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44
한제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요석설은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려 자리에서 떠났다.
한제의 시선은 줄곧 요석설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쫓았다.
“내가 대가만 받고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은 걱정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천운종에 그토록 많은 선옥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녀의 아버지도 그에 못지않은 선옥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니 선옥을 내준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 혈혼단… 정말 그런 효능이 있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귀한 단약일 텐데 이토록 쉽게 넘긴다?”
한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혈혼단에 뭔가 문제가 있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겠군.”
한제는 저물대에서 평범한 혼번을 꺼내 휘두르며 외쳤다.
“조일두!”
혼번에서 검은 안개가 솟아오르더니 이내 조일두가 나타나더니 땅바닥에 엎드려 공손하게 말했다.
“주인님을 뵈옵니다.”
한제는 쓸 데 없는 말은 않고 곧장 본론을 말했다.
“혈성의 혈조(血祖)를 아느냐?”
조일두는 혈조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안색이 크게 변했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천운성 수련자 중 혈조를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소문에 따르면 일곱 차례나 천운자에게 도전했다고 합니다. 비록 매번 패했지만 수준은 갈수록 높아졌지요. 천운성에서 천운자와 능천 다음가는 수련자라고도 합니다.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자가 얼마나 강력한 자인지 짐작할 수 있지요.”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혈혼단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고?”
“혈혼단!”
조일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시 한제가 영변기 수련자의 육신을 약속했을 때보다도 더 놀라는 모습이었다.
“주인님, 혈혼단은 천운성에서 세 번째로 손꼽히는 보물입니다. 그 단약의 조화가 어찌나 대단한지 죽은 수련자를 보란 듯이 살려내지요. 그것은 혈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단약으로 그가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조일두는 잔뜩 흥분하여 목소리까지 빨라졌다.
한제는 오른손을 뻗었다. 그 손바닥에는 번득이는 문양이 새겨진 납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걸 알아보겠느냐?”
조일두는 흠칫 놀라 그 납환을 몇 번이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참 후에야 안색이 크게 변한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흰 도마뱀의 가죽으로 싸인 납환, 접촉한 사람의 심장 박동에 따라 번득이는 3614개의 문양, 쥐는 순간 육신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 주인님, 혹시 이 납환이 그렇습니까?”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일두는 거의 경악에 가까운 감격을 담아 탄성처럼 내뱉었다.
“주인님, 부디 선혈을 그 위에 뿌리십시오!”
한제는 잠시 망설이다 손가락 끝을 물어 낸 한 방울의 피를 그 납환에 떨어뜨렸다. 선혈이 납환에 떨어진 순간 한 줄기 푸른 빛이 그 납환 안에서 흘러나왔다가 3초 뒤 사라졌다.
“흰 도마뱀 가죽 아래의 문양에 피를 떨어뜨리면 푸른 빛이 돈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이것이 바로 혈혼단입니다.”
납환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조일두의 눈에 강렬한 탐욕이 어려 있었다.
한제는 어두운 얼굴로 그 납환을 힐긋 바라보다가 물었다.
“조일두, 천운성의 종파에 있었을 때 네 지위는 어느 정도였지?”
조일두는 한제의 말도 들리지 않는 듯 오직 혈혼단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영혼인 상태로 혈혼단을 흡수할 경우 새로운 육신을 응결시켜낼 수 있다고 했다.
조일두를 바라보던 한제는 차게 코웃음을 쳤다. 그 순간, 조일두는 정수리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조하듯 말했다.
“지위는 높지 않았습니다. 높았다면 주작성으로 보내지지도 않았겠지요.”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위도 높지 않은데 혈혼단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구나. 게다가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법까지도 알고 있다니 말이야.”
의심을 받았다고 느낀 것인지 조일두는 황급히 대답했다.
“주인님, 혈혼단의 진위를 판단하는 방법을 모르는 천운성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방법은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한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혼번을 휘둘러 조일두를 거둔 후, 손에 든 혈혼단을 바라보았다.
“천운성에서 세 번째로 뛰어난 보물이라는데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법이 어찌 그렇게까지 퍼져 있단 말인가? 이는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진 이가 계획한 일일 터. 혈조, 노련하고 교활한 노인네로군.”
한제는 납환을 움켜쥐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천운성의 모든 사람이 혈혼단의 진위 판단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말에 한제는 이 모든 것이 혈조의 계락임을 명확하게 단정할 수 있었다.
“진짜 판별법은 극소수만 알고 있겠지. 어쩌면 혈조 부녀만 알고 있을 수도 있고…”
한제의 눈이 차게 번득였다.
“진짜 단약은 수련자를 부활시킬 수 있겠지만 가짜 단약은 반대로 죽게 만들겠지. 요석설, 이렇게 악독하게 나오겠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한제는 납환을 움켜쥐어 부수려 했으며 곧 마음을 바꿔 그것을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그가 결단기 수준에 불과했을 때, 팔급마군은 한제의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며 포부가 하늘을 덮을 듯 넓고 일을 하는 데 결단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냉혹하고 무정하다고 평한 바 있었다. 담도 크고 생각이 깊은데다가 의지가 굳으며 여우처럼 교활하다 평하기도 했다.
그의 평가는 정확했다.
몇 가지 단서만으로 혈조 부녀의 계략을 간파해낸 것은 1만 년 이상 수련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볼 정도의 수련자나 보일 법한 능력이었다.
