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20
‘허나 영력도 없는 이들이 모인 곳에 어떻게 저런 진이 있단 말인가? 뭐, 이유를 알아내려면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겠지.’
생각을 정리한 한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좌선을 계속했다.
머지않아 산골짜기 안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 뒤를 이어 몇 덩어리의 빛이 번득였고 이번에는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몸에는 녹색 액체가 묻어 있지 않았다. 대신 기이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골짜기 안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혀끝을 깨물어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내 바닥에 뿌렸다. 그러더니 곧장 산골짜기로 달려갔다.
덤덤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제는 허공에 손을 움켜쥐었고 그러자 도망치던 두 사람 또한 좀 전의 네 사람처럼 속박되어 옆으로 내던져졌다.
그 무렵, 그들이 내뿜은 선혈이 뿌려진 땅에서는 한 덩어리의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안개는 금세 확산되어 산골짜기 바깥까지 완벽히 뒤덮였다.
그 순간에도 한제는 덤덤하게 산골짜기를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떠한 법술이나 신통력도 발휘하지 않았다.
붉은 안개가 극한으로 짙어졌을 때, 돌연 산골짜기 안에서 격렬한 포효와 함께 검은 인영 하나가 산골짜기 안에서 걸어 나왔다. 붉은 안개에 휩싸인 그에게서 기이한 느낌이 풍겼다.
“우리 부족원들을 풀어주고 네 부락으로 돌아가라.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검은 인영에게서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제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내딛었다. 그 걸음 하나에 한제의 몸에서부터 수많은 파문이 일어나 요동쳤다.
콰르릉! 쾅!
한제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인영이 뒤로 밀려났다. 뿐만 아니라 산골짜기를 뒤덮은 붉은 안개가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 세 걸음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세 걸음이 끝났을 때, 남은 것은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는 곧장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그 순간 한제가 허공에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는 어느새 한제 앞에 떨어져 있었다.
한제는 그자 역시 다른 여섯 명과 함께 힘으로 속박해둔 후, 뒷짐을 진 채 진을 몇 번 더 살펴보다가 다시 말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골짜기 안의 장로
산골짜기 안의 사람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말없이 한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흘 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그 사흘 동안 한제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산골짜기 안에서도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흘 째 되던 날 이른 새벽, 산골짜기 밖의 진에서 돌연 우르릉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검은색 지팡이를 짚고 산골짜기 안으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반라 상태의 부족원 십여 명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모두 얼굴이 노랗게 뜨고 몸이 빼빼 말랐지만 두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났다.
“외지에서 온 수련자여, 일전의 일은 우리의 잘못이니 부디 용서하게. 나는 이 산골짜기의 장로 구양화일세. 우리 부족원들을 풀어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나?”
★ ★ ★
구양화는 사람들이 산골짜기 앞에 가져다 놓은 의자 하나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 앞에는 거대한 동물이나 마수의 뼈로 만든 듯한 탁자 위에 여러 가지 과일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기억나는 순간부터 이곳에서 생활했네. 여태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어.”
한제는 여전히 말없이 상대의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좀 전까지 속박되어 있던 사람들은 이미 풀려나 산골짜기 안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이곳이 얼마나 넓은지조차 알지 못하네. 이 늙은이가 아는 거라곤 여기서 3천만 리 떨어진 곳에 거대한 연못이 하나 있다는 것뿐이야. 그곳은 바로 고요성(古妖城)이라네! 난 어렸을 때 그곳에서 공부를 했지. 외지의 수련자여,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게 무엇이든 우리 같은 작은 부족에는 없을 걸세.”
구양화의 목소리에는 오랜 지혜가 담긴 듯했다.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십니까?”
한제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를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지. 자네는 이곳 사람이 아니야. 5천 년에 한 번씩 자네와 같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그때마다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지. 그러니 자네를 환영할 수 없는 걸세.”
구양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제는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최근에 저와 같은 자들을 봤거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직은 없네. 앞으로도 없길 바라고… 부탁이니 이만 떠나주게. 고요성이라면 무엇이 됐든 자네가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을 게야.”
구양화는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야 할 것은 다 말해주었네. 자네가 강력한 것은 알고 있지만 나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닐 걸세. 그러니 공연히 일을 벌이지 말게. 셋을 세겠네. 그때까지 떠나지 않는다면 나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한제는 무심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한 줄기 푸른 빛이 그의 손에 응집됐다. 격렬하게 번득이는 푸른 빛은 한제의 손짓에 곧장 산골짜기로 날아들었다.
콰르릉!
그 푸른 빛이 접근한 순간, 산골짜기의 진이 활성화됐다.
이어서 한제는 차게 웃으며 저물대에서 금번을 꺼내 휘둘렀다. 순식간에 999개 조의 금제들이 수많은 검은 기운이 되어 사방을 뒤덮었다. 그 순간, 그 수많은 검은 기운 속에 우뚝 선 한제는 마치 마왕 같았다.
