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64
한제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운려해는 그런 한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소리 죽여 말했다.
“동생, 오늘 밤 일찍 돌아오게. 만나러 갈 사람이 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던 한제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운려해 역시 기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거문고 소리를 들으러 가는 거겠지.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다녀오게.”
한제는 강가에 서서 놀잇배에서 흘러나오는 거문고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비밀이랄 것도 없었으니 운려해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운려해의 집을 나선 한제는 강가에 이르러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술병을 기울여 이따금 입을 축이는 그의 표정은 덤덤했고 마음도 안정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간 한제는 매일 이곳에 앉아 놀잇배에서 흘러나오는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이전과 달리 거문고의 가락은 유쾌했으나, 깊은 곳에 슬픔이 감춰져 있었다.
그는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인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는 그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소리를 열심히 들었을 뿐이다.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랫동안 느껴본 적 없던 평범함을 느낄 수 있었고 이는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었다.
이내 저 멀리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거문고를 타는 여인은 여전히 한제에게 등을 보인 채 뱃머리에서 현을 뜯었고 여인 앞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스물일곱 정도로 보이는 그 청년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고 외모는 평범했지만 말끔한 인상이었으며, 어떤 요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술을 마시며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제⋯⋯ 너의 진정한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구나.”
눈을 감고 거문고 연주를 듣던 청년이 술잔을 내려놓고 눈을 떠 앞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여인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슬픔 가득한 가락이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거문고 소리는 고요히 흐르는 물결 위로 울려 퍼졌다.
청년은 천천히 두 눈을 감고 거문고 소리에 담긴 슬픔과 상처를 음미했다.
한제 역시 두 눈을 감고 거문고 소리에 푹 빠져들었다.
한 사람은 배 위에 다른 한 사람은 강가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이 순간 모종의 끌림을 느꼈다.
한제는 돌연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처음으로 놀잇배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인의 등에 닿았다가 청년에게로 움직였다.
그 순간, 청년 역시 두 눈을 번쩍 뜨더니 한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한제는 술병을 들고 건배하듯 앞으로 살짝 치켜 올리더니 술을 벌컥 들이켰다. 놀잇배 위의 청년도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놀잇배는 천천히 멀어져가다가 이내 한제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거문고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놀잇배 위에서 거문고를 타던 여인은 그제야 고개를 살짝 돌려 멀리 떨어진 강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같은 어둠뿐이었다.
“저기에 누군가 있었지.”
놀잇배 위의 청년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명원은 말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슬픈 가락의 연주를 이어나갔다.
“흥미로운 자였어.”
청년이 빙그레 웃었다.
★ ★ ★
밤이 찾아오자 한제는 운려해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홍성을 가로질러 서문을 통해 현성(玄城)에 들어섰다.
현성은 규모 외에는 모든 것이 홍성과 달랐다. 밤이 찾아왔는데도 곳곳이 번쩍였고 길에는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저택 밖에 멈춰선 운려해는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문을 지키고 선 호위병에게 건넸다. 호위병은 그것을 받아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한제의 눈에 저택의 편액(扁額)이 들어왔다.
현부수부(玄副帥府)
“천요군의 팔대요수는 천요성의 외곽을 두른 여덟 개의 성과 같이 모두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우(宇), 주(宙), 홍(洪), 황(荒)의 이름이 붙어 있지. 그들의 관사에는 부(副) 자가 붙지 않아! 그저 각 성의 부수들만이 부 자가 붙은 관사에 살지. 이곳은 현성 부수의 관사다.”
운려해는 조용히 설명한 뒤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현성 부수는 요제 폐하와 사적으로 아주 친하지.”
요장 전투가 끝난 뒤 두 명의 부수가 선발될 예정이라는 것과 부수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운려해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바 있는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쪽찌를 들고 들어간 호위병이 돌아와 공손하게 말했다.
“운 장군님, 부수님께서 들라하십니다!”
운려해는 진지한 표정으로 호위병의 안내에 따라 관사 안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한제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부수님께서는 저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원에서 멈춘 호위병은 돌로 만든 곡선형 문을 가리키며 말한 뒤 공손하게 물러났다.