하늘은 공평한 법이었다. 하늘은 한제에게 뛰어난 자질을 주지는 않았지만 한제는 오랜 세월 동안의 수련을 통해 혜안을 얻을 수 있었다.
한제가 손을 뻗자 요석설이 남기고 간 저물대가 날아들었다. 신식을 통해 훑어본 저물대 안의 선옥은 요석설의 말대로 영변기 후기에 이르기기 충분했다.
“사흘⋯⋯.”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왼손으로 땅을 눌렀다. 그러자 그는 번득이는 검은 빛과 함께 땅속으로 스며들어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땅 속 깊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제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의 사방에는 요석설의 저물대에서 꺼낸 선옥이 놓여 있었다. 한제는 그 선옥들을 빠르게 흡수해나갔다.
체내에 흡수된 선력을 융합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요력의 결정처럼 구조화해 우선은 선력을 쌓아 나갔다. 연혼 부족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요력의 결정을 자세히 연구한 끝에 그 구조를 손바닥처럼 훤히 알게 됐으며, 요력을 결정화할 수 있다면 선력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한제는 대량의 선력을 일정 정도 체내에 축적한 뒤 그것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응결이 완료되었을 때 그의 체내에는 요력의 결정과 똑같지만 선력을 발산하는 결정, 즉 선정(仙晶)이 생겨났다. 이 선정은 요석설의 저물대에 들어 있는 선옥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양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선정(仙晶)
달이 보라색 빛을 뿜어내 사방이 요사스러운 기운으로 가득한 밤, 군영으로부터 1천 리 떨어진 고산 위에 요석설이 서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됐는데. 설마 또 마음을 바꾼 것인가?”
요석설은 다소 초조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때, 멀리서부터 붉은 빛이 쏜살같이 달려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석설과 똑같은 하얀 옷을 입은 한제의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왔군.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진을 활성화하겠어.”
요석설은 말을 마친 뒤 저물대를 두드렸다. 그러자 피처럼 붉은 조각상 몇 개가 튀어나왔다. 약 3촌 정도 길이의 크지 않은 조각상은 모두 한제가 본 적 없는 흉악한 마수의 흉상이었고 짙은 피 비린내가 풍겨왔다.
요석설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혀끝을 깨물어 허공에 문양 하나를 그렸다. 그녀가 살짝 내려치자 문양은 곧장 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1천 척 길이로 거대해져 고산의 지면에 찍혔다. 그와 동시에 조각상들이 이동해 문양 주위의 일곱 개 지점에 서더니 붉은 빛을 번득이며 땅으로 녹아들었다.
그 순간, 고산에서 돌연 기이한 힘이 끓어올랐다. 문양은 그저 끌어들이는 역할을 할 뿐이고 이런 일련의 변화를 실제로 일으키는 힘은 일곱 개의 조각상으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형태 없는 힘으로 1천 척 밖이었다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 같았다.
신식을 펼쳐 주위를 살핀 한제는 처음 겪어보는 일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식을 통제할 수 없었던 적은 있으나, 이번에는 그와 달리 통제가 가능함에도 아무리 살펴도 고산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주위의 풍경만 보이고 자신은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용없어. 이 진은 요수(妖帥) 정도 되지 않는 이상 살필 수 없거든.”
요석설이 냉랭하게 말했다.
한제는 시선을 거두고 내심 감탄했다.
“이 진, 혈조가 만든 건가?”
“그래.”
요석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물대를 문질렀다. 그러자 붉은 나침반이 하나 나타났다. 그녀는 방향을 잡듯 그것을 땅에 놓더니 한제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요가 가장 강한 때 이 나침반에 붉은 빛이 나타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빛이니까 바짝 쫓아오는 편이 좋을 거야.”
한제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석설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오면 나머지 선옥과 혈부(血符) 영패를 주지. 혈혼단의 정확한 사용방법도 가르쳐주겠어. 그러니 너도 약속을 지켜야 할 거야.”
그러는사이 달이 더욱 짙은 보라색으로 밝게 빛났다. 월식이 일어나듯 보라색 빛은 순식간에 대지를 보라색으로 물들였다. 하늘도 땅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보라색이었다.
그와 동시에 붉은 나침반에서 진한 핏빛이 피어올랐다. 이 붉은 빛은 마치 예리한 검처럼 달이 내뿜은 보라색 빛을 뚫고 나왔다.
“가자!”
요석설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 붉은 빛 안으로 들어갔다. 한제는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모두 들어서자 그 붉은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침반 역시 사라진 상태였다.
대지를 뒤덮었던 보라색 빛도 점차 흩어지더니 결국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반년에 한 번 돌아오는 자요의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편, 한제는 붉은 빛 안으로 들어선 순간 이것이 개인 간의 전송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요석설이 말한 진이 있는 장소에 그녀가 미리 전송진을 설치해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요령의 땅 어디서든 개인 간 전송진만 만든다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한제는 발아래에서 붉은 흔적들이 마치 피처럼 빠르게 흐르며 하나의 진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진의 흔적이 아까 조각상들이 이룬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모두 혈조가 만든 모양이군. 이곳에 이런 전송진까지 배치해뒀다니, 대단한 자다. 허나 내게도 시간만 있다면 이런 전송진쯤이야…’
한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