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23
한제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요령의 결정에 대한 비밀을 모두 풀면 다음 행보를 정할 수 있을 거야. 5백 년은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이기도 하다. 만약 이 요력을 흡수해 수준을 높일 수 있다면 수마해에서처럼 대량의 살육을 벌이는 것도 불사하겠다.’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입술을 핥았다.
★ ★ ★
시간은 천천히 흘러 깊은 밤이 됐다. 깜깜한 하늘 아래 부족원들은 모닥불을 내버려둔 채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장정들은 갖가지 무기를 든 채 다시 달빛 아래 속속 산골짜기 입구로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 선 구양화는 굳은 눈빛으로 산골짜기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고개를 돌려 한제가 있는 곳을 잠시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진이 요령에 대항할 수 있기를 어르신께서 도와주기를⋯⋯.”
구양화가 한제를 산골짜기 안으로 들인 것은 그에게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평소에 비해 현저히 약해진 상태인 진이 요령의 밤에 버텨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제에게 수많은 비밀을 알려준 것도 요령의 결정을 내준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을 때 한제가 나서주기를 바란 것이다.
곁에 모인 부족원들을 바라보던 구양화는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어라. 오늘 밤만 버티면 모든 것은 평안해질 것이다!”
★ ★ ★
한제는 돌연 두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어둠 속에 한 줄기 보라색 기운이 어려 있었다. 수많은 요력이 하늘 끄트머리에서부터 마치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이 산골짜기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닌 듯했으나,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터였다.
한제는 무언가 결심한 듯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고 그러자 그의 원신은 신식이 되어 곧장 육신에서 빠져나와 산골짜기의 진을 지나쳐갔다.
원신은 멈추지 않고 빠르게 날아 성난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는 요기에게 달려들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요력들이 내뿜는 힘은 강력해졌다. 요력들은 하늘을 뒤덮을 듯 너무나 넓게 퍼져있어 그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또한 이 요력들이 뒤덮은 곳에서는 풀도 생기를 잃었고 야수들도 비참한 비명을 흘리며 백골이 되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한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 줄기 보라색 기운이 끝없이 넓은 요령의 땅을 물들이며 사방으로 둥글게 퍼져나갔다.
신식이 된 한제의 원신은 이내 철수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한제의 원신이 우뚝 멈추었다가 신식을 맹렬하게 펼치더니 곧장 요력의 기운에게 달려들어 그 깊은 곳에 떨어졌다.
요력의 기운 깊은 곳, 보라색 기운이 줄기줄기 맴도는 그곳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그의 얼굴은 냉랭했고 입술이 매우 얇아 각박해보이는 인상이었다.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은색 세검(細檢)이 들려 있었는데 그것을 휘두르자 수많은 보라색 기운이 검 주위를 맴돌았다. 동시에 대량의 요력이 그에게 미친 듯이 흡수됐다.
한제가 신식을 펼친 순간, 그 검은 옷의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피더니 더없이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내 존재를 알아차리다니, 제법이군.”
검은 옷의 사내는 들고 있던 검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나와 마주친 이상 멀리 도망가야 할 것이다. 이제 너는 나의 사냥감이다!”
신식이 된 한제의 원신은 냉랭하게 그 사람을 바라보더니 돌아왔다. 검은 옷의 사내는 한제를 막지도 않고 그저 경멸 어린 냉소만 지을 뿐이었다.
“겨우 영변기 중기 수준이군. 어느 문파 소속이든 상관없다. 오늘 밤, 넌 반드시 죽는다! 네 요력의 결정을 거두면 나는 천요성(天妖城)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될 터.”
사내의 눈에 광기 어린 빛이 스쳐갔다.
신식을 거둔 한제는 산골짜기 안에서 서늘하게 번득이는 눈을 떴다.
“이곳에 들어온 이래 처음 만난 천운성 수련자로군. 영변기 후기 절정에 이르렀지만 나를 죽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무렵, 요력의 기운이 성난 파도처럼 몰아치면서 산골짜기를 공격했다. 순간 활성화된 진이 끊임없이 푸른 빛을 번득이며 요력의 충격에 저항했다.
요력의 기운이 일으킨 충격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점차 산골짜기 진에서 일으키는 푸른빛은 점차 버텨내기 벅차 보였다.
생(生)의 낙인
산골짜기 안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분위기는 무거웠다.
