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60
지난밤, 그는 간만에 취하고야 말았다. 술에 달빛에 거문고 소리에⋯⋯.
정신을 차린 한제는 지난밤의 일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이후 사흘 동안 한제는 수련을 하는 대신 매일 이른 아침 저택을 떠나 강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놀잇배가 지나갈 때마다 짧은 시간 들려오는 슬픈 거문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문고 소리는 그의 심신을 적시고 봉인되었던 기억을 지나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놀잇배의 여인은 지난 사흘 동안 누군가가 자신의 연주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놀잇배가 강가를 지나칠 때마다 슬픈 감정이 깊어진다는 사실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슬픔은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거문고 현으로 흘러들었다.
지난 사흘 동안 한제는 아주 평온한 시간을 보냈고 일체의 갈등과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탁삼이라는 위험도 운려해와의 약속도 문정기에 대한 기대도 잊은 채 그는 그저 거문고 소리에 빠져 술만 마셔댔다. 술잔을 기울이며 거문고 소리를 듣는 동안 한제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한제는 단 한 번도 여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상관없었다. 그저 그 뒷모습과 거문고 소리면 족했다.
만약 운려해가 홍뢰에 진입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한제는 언제까지 거문고 소리만 듣고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살육 선결 (1)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점점 멀어져가는 놀잇배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가 몸을 돌린 순간, 놀잇배 위의 여인이 고개를 돌려 강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처럼 어둠뿐이었지만 떠나는 남자의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명원아, 뭘 보고 있는 것이냐?”
거문고 소리가 끊기자 덤덤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여인은 다시 돌린 고개를 천천히 숙이고는 가볍게 현을 튕겼다. 그녀에게 거문고 소리는 하늘, 즉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네 거문고 소리는 너무 슬프구나. 내가 대신 연주하지!”
덤덤한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어려 있었다.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현을 뜯었다. 그 순간 가락이 바뀌었다. 빠르고 경쾌한 가락이 놀잇배와 강 위로 퍼져나갔다.
“아주 좋다. 앞으로도 이렇게 연주하도록 해라.”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경쾌한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쾌활한 가락이었지만 자세히 들어본다면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은 소리 없는 울음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 여인이 연주하는 가락은 억지로 짓는 웃음과 같았다. 그 가락에 따라 놀잇배에서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거문고 소리는 여전히 그 웃음과 어울리지 않았다.
여인, 명원은 이 거문고 소리의 슬픔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거문고 소리는 놀잇배를 따라 멀리, 저 멀리 울려 퍼졌다.
★ ★ ★
깊은 밤, 둥그런 달이 하늘에 걸리고 달빛이 대지에 쏟아졌다. 천요성이 부드러운 면사에 뒤덮인 듯한 광경이었다.
운려해의 저택에서 나온 두 인영은 휙 하고 연기가 되어 홍뢰 쪽으로 돌진했다. 빠른 속도로 홍성의 누각과 거리를 지난 두 인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홍뢰에 도착했다. 그들은 물론 운려해와 한제였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홍뢰의 거대한 검은색 철문이 살짝 열리더니 음산한 얼굴의 꼽추 사내 하나가 나왔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꼽추는 말없이 손을 휘두르곤 다시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꼽추 사내를 본 순간, 한제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그자의 수준은 운려해와 비슷한 정도였던 것이다.
운려해는 철문 틈을 비집고 들어갔고 한제가 뒤를 따랐다.
꼽추 사내는 한제를 힐끗 보더니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운 형이 말한 자인가?”
운려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네, 허 형. 잘 부탁하네.”
꼽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보게. 그자는 내가 데리고 들어갈 테니까.”
운려해는 한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동생, 조심하게. 꼭 성공하길 바라네.”
말을 마친 그는 발을 한 번 굴러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름이 무엇이냐?”
꼽추가 한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이한제입니다.”
한제는 덤덤하게 답했다.
꼽추는 더는 묻지 않고 몸을 돌려 홍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제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살기와 원한은 더욱 짙게 느껴졌으나, 회색 옷을 입은 꼽추는 이런 기운에 익숙한 듯했다.
곁눈질로 한제를 힐끔거리던 그는 한제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을 보고는 내심 이상하게 여겼다. 허나 운려해가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홍뢰에 들여보낸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홍뢰는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져 있었다.
