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3
그 순간, ‘그것’이 다시 나타나 한제의 진 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괴물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진을 두르고 있는 안개를 살폈다. 약간 망설이는 듯하던 괴물은 결국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한제는 줄곧 상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급하게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상대의 실력을 먼저 보고 싶었다.
괴물은 안개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그 자리에 멈췄다. 괴물의 눈에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어서 괴물은 몸을 움직여 진 안으로 들어왔다.
괴물이 진 안으로 진입한 순간, 한제의 눈에 살기가 번득였다. 오른손을 결인한 그가 흰색 섬광을 진 안쪽으로 내뿜자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어 진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이 하나씩 파괴되었고 이에 따라 안개의 색도 점점 옅어졌다.
한제는 초록색 빛을 내뱉었다. 번쩍이며 눈 깜짝할 사이 날아든 초록색 빛에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안개 속에서 괴물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거대한 힘이 진 안에서 밖으로 일며, 고리 형태의 파동이 광풍처럼 퍼졌다. 무수히 많은 돌조각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그 힘에 나가떨어지고 터져나갔다.
안개가 흩어져 사라진 순간, 한제를 본 괴물의 눈에는 피에 굶주린 듯한 욕망이 맴돌고 있었다. 괴물은 잔인하게 웃으며 한제를 향해 다가왔다.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오른손을 휘저었다. 순간 초록색 섬광이 번쩍하며 비검이 괴물의 등 뒤에서 나타나 괴물의 등을 꿰뚫었다.
그의 심장이 있을 가슴팍에서 파란색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피는 뿜어져 나오자마자 얼음처럼 변하더니, 고체 상태로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한제는 장호로부터 받은 부적을 꺼내든 뒤 빠르게 괴물을 뒤쫓았다. 허나 순간, 한제는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괴물의 몸이 허공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각도로 뒤틀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땅에 착지한 것이다. 그 가슴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푸른색 피가 우수수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한 온몸의 모든 부호가 빠르게 반짝이더니 괴물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넌 누구지?”
한제는 급격하게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상대가 몸에 붙은 부적을 하나 떼어낼 때마다, 죽음에 임박한 상황에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이 결투는 절대 짧은 시간 안에 끝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 ★
“난 이곳에서 수련 중이다. 이쯤에서 물러나 앞으로 나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무의미한 싸움은 여기에서 그만두도록 하겠다.”
한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내뱉었다.
괴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려 날카롭게 몇 마디 내뱉었으나,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상대 역시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듯했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옆으로 몇 보 움직인 한제가 무너진 담 옆에 이르렀다. 괴물은 한제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곧장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무너진 담 아래로 획을 그었다. 괴물은 멍하니 눈도 깜짝이지 않고 한제의 손을 바라보더니, 이내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내비쳤다.
괴물은 그 무너진 담의 조각 몇 개를 집어 들더니 돌을 사방에 배열해놓고 한제를 바라보며 또다시 기괴한 소리를 냈다.
구겨졌던 한제의 미간이 풀어졌다. 그가 오른손을 들자 괴물이 늘어놓았던 돌조각들이 모두 떠오르더니, 모종의 규칙에 따라 옆에 놓였다. 뒤이어 결인하자 하얀색 빛이 한 갈래 뿜어져 나오면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배치된 돌 주위를 감쌌다.
“이 진법을 말하는 거야?”
한제는 괴물을 바라보며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물었다.
곧장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잔뜩 흥분한 기색을 드러낸 괴물이 가슴을 두드리자 그의 몸에 있던 부호들이 반짝였다. 그가 낮게 포효하며 두 팔을 벌리자 순간 땅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진법이 그려진 땅이 천천히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구덩이가 드러났다.
괴물은 다급히 걸음을 멈추더니, 손에 든 원형의 물체를 흔들었다.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듯했다.
한제의 냉랭한 표정을 확인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한제에게 던졌다. 그것은 한제의 발 앞에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괴물은 그것을 던져놓고는 한제를 향해 씩 웃은 뒤 곧장 몸을 돌려 다시 사라졌다.
