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69
운려해가 외쳤다.
바로 그때, 한제의 방을 가득 뒤덮고 있던 검은 안개가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빠르게 회전하며 회오리를 이루어 어딘가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눈 깜짝할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운려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그 순간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제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제의 모습을 본 순간 운려해는 표정이 급변해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몇 걸음 물러났다. 한제는 지금껏 봐왔던 자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한제였건만 이 순간 그에게서는 대가와 같은 기세가 풍겨나왔다.
“운 형, 다치셨군요.”
한제는 두 눈을 감고 온몸에서 발산하던 기운을 빠르게 회수했다. 다시 두 눈을 떴을 때, 그에게서는 마치 일반인처럼 어떤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한제의 기세도 급변했다. 좀 전까지 마치 천산과도 같은 압박감을 내뿜었다면 지금의 한제는 잔잔하지만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깊은 연못 같은 느낌이었다.
운려해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묵비와의 전투에서 졌소.”
운려해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가 폐관한 지 며칠이 지났습니까?”
“내일이 바로 요장 전투 날이오.”
운려해는 대답한 뒤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묵비는 매우 강하오. 내 십붕권의를 막아냈고 요해의 파도도 그의 전륜술(轉輪術)에 막혔소이다. 나는 결국 그 전륜술에 패하고 말았소.”
“전륜술이요?”
한제가 운려해를 바라보며 물었다.
“묵비는 요장들 중 최강으로 꼽히는 사람이오. 그의 신통력은 매우 신비롭지요. 요장이 된 그는 용담 고요전에서 3년간 수련하고 나왔는데 이후 어떤 전투에서도 전륜술 이외의 신통력을 발휘한 적이 없소. 그럴 필요가 없었단 말이지요. 전륜술은 모든 신통술을 튕겨내는 공법으로 그 위력은⋯⋯.”
운려해는 며칠 전 있었던 전투를 떠올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 형의 신통력은 십붕권의와 요해의 파도 외에도 더 있을 텐데요?”
운려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장이 된 후 요제님께 전수받은 요연(妖燃)이라는 술법이 있소. 허나 그것을 사용하고도 총 18단계인 전륜술 중 17단계까지 돌파한 뒤 결국 패하고 말았지요. 묵비와의 결투 전에 패자는 요장 전투에 나서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내일 내가 부수의 지위에 오를 수 있을지는 오로지 이 형에게 달렸소.”
운려해는 씁쓸한 마음으로 한제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제는 덤덤하게 말했으나, 운려해는 왠지 안심이 되는 것을 느끼며 포권을 했다.
“고생이 많으시군요. 다시는 이런 폐를 끼치지 않겠소. 내일 아침, 함께 제도로 향합시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포권을 취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은 퍽 쓸쓸해 보였다.
한제는 묵묵히 정원에 서서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다.
이른 아침, 첫 번째 햇살이 대지에 뿌려지며 천요성의 어둠을 몰아냈고 온 천요성에서는 결연한 전의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제도의 천요문(天妖門) 아래, 십만 척 길이의 광장에는 거대한 북이 하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까맣고 아주 오래된 듯한 느낌이 짙게 풍기는 북이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의 대열이 양옆에서부터 광장을 빙 둘러 섰다. 그 틈에서 마치 전쟁의 신 같은 한 사람이 백발을 휘날리며 번개처럼 튀어나와 거대한 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둥!
낮고 장엄한 북소리가 제도 안에서 온 천요성으로 울려 퍼졌다.
천요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도에 있는 천요고(天妖鼓)를 알고 있었다. 천요고는 제사를 지낼 때나 용담이 열릴 때 또는 매우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만 울리는 북이었다.
용담이 열릴 때에는 아홉 번, 제사를 할 때에는 여섯 번, 그 외의 행사가 있을 때에는 세 번 울린다.
대지를 흔들며 널리 퍼져 나간 천요고 소리에 수많은 천요성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잠에서 깼다.
요장들은 각자의 대체자를 이끌고 군도(軍道)를 따라 제도로 향했다.
제도와 각 성을 잇는 여덟 개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수많은 요병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속속 도착하는 요장들의 신분을 확인한 후에야 제도로 들여보냈다.
이번 요장 전투의 전장은 천요문 광장이었다. 이곳은 강력한 진으로 보호되어 있어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광장 동쪽에는 아홉 층의 계단형 관람석이 있었데 폭이 약 1천 척에 달하는 이곳에는 수많은 의자가 있어 천요성 문신들은 이곳에서 전투를 편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 꼭대기 층에는 하나의 의자만이 있었는데 바로 요제의 자리였다.
요장 전투 (2)
광장 남쪽과 북쪽에는 각각 여덟 층짜리 관람석이 되어 있다. 폭이 약 8백 척 정도 되는 이곳에는 부녀자들과 귀한 집안의 자제들이 자리했다. 또한 이 두 관람석의 두 층에는 각각 네 개씩, 총 열여덟 개의 의자만 있었다. 꼭대기 층의 여덟 자리는 요수들, 그 아래층 여덟 자리는 부수들의 자리였다.
지금, 이 드넓은 광장은 시끌벅적했다. 요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속속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이런 행사가 익숙한 듯 하품을 하거나 엎드려 있는 이들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 사방에 마련된 세 개의 관람석 중 요제와 부수, 정수(요수)의 자리를 제외한 모든 자리가 가득 찼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묵비가 1등일 거야. 분명해!”
“글쎄, 석소도 강하다고. 소문에 의하면 석소가 데려온 대체자의 실력도 엄청나다던데? 이번 요장 전투에서는 석소가 1등을 차지할 가능성이 커!”