꼽추는 곧장 한제를 이끌고 지하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음산한 계단을 따라 아래로 향했다.
벽에 걸린 횃불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음산한 느낌은 한층 짙어졌다.
처음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만해도 사방은 고요했는데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고함과 포효가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그 소리에도 짙은 살기와 원한이 배어 있었다.
꼽추는 일부러 발걸음을 늦춰가며 몰래 한제를 살폈다. 그는 이 홍뢰 안의 기운이 곧 실체화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수준이 비슷한 요장조차도 이곳 분위기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 자신처럼 수백 년을 이곳에서 생활하며 그 기운을 호흡하지 않는 이상 그러는 것이 당연했다.
한데 한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더구나 그가 보기에 한제는 실제로 사방의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았다.
계단은 한참 더 이어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음산하고 어두운 곳에 도착했다. 마치 거대한 새장과 같은 곳으로 1천 개가 넘는 독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포효와 분노에 찬 고함 소리, 그리고 수많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일반인이었다면 귀가 벌써 멍멍해졌을 것이다.
꼽추는 이 모든 것에 습관이 된 듯 음산하게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해!”
그 말에 주위는 조용해졌고 대신 묵직한 분위기가 천천히 응집되었다.
끄트머리에는 검은 방이 한 칸 있었는데 꼽추는 그 방 앞에 서서 다시 한제를 힐끔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한제, 이곳은 내가 담당하고 있는 감방이다. 마음껏 수련하도록 해. 다 죽여버려도 상관없다!”
“감사합니다.”
한제는 포권을 하며 답했다.
“감사는 운려해에게 해라. 그가 십붕권의의 공법을 3단계까지 알려준 대가로 너를 이곳에 들인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이내 몸을 돌려 검은 방으로 들어갔다.
“십붕권의의 공법을 3단계까지 알려주다니⋯⋯ 확실히 나를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것이군.”
한제는 중얼거리며 거대한 새장과 같은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정(井)자 형태로 감방이 나란히 배열된 감옥 안에 발을 들인 순간, 좀 전까지 느꼈던 압박감이 대폭 커졌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여러 감방 앞을 지나갔다. 방마다 시커먼 손들이 창살에서 튀어나와 한제를 잡아채려는 듯 휘적거렸다. 동시에 악의 가득한 웃음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어디에서 온 녀석이냐?”
“한 번 만져보자. 십 년 넘게 그렇게 부드러운 피부를 본적이 없어!”
“생긴 것을 보니 내가 죽였던 그 창녀와 똑같은데.”
“외부자군! 내가 가장 좋아한 먹잇감이 외부자였지!”
창살 너머 시뻘건 눈들이 음산한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는 온갖 욕망이 꿈틀거렸다.
한제는 냉랭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들도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미친 자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이곳에 오래 갇혀 있을수록 짙은 살기와 원한에 잠식되어 지능을 잃고 저런 상태로 동화된 것이 분명했다.
허나 개중에 몇몇은 창살 안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새로온 녀석! 이리 와봐라!”
한 감옥에서 온몸이 시커먼 사람이 두 팔을 창살 밖으로 쭉 내밀며 한제를 향해 손짓했다.
“카악! 퉷!”
한제가 돌아보는 순간, 그는 진득한 가래침을 뱉었다. 한제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가래침을 피했다. 그러자 온몸이 시커먼 그 사내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것은 확연한 비웃음이었다.
한제는 덤덤하게 그들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동시에 걸음도 우뚝 멈추었다.
가래침을 뱉은 사람은 한제가 웃는 것을 본 순간, 왠지 모르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눈에 가득했던 비웃음도 사라졌다.
한제는 그자에게 닿을 거리까지 손을 뻗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나와.”
상대는 흠칫 놀라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의 안색은 무척 어두웠다.
“나와.”
한제는 다시 한 번 덤덤하게 말했다.
온몸이 시커먼 남자는 스스로 뒷걸음질 친 것에 화가 났는지, 이를 악물고 손을 창살 밖으로 뻗어 한제의 오른손을 거머쥐려 했다.
그의 팔이 뻗어 나온 순간, 한제는 오른손의 두 손가락을 편 채 휘둘러 상대의 손바닥을 두드렸다. 순간, 한 줄기 살육의 기운이 한제의 손가락에서 피어올라 상대의 손을 뚫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