하늘이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괴물이 사라진 방향을 신중하게 바라보던 한제는 이내 원형의 물체를 내려다봤다.
그것은 주먹의 10분의 1정도 크기를 가진 구슬이었다. 겉에는 재가 가득 묻어있었으며, 끄트머리에는 심지어 작게 갈라진 흔적도 나있었다. 그 구슬을 이리저리 살피던 한제의 표정이 문득 바뀌었다. 그는 곁에 있던 돌을 집어 들고 그 구슬을 살살 건드려보았다.
미약한 영기의 파동이 그 구슬로부터 느껴졌다.
“이건 법보인가?”
놀란 한제는 구슬을 허공으로 떠올려 신중하게 살폈다.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구슬을 손에 쥐고 신식으로 구슬을 살피며 영기를 발휘했다.
이내 구슬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우글쭈글한 피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그 노인에게서는 위험한 기운이 잔뜩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는 한제를 훑어보는가 싶더니 멸시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감히 이 몸과 싸워볼 테냐?”
흠칫 놀란 한제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그를 자세히 살폈다. 상대의 수준은 응기 15단계 정도였다. 코를 긁적이던 한제는 눈을 빛내며 더욱 강한 영기를 발휘했다.
영기를 느꼈는지 노인의 수준이 급격하게 상승하더니 마침내 축기 중기에서 멈추었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노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노인은 전의가 불타는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감히 이 몸과 싸우려는 것이냐?”
한제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 구슬 모양의 법보가 무슨 작용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다시 대량의 영기를 발휘했다.
노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의 기세도 다시 급격하게 상승하더니 마침내 한제로서는 바라볼 수도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노인은 짙은 영기를 토해내며 고고한 자태로 뒷짐을 졌다.
“결단기 이하의 수준을 가진 녀석들은 이 몸과 싸울 자격이 없다. 꺼져라!”
한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얼른 영기를 거두자 노인도 하얀색 연기와 함께 구슬 안으로 돌아갔다. 캉, 하는 소리와 함께 구슬에 금 하나가 더 생겼다.
한제는 손에 들린 구슬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법보의 작용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이것은 환술 법보로 거의 실제와 다름없는 노인의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노인은 표정으로 보나 기질로 보나 움직임으로 보나 ‘고수’의 품격을 드러냈다. 기세와 표정 모두 하늘을 찌를 듯 고고했다. 절대 손에 넣기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노인의 몸에서 흘러넘칠 듯 풍겨 나오는 그 기세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세기의 고수처럼 느껴질 터였다.
게다가 상대의 수준에 맞춰 수준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구슬에 불어 넣는 영기가 많아질수록, 그 노인의 실력은 더욱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겁먹게 하는 데에는 분명 적지 않은 효과가 있을 터였다.
“그 괴물도 정말 웃기는 녀석이군. 종적을 감추는 진법을 가져간 게 미안해서 나한테 이런 보물을 준 건가?”
한제는 구슬을 챙기며 피식 웃었다.
그는 이 사실을 통해 괴물은 구슬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과 이 폐허가 된 도시 안에 이런 법보가 몇 개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제 이 폐허가 된 도시는 한제의 눈에 비밀스러운 보물 창고로 보였다.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빛기둥, 환술을 부릴 수 있는 법보, 신비의 괴물까지… 이곳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거지?”
한제는 생각에 잠긴 채 머리를 긁적였다.
하늘은 완전히 밝아진 상태였다. 그는 다시 새로운 진을 만들어낸 뒤 그 안에 앉아 음한기가 깃든 이슬을 마시고 호흡했다.
★ ★ ★
또다시 두 달이 지나갔다.
낮, 한제는 가부좌를 튼 채 방안에 앉아 있었다. 지난 두 달간 음한기를 호흡하면서 그의 체내에는 이미 짙은 음한기의 기단이 형성된 상태였다. 이에 그는 첫 번째 황천승규결의 충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배의 단전(丹田), 가슴의 기해(氣海), 얼굴의 조규(祖竅), 이 세 개의 혈을 각각 세 번씩 부수어야만 한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단전을 예로 들면 황천승규결의 방법에 따라 1단계를 완성하고 나면 단전이 열리는데 2단계의 공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단전을 먼저 부수어야 했다. 낡은 것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 것을 세울 수 없다는 원칙을 가진 셈이었다.
