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43
“불같은 성격이군!”
한제의 말에 요석설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어디 내 성격이 이 도우의 성격만 하겠나.”
말을 마친 그녀는 누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문이 막혀 있어 칠흑처럼 어두운 누각의 문이 열리자 밖에서 쏟아진 햇빛에 요석설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드리웠다. 그 그림자 끄트머리에서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각오해야 할 걸세.”
한제의 목소리는 좀 전까지와 달리 매우 싸늘했다.
지금 그는 중요한 순간에 놓여 있었다. 몇 개월 동안의 폐관수련을 통해 영변기 후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방해를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요석설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약속?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을 약속이라고 하던가?”
요석설은 흠칫 놀랐다.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한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시간과 장소를 일방적으로 전했을 뿐 나와야 할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잠시 후, 요석설은 몸을 살짝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잘못했군. 용서하게. 이 도우의 도움이 필요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들이닥쳤어.”
“무슨 일이지?”
한제는 짧게 물었다. 눈앞의 여인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수련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요석설이 손으로 휘두르자 누각의 문이 순간 닫혔고 한 줄기 붉은 빛이 누각 안을 맴돌았다.
“비밀이 지켜져야만 하는 사안이라 이러는 것이니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이니 요석설은 잠시 자존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괜찮네.”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금제로 이루어진 진이 있어. 혼자서 풀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야. 이 도우의 도움을 받고 싶군. 그 진을 풀어낸다면 사례는 하겠네.”
요석설의 말에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조용히 말했다.
“지금 긴히 할 일이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없겠군. 미안하게 됐네.”
정말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 해도 상대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석설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제거할 수 없는 진이라면 자신도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요석설이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 한제로서는 그녀를 돕고 싶지 않았고 도울 이유도 없었다.
요석설은 처음부터 한제가 쉽게 도움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영변기 중기인 이 도우가 후기에 이르고 나아가 문정기 수준에 오르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선옥이 필요하겠지. 이 도우에게 충분한 양의 선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부족하다면 내가 보태줄 수 있네.”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어두운 그늘 속에서 밝은 빛 두 개가 번득였다.
“필요한 만큼 줄 수 있다는 의미인가?”
한제를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요석설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문정기에 이르는 데 필요한 만큼의 선옥을 줄 수 있어.”
요석설이 여유롭게 말했다.
한제의 마음이 흔들렸다. 선옥만 충분하다면 힘들게 요력을 흡수할 필요 없이 진즉 영변기 후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가진 선옥으로는 영변기 후기에는 이를 수 있어도 그 이후로 이곳에서 보내야 할 5백여 년 동안 선력에 손상이 생길 경우 보충할 선옥이 없어 곤란해질 수도 있다.
이런 문제가 있었기에 선옥을 아껴야만 했고 그래서 요력을 축적한 뒤 선력으로 전환해온 것이다. 그래서 영변기 후기 절정에 이르기만 하면 휘하의 요병들을 이끌고 출정해 수련자들에게서 선옥을 강탈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어때? 만약 제안에 동의한다면 일단 영변기 후기에 이르는 데 필요한 선옥을 먼저 주지. 나머지는 진을 파괴하고 돌아오자마자 주도록 하겠네.”
요석설의 말에 한제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어떤 진이지?”
“진의 이름은 몰라. 하지만 그 진이 활성화된 후 전륜법(轉輪法)이 나타났는데 그 안은 18개의 금제로 봉인되어 있었지. 11번째 금제까지는 내가 풀었어.”
요석설의 말은 대부분 진실이었지만 말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 진을 건드릴 경우 생과 사의 구분이 생겨나서, 파괴하는 데 실패하면 죽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나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네 번의 실패를 겪었고 네 번 죽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아버지가 힘들게 얻어낸 혈혼단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단약은 오직 13개 밖에 없었으며 대부분은 요석설이 가지고 있었다.
혈혼단(血魂丹)
한제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 진, 어디 있지?”
요석설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제안을 수락하기 전까지는 알려줄 수 없어.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 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수한 법보를 써야 한다는 것뿐이지. 지금 이 요령의 땅 안에서 나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어.”
한제는 요석설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숨기는 게 많군. 하지만 선옥은 분명 중요해. 문정기에 이르려면 천도를 깨달아야 하지만 선옥이 있다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을 테니까. 허나 저 여인의 꿍꿍이를 알기 전에 덥석 대답할 수는 없지.’
한제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군. 네 달 뒤 답을 주겠네!”