“진을 파괴하라!”
한제의 말에 사방을 채웠던 999개 조의 금제들은 미친 듯이 진에게 달려들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구양화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그는 깊은 물처럼 아득하고 어두운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더니 돌연 냉소하기 시작했다.
“크흐흐. 젊은이, 결국 명을 재촉하는 겐가?”
몸을 훌쩍 날린 구양화는 한제의 눈앞에서 빛으로 변해 흩어지듯 사라졌다.
허나 한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구양화가 허상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붙잡아두었던 부족원들을 그리 쉽게 풀어준 이유는 지난 며칠간의 관찰 끝에 산골짜기의 진을 상고 시대 금제로 부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제는 결인을 한 오른손으로 산골짜기 밖의 진을 가리키며 가볍게 외쳤다.
“폭발!”
콰르릉!
거대한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고 산골짜기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진에서는 눈부신 푸른 빛이 번쩍 피어올랐다.
그때, 산골짜기 안에서 구양화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 떠나지 않는다면 공격용 진을 활성화시킬 것이다! 그러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응결!”
한제가 가볍게 외쳤다.
그 순간, 999개 조의 금제가 다시 한 번 거대한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자폭했고 그 엄청난 충격은 모두 진을 향해 쏟아졌다.
우르릉!
진은 또다시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구양화의 목소리가 끊겼고 산골짜기 안에서는 분노에 찬 포효가 들려왔다. 또한 산골짜기는 푸른색 빛으로 번쩍거렸다.
빛은 눈 깜짝할 사이 극한까지 밝아졌고 줄기줄기 푸른색 파문이 산골짜기 밖의 지면과 절벽, 초목 등으로부터 떠올랐다. 이 파문들은 곧장 산골짜기 안에서 번득이고 있는 푸른 빛 안으로 흡수됐다.
산골짜기의 푸른 빛은 이제 거대한 허상으로 변해갔다. 이 허상은 높이만 수십 척에 달하는 인간의 형상이었으나, 정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산골짜기 안에서는 다시금 구양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외부자여, 이 모든 것은 네가 자초한 일이다! 청영, 저자를 죽여라! 저자의 혼백을 오늘 밤 요령일(妖靈日)에 쓰일 제물로 삼을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푸른 허상은 기묘한 포효를 내질렀다. 크지 않은 포효였지만 하늘이 떨리고 대지가 흔들렸다.
한제는 냉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린 뒤 가볍게 외쳤다.
“금법(禁法)의 창!”
이어서 손을 움켜쥐자 수많은 검은 하늘 끄트머리에서 용처럼 춤을 췄고 순식간에 하늘은 온통 그 검은 기운으로 가득 뒤덮였다.
그 기운들은 빠르게 한제의 오른손으로 응집되더니 사람 팔뚝 정도 굵기에 길이가 30척에 이르는 검은색 창이 됐다.
우르릉!
검은색 파문이 번득이는 창에서는 끊임없이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또한 창의 날에서는 탁한 빛이 번득였는데 태양보다도 강렬해 보는 이의 눈을 시리게 할 정도였다.
한제는 말없이 창을 휘둘렀고 그러자 한 줄기 검은 번개가 푸른 허상을 향해 날아갔다.
콰르릉!
번개는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돌진했다.
푸른 인영의 두 눈이 있을 법할 곳에서 기이한 빛이 번득이더니 한 손을 들어 마치 수련자처럼 결인을 그렸고 주문을 외듯 입을 살짝 벌렸다. 순간, 주위의 모든 땅과 풀, 나무에서 대량의 푸른 빛이 떠올라 산골짜기는 온통 푸른 빛에 뒤덮였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푸른 인영이 결인을 그린 순간, 한제는 곧장 수백 척을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긴 창은 번개보다 더 빠른 속도로 푸른 인영에게 달려들었다.
“얼마나 하는지 어디 좀 볼까?”
거리를 벌린 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느덧 하나하나 금제들의 조합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조합들은 한제의 머릿속에서 문양이 되어 기이한 빛을 번득였고 서로 연결됐다가 풀어지더니 다시 연결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중에 다시 풀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는 문양들이 하나둘 생겨났고 그런 문양 형태의 금제는 한쪽에 따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따로 모여든 문양의 형태의 금제가 수십 개에 이르렀고 나머지 문양들은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것은 보통의 금제가 아니라 당시 고대 신의 땅에서 배운 것으로 매우 오래된 것이었다. 심지어 상고 시대의 수련자들도 파악만 하고 있을 뿐 스스로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57번째⋯⋯.”
한제는 멈추지 않고 과정을 반복시켰다.
그러는 사이 금제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긴 창은 이미 그 푸른 인영의 10척 앞에 이르러 있었다.
콰릉!
푸른 인영은 하늘을 갈라버릴 듯한 긴 창의 엄청난 기세와 그로 인한 강력한 바람에 무너져 내렸고 그 순간 주위를 가득 메운 푸른 빛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