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50
한제가 마치 새로운 세상처럼 변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제를 풀어냈으니 임시로 이 별채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네가 죽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이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저 멀리서 한 줄기 반짝이는 빛이 날아와 한제 앞에 멈추었다. 그것은 수정으로 만들어진 영패였다. 손가락 크기의 영패는 허공에 뜬 채 일곱 빛깔 광채를 번득였다.
“이것은 별채의 영패다. 이 영패를 가지고 있어야 별채에 들어올 수 있다.”
한제는 그 수정 영패를 받아들고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정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탁자고 의자고 할 것 없이 모두 금제로 보호되어 있어 어느 것 하나 쉬이 건드릴 수가 없었다. 다만 이 금제들은 정자 주위의 금제들보다는 훨씬 위력이 약했다.
한제의 시선은 오로지 탁자 위의 술주전자에 꽂혔다.
술주전자에도 물론 금제가 걸려 있었지만 한제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금제였다.
잠시 살피던 한제는 오른손을 술주전자 쪽으로 뻗었다.
손과 술주전자 사이의 거리가 3촌 정도가 되던 순간, 수면처럼 파문이 일었고 한제는 한 줄기 금제의 잔영을 그 파문에 쏘아 보냈다. 그러자 파문이 점점 커지더니 중앙에서 회오리가 나타나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더니 사방으로 확산되면서 구멍을 하나 만들어냈다.
‘지금이다!’
한제는 재빨리 그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안에 있던 술주전자를 꺼냈다.
그 순간, 구멍과 회오리, 파문은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는 흥분된 눈으로 술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맑은 향기가 훅 끼쳐 나왔다. 그 안에는 열 방울 정도의 술이 들어 있었다.
“꽤 무거운데 겨우 열 방울뿐이라니… 허나 선인의 술이지. 더구나 이토록 삼엄한 금제가 걸려 있던 것을 보면 결코 보통 술은 아닐 터!”
한제는 주전자를 응시하며 약간 갈등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한 방울만 따라서 마셨다.
그 순간, 한제의 온몸이 붉어졌다.
“헛!”
한제가 헛숨을 들이켜는 사이 체내의 선력이 곧장 용솟음치면서 눈 깜짝할 사이 전신을 맴돌았다. 동시에 약한 취기가 그 선력을 따라 한제의 체내 곳곳을 채웠다. 이어 체내의 선력이 맹렬히 증가하여 마치 홍수처럼 경맥에 들어찼고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솟아올랐다.
‘아… 정신을 차려야…’
취기는 어느덧 선력을 따라 점점 진해졌고 한제의 두 눈은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덧 몸이 옆으로 기울었고 이내 바닥에 쓰러진 그는 잠이 들었다.
★ ★ ★
한제가 잠이 든 지도 1년이 지났다. 수련자가 된 이래 거의 잠을 잔 적이 없었던 한제는 심지어 코까지 골아가며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허나 그러는 동안에도 체내의 선력은 미친 듯이 불어나고 있었다. 천운자가 곁에서 이 상황을 봤다고 해도 깜짝 놀랐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체내의 선력이 일정 정도에 이른 뒤 그의 단전에 있던 요력의 결정은 깨져나갔고 선력에 흡수되었다. 반경 1백 척은 한제의 체내에서 흘러나온 선기로 가득 찼고 지난 1년 동안 그 선기는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1년 만에 한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두 눈을 뜬 한제는 딸꾹질을 했다. 그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점차 정신을 차린 듯 눈빛이 맑아져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제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그러다가 손에 든 주전자를 발견한 그는 자신이 한 방울의 술을 마신 뒤로 체내의 선력이 증가하면서 잠들어버렸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내가⋯⋯ 대체 얼마나 잠든 거지?”
뒤통수를 긁적인 한제는 몸에 이상이 없는지 체내를 살피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선력은 영변기 후기 절정을 넘긴 상태야! 경지만 성공적으로 깨달으면 문정기 수준에 이를 수 있어!”