돌문 안으로 들어서자 각종 기이한 꽃들이 가득해 짙은 향기가 풍기는 꽃밭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보라색 옷을 입은 사내가 돌문 입구를 등지고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는 주위 풍경과 일체가 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사내의 수준은 문정기 초기 절정에 상당했으나, 문정기 중기 수준을 갖추려면 아직 시일이 좀 더 필요한 듯 보였다.
운려해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공손하게 말했다.
“운려해가 부수님을 뵙습니다!”
상대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 어떤 대답이나 반응도 없었다.
고요했다. 그리고 이 적막은 어느새 압박감으로 변해 사방을 뒤덮었다.
운려해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그 자리에 잠자코 서 있었다.
허나 천운자를 맞닥뜨렸을 때조차 굴하지 않았던 한제가 이런 압박감에 굴복할 리 없었다.
한제는 여유롭게, 운려해는 약간 버거워하며 천천히 압박감에서 벗어났다.
사내는 그제야 뒤를 돌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의 압박에서도 이렇게 버티다니, 훌륭하군! 운려해 자네, 부수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보는가?”
사내는 비록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이긴 했으나, 시원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운려해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4할 정도입니다!”
“음?”
보라색 옷을 입은 사내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몇 달 전부터 나를 찾아온 요장들 중 자신의 가능성을 가장 낮게 보는군.”
“저 혼자로는 그렇습니다. 허나 이자와 함께라면 9할 이상일 것입니다!”
운려해는 한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력을 다해 공격하다
보라색 옷의 사내는 한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마치 개미와 같은 미물을 보듯 덤덤한 눈빛이었다.
그가 이토록 오만할 수 있는 것은 부수이기 때문이고 요제와 사적으로 친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1백만 갑에 달하는 요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정기 초기 수준에 상당한 요력으로 그는 모든 요장들을 훨씬 능가했다. 운만 따라준다면 요수로 승진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그가 운려해의 수행원 정도로 보이는 한제를 눈여겨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사실 현수부는 운려해를 자격 미달인 자로 여겼다. 만약 요제가 운려해를 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현수부는 그를 만날 시간에 차라리 꽃구경이나 했을 것이다.
천요성 사람치고 현부수가 각종 기이한 꽃을 구경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그 꽃들을 매우 귀히 여기기도 해서, 아랫사람이 멋대로 꽃을 건드릴 경우에는 내쫓는 건 물론이고 꽃을 망가뜨릴 경우 머리를 깨부수기도 했다.
현부수는 슬슬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지만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네가 익힌 가장 강력한 신통력을 보여 봐라. 운려해가 그토록 높게 인정하는 자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보자!”
그는 여전히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한제를 경멸한다기보다는 그저 무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온 힘을 다해봐라. 내 마음을 움직여보란 말이다.”
현부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제 역시 현부수만큼이나 덤덤한 얼굴로 한 손을 들어 살육의 기운을 응집시켰다.
“원하신다면…”
그 짧은 말을 끝으로 한제는 손을 가볍게 떨쳐냈고 그 순간 셀 수 없이 많은 살육의 기운이 쏘아져 나가며 폭풍을 일으켰다. 포악한 살육의 기운이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콰르르!
2천 갈래나 되는 살육의 기운 하나하나가 성난 용처럼 포효하면서 현부수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를 미물 정도로 여기던 현부수의 표정이 순간 급변했다. 그는 곧장 뒤로 물러나며 전신의 요력을 순간적으로 폭발시켰고 그러자 그의 몸에서 요기로 이루어진 한 마리 호랑이가 나타났다. 허나 살육의 기운은 곧장 호랑이를 관통하여 현부수의 가슴팍에 꽂혔다.
‘헛!’
현부수는 당황했으나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은 채, 몸을 훌쩍 날려 또 한 번 뒤로 물러났다. 그토록 아끼던 꽃이 뭉개지는 것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는 이 엄청난 위력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면 이 정도 공격에 이토록 허둥대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완벽히 방심하고 있던 터라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현부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치욕과 분노를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7촌쯤 떨어진 곳에 한 줄기 파문이 일어나며 요력으로 이루어진 갑옷이 생겨났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