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59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한제는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한데 그때, 귓가에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미약했고 슬픈 듯하면서도 덤덤한 느낌이었다. 지금 이 순간 한제의 마음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소리였다.
한제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거문고 소리를 따라갔고 멀지 않은 곳의 어느 길가에 이르렀다. 옆으로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홍성을 둘러싼 천요성의 내수(內水) 중 하나였다.
강 위에는 놀잇배 몇 척이 떠 있었는데 거문고 소리는 그중 하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제는 묵묵히 서서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머지않아 거문고를 타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으나, 보이는 것은 뒷모습뿐이었다.
한데 그 뒷모습에는 거문고 소리처럼 옅은 슬픔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녀 앞 멀지 않은 곳에는 몇몇 젊은이가 앉아 서로 술을 권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이 거문고 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한데 그렇게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불현듯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그는 주작성 어느 조용한 산골짜기 안, 모완과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모완의 거문고 소리에도 항상 옅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당시의 한제는 그 슬픈 기색을 알아차리긴 했으나 이해하지는 못했다.
모완이 떠난 후로는 단 한 번도 그때와 같은 거문고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한데 오늘, 이 자리에서 그와 비슷한 거문고 소리를 들고 있노라니 슬픔이 차올랐다.
모완이 떠나기 전, 그녀에 대한 한제의 감정은 수백 년을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감동, 책임감이었지 남녀사이의 애정은 아니었다.
허나 모완이 떠난 뒤로 한제는 불쑥불쑥 모완을 떠올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슬픔과 고통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 감정이 다시금 깨어나는 중이었다.
거문고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모완…”
처음 만났던 그때,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던 모완의 표정이 떠올랐다.
모두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느끼고 싶었다.
거문고를 타던 모완이 천천히 다가와 그에게 안겼다.
“모완…”
한제는 다시 한 번 모완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움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산골짜기 안에서 함께 보내던 때에도 석양이 질 무렵 그들은 함께 앉아 묵묵히 지는 해를 바라보았고 새로운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뭐든지 가졌던 것을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는 법이었다.
모완이 떠난 후로 한제의 마음에서 오히려 그녀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졌고 또 갈수록 무거워졌다. 그리고 이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각인으로 남았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별이 떠올랐다. 거문소 소리는 점점 멀어져갔고 그럴수록 한제의 마음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이 차올랐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이 외로움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한제는 미간을 문질러 석주 안에 있는 모완의 원영을 느꼈다.
“모완,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약속할게.”
놀잇배는 먼 곳으로 흘러갔고 거문고를 타는 여인의 뒷모습도 사라져갔다.
그때, 거문고를 타던 여인은 뭔가를 느낀 듯 살짝 고개를 돌려 저 먼 강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으나, 그녀는 그 어둠 속에서 외로운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가는 손가락으로 현을 튕겼다. 슬픈 가락이 다시 울려 퍼졌다. 놀잇배 위에는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은 어둠뿐이었다. 대낮에도 깊은 밤에도…
그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손가락은 거문고를 튕겼다. 귓가에는 놀잇배에 탄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연주한 거문고 소리를 산산조각 내듯…
뱃머리에 앉은 그녀의 두 눈에는 빛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 송이 연꽃과 같았다. 진흙 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어난 연꽃. 다만 그녀가 피어 있음을 아는 사람도 신경 쓰는 사람도 없을 뿐이었다.
거문고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다 해도 그녀가 알 수 있을까?
한제의 뒤를 따르면 두 군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마주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한제는 한나절 내내 어슬렁거리다 강가에서 한참 머물러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별이 뜨고서야 천천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어두운 밤이었으나 홍성은 불야성처럼 곳곳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한제의 눈이 저 멀리 어둠에 잠긴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묵직한 압박감을 뿜어내는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죽음과 원한으로 가득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곳은 수도의 4대 감옥 중 하나인 홍뢰(洪牢)입니다.”
한제의 뒤를 따르던 군사가 눈치껏 설명했다.
“홍뢰라⋯⋯.”
“홍뢰에 갇혀 있는 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입니다. 경계가 삼엄하며 영패 없이는 출입이 불가한 곳이지요.”
군사의 설명을 들으며 한제는 홍뢰를 자세히 살폈다. 감옥에서는 몇 갈래 강력한 요기가 느껴졌다. 운려해의 요기보다 훨씬 강한 요기들이었다.
잠시 홍뢰를 바라보던 한제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택으로 돌아온 한제는 곧장 운려해의 처소로 향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운려해는 한제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두 눈을 번쩍 떴다.
“홍뢰에 가야겠는데 방법이 있겠습니까?”
운려해는 의아한 듯했으나 잠시 한제를 바라보다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뭔가를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쉽지는 않을 텐데…”
“상관없습니다.”