한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에 든 술주전자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는 듯 다시 술주전자를 꺼내 그것에 몇 개의 강력한 금제를 건 뒤 다시 저물대에 챙겼다.
“좋아, 남은 500년을 몽땅 쏟아 붓더라도 이곳을 제대로 돌아봐야겠어!”
흥분에 몸을 떨던 한제는 갑자기 어딘가에 생각이 미치자 두려운 듯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고 보니 문정기에 이르지 못한 것이 다행이야. 만약에 경지를 깨달았다면 잠든 상태에서 문정기의 생사의 갈림길에 놓일 뻔했어. 그랬다면 잠든 채로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한제는 살아남은 기분을 만끽하며 이제 조만간 경지를 깨달은 후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문정기에 이르러야겠다고 다짐했다.
“흠⋯⋯ 비밀스럽기로는 이곳이 최고겠지. 그나저나 세상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선옥이 아무리 많았다 해도 지금 정도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겠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를테고.”
한제는 남아 있는 금제의 봉인들을 살피다가 잠시 고민했다.
“내가 잠들어 있던 동안 금제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을지도 몰라.”
잠시 고민을 미뤄두기로 한 그는 정자 안을 거닐었다. 그러다가 대나무 숲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곳에 조각된 난간 같은 것이 보였다. 대부분은 대나무로 가려져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누각 같았다. 이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모양이 일반인들의 사당 같군. 나중에 가봐야겠어.”
생각을 정리한 한제는 정자를 좀 더 돌아보다가 수정 영패를 꺼내 들었다. 수정 영패에는 별채를 드나드는 데 필요한 주문과 짤막한 정보들이 들어 있었다.
한제가 수정 영패에 정신을 집중하자 이내 밝은 빛이 번득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별채 밖 돌문 앞에 밝은 빛이 생겨나더니 이내 한제가 나타났다. 돌문을 지키던 남자는 사라진 상태였고 돌문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허나 바닥 곳곳에 요석설이 흘린 핏자국으로 미루어 분명 돌문이 있었던 대(臺)가 맞았다.
한제는 곧장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질주했다.
열 한 개의 대(臺)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대(臺) 위의 석상들은 모두 요석설이 봉인한 상태 그대로였다.
한제는 어느덧 영변기 후기의 절정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단 보름 만에 첫 번째 대 위에 이를 수 있었다.
그 대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한제는 전보다 더욱 높아진 수준 덕분에 그 대 위에서 혈조(血祖)가 남겨놓은 전송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제는 품에서 네 개의 저물대를 꺼냈다. 이는 모두 요석설의 것으로 그의 수준이 영변기 후기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 저물대들을 열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한제가 오른손으로 저물대를 문지르자 붉은 빛이 각각의 저물대에서 번득이며 완강히 저항했다.
“흥! 어디까지 버티나 볼까?”
한제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선력을 응집시켰다. 그러자 각 저물대에서 번득이던 붉은 빛이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
한데 마지막 저물대로 손을 가져가던 한제는 우뚝 멈추었고 눈빛은 신중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마지막 저물대를 자세히 살폈다. 지금까지 이 저물대들을 제대로 살핀 적이 없었는데 수준까지 오른 지금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저물대에서 번득이는 붉은 빛에는 보라색 선이 섞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심지어 신식이 아닌 육안으로만 살폈다가는 아예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식을 지우려 했더니 심장 박동 같은 것이 느껴지는군. 어쩌면⋯⋯ 혈조의 낙인이 찍힌 것일지도⋯⋯?”
허나 상식적으로 본래 주인의 신식을 지우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저물대를 열 수는 없다. 하지만 혈조의 수준이라면 자신의 신식을 지우지 않은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이 열 수 있는 저물대를 가졌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요석설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저물대를 열려고 했다가는 그 저물대에 있는 신식에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한제는 천천히 신식을 거두었다. 그러자 저물대 위에서 번득이던 붉은 빛도 곧장 사라졌다.