요석설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적지 않은 대가도 제시했고 부탁하는 입장임을 고려해 자존심도 굽혔다. 그런데도 한제가 네 달의 시간을 달라 하니 그녀는 불쑥 화가 치밀었다.
허나 한제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문정기에 이른 후에나 그 금제를 풀 가능성이 생길 터였다. 문정기에 이르는 데 필요한 선옥이야 부족하지 않았지만 천도를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을 이 땅의 원주민들이 안다면 엄청난 파장이 일 것이 분명했기에 은밀히 처리해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으로서는 한제가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가 입마 상태로 요장과 싸웠을 때 보여준 힘이라면 남은 금제를 푸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석설은 한제를 힐긋 보며 고민에 잠겼다. 네 달 동안 상대는 거절할 핑계를 더 많이 생각해낼지도 몰랐다.
요석설은 한층 냉랭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더 필요하지? 더 많은 선옥? 법보? 아니면 공법?”
한제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법보와 공법은 나 역시 적지 않아. 더 많은 선옥이 좋겠군.”
그 말에 요석설은 짙은 경멸을 느꼈다.
“선옥이라면 우리 아버지의 처소에 훨씬 많아. 요령의 땅에서 나간 뒤 내가 준 혈부(血符) 영패를 가지고 찾아가면 많은 선옥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하지만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니만큼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어.”
요석설은 순간 냉랭해진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생각이 너무 많군!”
“세 달로 하지.”
“뭐라고?”
요석설은 화가 난 듯 한제를 노려보다가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누각의 문이 벌컥 열렸고 요석설은 냉랭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멀리 가지 않겠네.”
한제가 여유롭게 말했다.
막 누각을 나서던 요석설은 멈춰 서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손으로 저물대를 두드려 납환 하나를 꺼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냉랭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걸 주지. 사흘 뒤 출발이야. 그때 오지 않는다면 제안은 없던 걸로 하겠어.”
한제는 굳은 눈으로 요석설의 손에 들린 납환을 바라보았다. 그냥 보기에는 평범했으나 세밀한 문양들이 새겨진 납환이었다. 그 문양이 기이하게 번득이는 것이 마치 박동하는 심장 같기도 했다.
“그건 뭐지?”
한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요석설은 경멸의 빛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이제 갓 천운자의 제자가 됐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건 우리 아버지가 혈성(血星) 안에서 만들어낸 혈혼단이야.”
“혈혼단?”
혈혼단에 대해 처음 듣는 한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천운성의 다른 수련자들이라면 그 이름만으로도 난리가 났을 정도로 혈혼단의 가치는 계산조차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 단약은 먹어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원신과 피와 살에 낙인을 남기지. 그렇게 서로 연결시켜 원신이 소멸되더라도 다시 한 번 살아날 수 있게 해. 쉽게 말해 단약이 죽음을 대신하는 거지.”
그제야 한제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오른손을 뻗었고 그러자 단약이 요석설의 손에서 빠져나와 그의 손에 떨어졌다.
요석설은 한제가 혈혼단을 살필 수 있도록 순순히 넘겼다. 허나 감탄하는 한제의 표정을 보며 내심 차게 웃었다.
한제가 가져간 것은 혈혼단이기는 했으나 불량이었다. 만약 이 불량 혈혼단에 의탁을 한다면 수명의 반이 줄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누군가에게 혈혼단을 강탈당할 것을 염려해 일부러 불량도 몇 개 만들어준 것이다. 불량 혈혼단에도 푸른 피가 들어 있긴 하지만 그 안에는 다량의 불순물과 독소가 섞여 있고 그들 부녀를 제외한 누구도 어느 것이 진짜 혈혼단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때문에 요석설은 다른 사람에게 혈혼단을 빼앗길 염려는 하지 않았다.
한제는 납환을 쥐자마자 그 납환에 새겨진 문양들을 느낄 수 있었다. 문양은 놀랍게도 한제의 심장 박동에 맞춰 변해가며 번득였다. 쥐고 있는 사람의 심장 박동에 따라 빈도수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단약을 쥐자 한제는 그 단약이 혈맥에 녹아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단약은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어 요석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옥을 줘.”
요석설은 두 말 않고 저물대를 꺼내 내던지며 말했다.
“이 정도면 영변기 후기에 이르기에는 충분할 거야. 나머지는 진을 파괴하고 돌아오는 대로 주지. 사흘 뒤, 자요(紫妖)가 강해지는 때 고산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