운려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가 있을 생각인가?”
“한 달입니다.”
“수련을 하려는 것인가?”
운려해의 조심스런 질문에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육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천요성 안에서 대량의 살육을 벌일 수는 없으니까요.”
의외의 말에 멍해진 운려해를 바라보며 한제는 재빨리 한 마디 덧붙였다.
“성공한다면 형님을 더욱 확실히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운려해는 그 말에 실실 웃으며 물었다.
“확실한가?”
한제는 말없이 오른손을 천천히 휘둘렀다. 손가락 위로 다섯 갈래의 살육의 기운이 맴돌다가 각각이 창룡으로 변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운려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하하! 재미난 술법이로군!”
운려해는 주먹을 휘둘렀다. 허공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다섯 마리 창룡이 무너져 내렸다. 허나 운려해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진 채였다. 그는 어느덧 세 걸음이나 밀려나 있었다.
한데 흩어졌던 회색 기운은 순식간에 융합하더니 다시 다섯 마리의 창룡이 되었다.
창룡이 내뿜는 짙은 살기를 느낀 저택 안의 요병들이 몰려왔다.
그때, 살육의 기운이 다시금 운려해에게 달려들었다. 운려해는 좀 전과 달리 진지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펑! 펑! 펑! 펑! 펑!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다섯 번 연달아 들려왔으나, 무너진 회색 기운은 순식간에 합쳐져 번개보다 빠르게 운려해의 가슴팍으로 돌진했다. 비록 운려해의 몸으로부터 7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어느덧 나타난 요력의 막에 저지당하여 튕겨 나갔으나, 요력의 막 역시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런 기운이 수천 개로 불어난다면 쉽게 막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한제의 질문에 운려해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살육의 기운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위력은 분명 전보다 훨씬 강력했다.
“좋아, 방법을 찾아주지. 허나 한 달은 너무 길어. 7일 정도라면 문제없을 걸세. 홍뢰에 갇혀 있는 자는 수만 명에 달하네. 그러니 7일이면 충분할 거야. 사흘 안에 연락을 주지.”
한제는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방에서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운려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연 우습게 볼 자가 아니군. 십삼을 내준 것이 전혀 아깝지 않군. 저 회색 기운이 고작 다섯 개인데도 내 요갑(妖鉀)을 뒤흔들었다. 더구나 그 회색 기운 안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나 내 체내의 생기를 끌어들였다. 저자 말대로 저 기운이 수천 개로 불어난다면⋯⋯ 상상만으로도 두렵군. 절대 적으로 삼아서는 안 될 자야.”
결심을 굳힌 그는 한제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곧장 방을 나섰다.
한편, 한제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허나 그의 귓가에서는 계속해서 거문고 소리가 맴돌았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오래도록 귓가를 맴돌며 흩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한제는 수련도 호흡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살육 선결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원에 앉아 묵묵히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 마음 속에 머무는 거문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그의 앞에는 좋은 술 한 동이가 놓여 있었다. 한제는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에 곁들여 술을 마셨다.
“열여섯에 수련을 시작해 여태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
한제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입가로 술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별빛을 올려다보는 두 눈에 고독이 어렸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수련자에게 허락된 삶이란 외로움뿐인 것을⋯⋯.”
그는 입가로 흘러내린 술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외로움은 도를 추구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허나 외로움을 진정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입에서 목을 넘어 배로 흘러들며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술과도 같은 알싸한 맛을⋯⋯.”
별과 달빛 아래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그는 수련자의 삶을 논하고 있었다.
“1만 년 이상 수련한 자들이 어떻게 그 오랜 외로움을 견뎠는지 알 수가 없군. 허나 메마른 마음으로 수련을 해봐야 얻는 것이라고는 자신만의 도일 뿐, 천도가 아니다. 세상은 무정한 법. 만약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수련자에게 감정이 없다면 그토록 무정해진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지 그게 어찌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겠는가?”
한제는 또 한 모금의 술을 들이켰다.
“자고로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사람은 세상의 총애를 받게 되나 세상의 총애를 받아봐야 미물만도 못한 힘을 가지게 될 뿐! 나의 도는 하늘에 순응하지 않는다. 하늘의 뜻을 거슬러 구하려고 하는 것은 영생이 아니다. 그저 미물만도 못한 힘을 가진 몸뚱이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 욕망이 나로 하여금 하늘의 뜻을 거스르게 한다.”
한제는 한 동이의 술을 다 마시고 빈 단지를 옆으로 내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단지는 퍽 하고 깨졌다. 한제는 오른손으로 미간을 문지른 뒤 옆으로 픽 쓰러졌다. 그의 눈에 드리웠던 외로움의 빛이 점점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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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가 떠올랐다. 동시에 한제의 감겼던 두 눈도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