처음으로 나타난 흔적
한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알고 있는 방법에 따라 복부에 자리한 음한기 기단을 움직여 첫 번째 충규를 시작했다.
그의 통제 아래 음한기 기단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면서 복부에서 살살 고통이 느껴졌다. 공법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한제는 이것이 충규를 진행할 때의 정상적인 반응임을 알고 있었다. 고통이 격할수록 혈이 열릴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은 일반인이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날카로운 칼이 배를 찌르고 뱃속을 휘젓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제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혔고 단 몇 초 만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급격하게 움직이던 기단은 회오리 모양을 갖추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한제의 배는 파란색으로 변하며 서리가 어리고 있었다.
한제는 이를 악물었지만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다. 신음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서서히 음한기의 기운이 한제의 온몸을 휩쓸었다.
바로 그 순간, 기단의 회오리를 따라 시커먼 구멍이 나타나더니 음한기 기단은 마치 물에 빠진 돌처럼 빠르게 그 안으로 가라앉았다. 이어 그의 몸 안에 깃들어 있던 영력 역시 누군가에 의해 삼켜지는 듯했다. 온몸의 각 부위가 뜯겨 나가는 듯한 기분을 실감하지도 못한 채 시커먼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데 그 시커먼 구멍 안에서 기이한 변화가 발생했다. 영력과 음한기는 원래 어떤 충돌도 하지 않았으나,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간 뒤로는 격렬한 공격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둘은 점점 서로를 삼키면서 섞이더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영력을 형성해갔다. 그 이상한 영력은 시커먼 구멍 안에서 천천히 맴돌았다.
★ ★ ★
황천승규결의 1단계가 완성되고 단전혈이 열렸다.
한제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단전 밖의 음한 기류 중 3분의 1을 동원하여 단전에 충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음한기는 단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단전의 시커먼 구멍을 둘러싸더니 밖에서 안쪽으로 충격을 가했다.
충격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단전혈은 쉽사리 파괴되지 않았다.
한참 후에서야 단전의 새카만 구멍은 더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붕괴되어가는 흔적을 보였다. 한제는 곧장 다시 3분의 1에 해당하는 음한기를 동원해 단전혈을 파괴했다.
순간 극심한 고통이 엄습했다. 단전혈이 붕괴되는 그 순간, 단전 안에 있던 변이된 영력이 온몸으로 퍼졌다. 온몸이 덜덜 떨려왔지만 한제는 음한기를 동원해 재차 충규를 시작했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 밤이 찾아왔다.
한제는 여전히 충규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의 몸 안에 자리한 음한기 회오리의 속도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빠른 속도 때문에 단전에 위치한 성운과도 같은 회오리밖에는 볼 수 없었다.
자정 무렵, 음한기는 더욱 짙어졌다. 이때 한제의 몸은 마치 시커먼 구멍처럼 체내에 자리한 회오리의 회전에 힘입어 십 장 범위에 있는 모든 음한기를 빨아들였다.
이 엄청난 음한기는 한제의 몸 안으로 흡수되면서 곧장 단전에 자리한 회오리로 빨려 들어갔다. 회오리는 한제의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듯 점점 더 커졌다.
한제는 깜짝 놀라 멈추고 싶었지만 체내의 회오리는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 체내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황천승규결과 관련된 정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불안했다. 게다가 사도환은 잠들어 있는 상태라 모든 것은 한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반경 1백 장 안, 음한기는 마치 끓어오르듯 빠르게 움직였다. 이 범위 안에서의 기이한 변화는 더 넓은 범위에 달하는 음한기의 유동을 야기했다. 반경 1천 장 안에서 음한기는 보이지 않는 손처럼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제는 이미 이 회오리에 대한 통제를 잃은 상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단전혈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이는 단전혈의 두 번째 개통이었다. 첫 번째처럼 혈이 열리는 순간,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음한기 회오리는 휙 하고 곧장 그 안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