그가 막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순간, 갑자기 냉랭한 목소리가 한제의 귀에 꽂혔다.
“너, 천운자의 제자냐?”
한제는 움찔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1백 척 정도 떨어진 곳에 회색 옷의 천운자가 마치 유령처럼 서 있었다.
일곱 빛깔 광채를 이용한 신통력을 수련하던 천운자는 얼른 공법을 거둔 뒤 고개를 들어 회색 옷의 천운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회색 옷을 입은 천운자의 눈빛이 변하는 순간 곧장 뒤로 물러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왜 왔지?”
회색 옷을 입은 천운자가 여전히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배울 금지된 술법을 택하기 위해서입니다.”
한제가 여유롭게 답했다.
“금지된 술법이라⋯⋯.”
회색 옷을 입은 천운자의 표정에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
“천운자가 이곳에 다른 사람을 들여보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너를 이곳에 들여보낸 것은 나를 위해서일지도 모르겠군!”
한제는 침착한 눈빛으로 떠보듯 물었다.
“선배님은 대체⋯⋯?”
그러나 회색 옷의 천운자는 한제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툭 내뱉었다.
“네 경지의 힘을 보여라!”
한제는 잠시 망설였으나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곧 생사윤회의 경지가 그의 체내에서 발산됐다. 뒤를 이어 그의 정수리에서 흑백의 두 가지 색이 나타나더니 빠르게 섞여들어 생사윤회의 축을 형성했다.
회색 옷의 천운자는 밝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격해보아라!”
한제는 두 말 않고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정수리 위에 떠오른 생사윤회의 축이 순간 그의 손에 떨어졌다. 한제는 그 한쪽 끝을 잡아당겨 족자를 열더니 짧게 외쳤다.
“생사, 윤회!”
그 순간, 족자의 흑백 산수화에서 회색 기운이 줄기줄기 마치 창룡처럼 뿜어져 나와 포효하며 회색 옷의 천운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천운자의 두 눈에서 회색빛이 번득이며 튀어나와 곧장 한제의 눈에 꽂혔다. 이에 창룡처럼 뻗어나가던 회색 기운은 천운자의 코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생사윤회의 경지라⋯⋯.”
회색 옷의 천운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운자가 너를 이곳에 들여보낸 목적은 역시 나의 살육 선결(仙訣) 때문이로구나. 네게 그럴 만한 기회와 인연이 있는지 보려는 게지. 살육 선결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선술을 모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이 선결은 너의 생사윤회의 경지와 아주 잘 어울리지. 허나 내 살육 선결을 배우기 전에 약속해야 할 것이 있다.”
한제는 내심 가슴이 뛰었으나 침착한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살육 선결을 사용할 때에는 살길을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회색 옷의 천운자는 냉랭한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이에 잠시 망설이던 한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배우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제는 천운자를 향해 포권을 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회색 옷의 천운자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예리한 검과 같은 한 줄기 회색 기운이 튀어나와 한제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휙!
날카로운 기운을 느낀 한제는 맹렬히 몸을 돌렸다.
그 회색 기운은 한제가 몸을 돌린 순간 그의 곁을 스쳐지나가며 1만 척 밖에서 수련하고 있던 다른 천운자를 가격했다.
“끄윽!”
공격을 당한 천운자의 허상은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다가 기이한 안개 형태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그 안개 속에서 회색빛이 번쩍 하고 튀어나와 회색 옷의 천운자에게로 돌아와 복잡한 문양을 이룬 채 허공에 떠올랐다.
“이 낙인은 살육 선결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살육을 통해 생기의 힘을 얻고 생기의 힘으로 육신의 주변을 배회함으로써 생(生)의 낙인을 응결시키지. 이 낙인이 많아질수록 방어력도 강해진다. 나의 몸은 억만 개의 낙인으로 보호되고 있어 이 천운성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무사할 수 있지. 이런 선결을 배우지 않겠다는 것이냐?”
회색 옷의 천운자가 차게 물었다.
한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