입구에 모여 있던 모든 장정들은 손에 쥔 무기를 바르쥔 채 꼼짝도 않고 산골짜기 입구를 주시했다.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배어나왔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가장 앞에 선 구양화는 두 손을 들고 복잡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러자 진의 푸른 빛이 짙어졌다.
요령의 밤은 세 달에 한 번씩 찾아왔다. 구양화는 이 진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은 불안했다. 한제의 공격으로 진의 위력이 반이나 약해졌기 때문, 요령들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일단 진이 무너지면 산골짜기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요기속에 숨은 요령에 의해 산채로 삼켜질 것이다.
눈앞에서는 성난 파도와 같은 요력이 공세를 쏟아붓고 있었다. 진은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한데 그때,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콰르릉!
무거운 무언가가 진을 때린 듯한 충격에 이어 진이 크게 휘청대더니 더 많은 균열이 나타났다.
산골짜기 안에 숨어 있던 여인들과 아이들은 그 소리에 잠에서 번쩍 깼다.
★ ★ ★
산골짜기 밖 저 멀리, 요력의 기운에 휩싸인 검은 옷의 사내가 검을 휘두르자 선혈이 튀었다. 막 요기 안에서 나타난, 온몸이 시커멓고 머리에 뿔이 달린 기이한 생물은 두 동강이 났다. 그러더니 한 줄기 요력이 그 생물의 체내에서 흘러나와 곧장 사내의 입을 통해 흡수됐다.
사내는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다가 잠시 후 번쩍 떴다. 그러더니 저 멀리 있는 산골짜기를 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가 검을 휘두르자 한 줄기 번개가 나타났다.
사내는 몸을 훌쩍 날려 곧장 비검에 올라타 번개와 같은 빠른 속도로 산골짜기를 향해 돌진했다.
★ ★ ★
산골짜기 안 깊숙한 곳.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는 한 걸음 내딛었고 순식간에 푸른 연기가 되어 곧장 산골짜기 입구에 있던 구양화 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갑자기 나타나자 주변에 있던 부족원들은 화들짝 놀라 흩어졌다.
구양화는 희색을 띤 채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 순간, 산골짜기 밖에서 번개와 같은 비검이 날아들었다. 그 안에서 검은 옷의 사내가 냉랭하게 외쳤다.
“사냥 시작이다!”
평온한 한제와 달리 구양화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두 외부자의 살육을⋯⋯ 직접 보게 되다니⋯⋯.”
바로 그때, 한 줄기 검광이 스쳐 지나가면서 산골짜기의 진을 뒤흔들었다. 진은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간 듯했다.
“사냥이라… 그래, 내가 너를 사냥해주지.”
한제는 차게 웃더니 오른손으로 저물대에서 금번을 꺼내 들고는 곧장 휘둘렀다. 그러자 금번은 공중으로 떠올라 검은 금제를 줄기줄기 내뿜었고 금제들은 쉭 소리를 내며 빠르게 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진을 뒤덮은 균열은 빠르게 맞물렸고 이전보다 그 위력이 더욱 강력해졌다.
작업을 마친 한제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산골짜기 바깥이었다.
수백 척 떨어진 곳에서는 검은 옷의 사내가 비검에 올라 냉랭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주위로 수많은 보라색 기운이 마치 유혼처럼 돌아다녔고 그 속에서 강력한 요력을 발산하는 요령의 마수가 나타나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묵묵히 오른손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크아아!”
한제의 가벼운 손짓에 요령의 마수 한 마리가 비참한 신음을 흘리며 사라져버렸다.
이를 본 검은 옷의 사내는 표정이 급변했다. 방금 전까지의 오만방자한 기색이 사라지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느 문파의 사람인가?”
한제는 세 줄기의 회색 기운이 끊임없이 맴도는 오른손에서 시선을 돌려 냉랭한 눈으로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나를 사냥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사냥당하겠다는 거였나?”
검은 옷의 사내는 기가 찬 듯 웃었다.
“허! 불손한 자로군. 낯이 익어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그렇게 죽고 싶어 안달이 났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한제는 말없이 저물대에서 선검을 꺼내 들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휘둘렀다. 그러자 한 줄기 검광이 쏘아져 나갔고 굽은 칼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검광을 본 순간 검은 옷의 사내는 표정이 크게 변해 얼른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