한제는 혈조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혈혼단에 관련된 몇 가지 일과 이번 저물대에 걸어둔 함정을 통해 마치 상대를 직접 본 것처럼 감탄과 짙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잠시 침묵하던 한제는 그 저물대를 조심스레 챙긴 뒤 나머지 세 개의 저물대로 시선을 돌렸다.
첫 번째 저물대는 선옥이 가득했다.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일전에 요석설에게서 받은 것의 열 배가 넘었다.
“문정기 수준부터는 한 단계 올라서는 데 필요한 선옥의 수가 상상을 초월하지. 여태까지 내가 쓴 것보다도 더 많이 필요할 거야. 그러니 이건 내게 큰 선물이 되겠군.”
한제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저물대로 시선을 옮겼다.
“이것은…”
한제의 눈이 흥분으로 번득였다.
두 번째 저물대에 있는 것은 1천 개 이상의 붉은 옥패였다. 일전에 요석설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그 위력에 무척 놀란 바 있었으니, 이토록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제는 붉은 옥패를 하나 꺼내 쥐었다. 그러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옥패를 꽉 움켜쥐어 깨뜨렸다. 그러자 한 줄기 붉은 빛이 튀어나와 눈앞을 가득 채웠다.
신식으로 그것을 훑던 한제는 점차 사라져가는 붉은 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봉인 주문은 알지 못하니 방어용으로만 쓸 수 있겠군. 허나 요석설이 내 손에 있으니 그 주문도 언젠가 알아내겠다.”
세 번째 저물대에 든 것은 다양했다. 심지어 여인의 옷과 향료, 머리핀과 인형 따위도 있었다. 한제는 그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으나, 그 안에서 열 개의 불량 혈혼단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불량 혈혼단에 새겨진 문양은 어두웠고 번득이지도 않았다. 반면 저물대 안의 반대쪽에는 하나의 혈혼단이 따로 있었는데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은 어둡지 않았고 경미하게 번득이기까지 했다. 아마도 진짜 혈혼단일 것이다.
그 외에도 저물대 안에는 나침반도 하나 있었다. 한제가 찾던 것이 바로 이 나침반이었다.
한제는 나침반과 진짜 혈혼단을 손에 쥐었다.
“요석설은 나한테 잡히고 저물대를 빼앗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그러니 저물대 안에 이렇게 빤히 보이도록 물건들을 배치해 놨지. 한데 붉은 옥패를 제외하면 법보는 하나도 없군. 분명 마지막 저물대에 들어 있겠지.”
한제는 혈혼단을 몇 번 살피다가 자신의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일전에 요석설로부터 받았던 가짜 혈혼단을 꺼내 요석설의 저물대 안에 넣었다.
이후 한제는 피처럼 붉은 나침반을 살폈다. 이 나침반을 손에 쥐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분명 이 나침반은 이곳으로 들어오는 전송진과 같은 효과를 냈지.”
한제는 신식으로 나침반을 훑어 그 안에 담긴 요석설의 신식을 확인하고는 한시름 놓았다.
만약 이 나침반에도 혈조의 신식이 찍혀 있었다면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대 위의 진을 고쳐야만 했을 터였다.
별채 안에도 이곳을 떠나는 전송진이 있음을 한제는 수정 영패를 통해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전송진은 별채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곳까지 이동하는 길에 금제가 가득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영변기 절정의 힘
나침반에 찍힌 요석설의 신식을 지우고 자신의 신식을 남긴 한제는 그 나침반 안에 작은 진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나침반의 바늘이 흔들리자 그 진은 조용히 변하기 시작해 계속 움직였다.
“역시 이 나침반 안에도 진이 있었군.”
한제는 사흘 동안의 시간을 들여 나침반의 진과 대(臺) 위의 전송진을 고쳤다. 덕분에 두 전송진은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이제 한제 외의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면 그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게 될 것이다.
“그랬다가는 들어온 사람이 공간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을 테니 약간 손을 봐야겠군.”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또다시 전송진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한제는 사흘에 걸쳐 전송진에 수많은 금제를 건 후에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