“운려해도 우습게봐서는 안 되지! 게다가 당시 요제님이 그에게 전수해주신 신통력도 있잖아. 그자도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는 될 걸?”
“운려해는 며칠 전 묵비와의 결투에서 패해 이번 전투에 나오지 않기로 했다던데?”
“그랬단 말이야? 거참 아쉽게 됐네.”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예측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데 요장 우삼의 살육의 도가 벌써 절정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있어. 그는 요장들 중 유일하게 성에 부임하지 못하고 항상 화요군에서 살육 수련만 했잖아. 단단히 벼르고 있을 테니 이번에 피바람이 불 걸?”
“그렇지. 그리고 요장 마문도 있어. 그의 공법도 매우 특이해. 용담 고요전 안에서 전승을 받았잖아. 겸손한 성격이라 그 실력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 오늘에서야 확인할 수 있겠군!”
“3백 년 전 전투에서 4위를 차지했던 요선(妖仙) 사련도 빼놓으면 안 돼!”
“사련이라면 유일한 여자 요장 말이지? 하긴 3백 년 전에는 부상을 입은 채로 출전해서 4위를 했으니, 만약 부상만 없었다면 1등은 묵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이 열을 올려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좀 전에 북을 울린 후로 두 눈을 감은 채 꼿꼿이 서 있던 검은 갑옷의 백발노인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더니 다시 한 번 북을 때렸다.
둥!
두 번째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광장 곳곳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북소리가 우렁차게 퍼져나가는 동안 아침 햇살이 마지막 어둠까지 몰아냈고 태양이 높이 솟아올랐다.
북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때, 몇 갈래의 빛이 하늘 끄트머리에서 날아들더니 곧장 광장에 이르렀다. 이들은 천(天), 현(玄), 황(黃), 우(宇), 주(宙), 황(荒) 여섯 명의 부수들로 그들은 곧장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그중 현부수(玄副帥)는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은 뒤 주위의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두 눈을 감고 좌선했다.
이어 하늘에서는 북소리보다 더욱 요란한 벼락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여덟 명의 정수(요수)들이 허공에서 날아들었다. 그중 한 명은 여인이었다.
이 여덟 요수들은 허공에서 서로를 향해 포권을 취한 뒤 여유롭게 각자의 자리에 앉더니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사람은 공손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덟 요수들의 위엄은 천요군 안에서 요제에 버금갔던 것이다. 심지어 요령의 땅 전역을 통틀어도 이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둥!
세 번째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하게 울려 퍼진 북소리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그 순간, 사람들의 눈빛은 모두 한곳, 동쪽에 마련된 관람석의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단 하나의 의자로 쏠렸다. 그리고 그때, 금색 갑옷을 입은 사내가 광장 뒤편 궁전에서 걸어 나왔다.
사내는 광장을 한 번 훑어본 뒤 근엄하게 외쳤다.
“요장들은 앞으로!”
그러자 천요문이 열렸고 요장들이 수련자를 대동한 채 걸어 들어왔다.
관람객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옮겨 갔다.
현부수는 그중 한 사람을 보고는 두 눈을 분노로 번득이며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물론 한제였다.
운려해 곁에 선 한제는 현부수를 슬쩍 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한편 운려해는 아직 비어 있는 관람대 위의 자리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요제님이 아직도 나오지 않으셨다니⋯⋯.”
수백 명의 요장은 둘로 갈라져 양편에 섰다. 그들로부터 퍼져 나온 짙은 전의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요제 폐하의 명이다. 이번 요장 전투는 언제나처럼 도전을 규칙으로 한다!”
금색 갑옷의 사내가 다시 외쳤다.
“패자는 대체자를 출전시킬 권리를 갖는다. 승자 역시 대체자가 대신 전투를 행하게 할 수 있다. 요장과 대체자 모두를 꺾을 경우 승자가 된다! 단, 요장과 대체자 중 한 명에게만 승리를 거두고 다른 한 명에게 패한다면 양쪽 모두 다음 전투 참가 자격을 잃는다. 또한,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둔 자는 한 차례 동안 다른 사람에게 도전할 수 없다!”
사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또렷하게 모든 사람의 귓가에 전달되었다.
규칙을 듣던 한제의 눈빛이 굳어졌다.
요장과 대체자 중 한 명이라도 질 경우 양측 모두 자격을 잃는다는 조항은 잔인한 면이 있었다. 만약 한 사람이 먼저 패한다면 그 순간 자격을 잃는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또는 복수를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 상대를 꺾어야 한다. 그리고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요장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죽는 것은 대체자 즉 외부자일 수밖에 없겠군.’
그러는 사이 금색 갑옷의 사내가 마침 그 부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요장이 사망할 경우 그 요장을 죽인 자는 참형에 처한다!”
장끼리의 시합과 수련자끼리의 살육을 통해 지위를 얻는다. 요령의 땅에서 직위를 얻으려면 이 피비린내를 뚫고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제는 시선을 거둔 채 입을 다물었다.
“이제 참전인을 지명하겠다!”
금색 갑옷의 사내는 오른손을 들어 비쩍 마른 남자를 가리켰다.
“요장 모운, 앞으로!”
지목된 사람은 느릿느릿 걸어 나와 광장 중앙에 섰다. 갑옷을 입었음에도 비쩍 말랐음을 알 수 있었고 두 눈은 퀭했으며, 피부도 누렇게 뜬 자였다.
“모운! 저자는 30위 안에 들 만한 사람이지. 구사구생(九死九生)의 기운을 수련했다는 소문이 있어. 3백 년 전에 벌써 오사오생(五死五生)의 경지에 이르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