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74
한제는 운려해의 저택으로 향했다. 허나 이동하던 중 돌연 멈춰 섰다.
“뭐지?”
길게 이어진 길 위에서 여러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남자도 여자도 있었고 모두 영변기 이상의 수준이었다. 영변기 중기, 심지어 후기에 이른 이도 더러 있었다.
한제는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눈앞의 수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서는 조금의 살기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짙은 슬픔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깨달음
사람들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내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훤칠하게 생긴 그는 한제를 향해 포권을 했다.
“이 도우의 이름은 천운성에 있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습니다. 며칠 전 요장 전투에서도 도우의 실력에 감탄했지요.”
한제 또한 포권을 하며 답했다.
“과찬이오!”
하얀 옷의 사내는 가볍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옥검문(玉劍門)의 소문주(少門主)입니다. 이번에 요장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며칠 전 이 형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말았지요. 이 요령의 땅에서 저희 같은 수련자들의 목숨은 개미만도 못합니다. 요장은 죽이면 안 되고 요장을 죽이는 자는 참형에 처하니 결국 죽는 것은 우리 수련자들뿐이지요. 이 요장 전투는 요령의 땅에 사는 야만인들의 한낱 유흥거리에 불과합니다!”
한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이분은 요장 오적의 대체자입니다.”
사내는 곁에 있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도포를 입은 중년 남자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와 한제를 향해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이 도우와 오적과의 싸움은 제게도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이 요령의 땅에서 아무리 전공이 중하다 하나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지요.”
하얀 옷의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야만인들의 유흥거리가 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천요성을 떠날 생각입니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로 떠올랐다. 그의 뒤에 있던 여러 수련자들도 한제를 향해 포권을 하더니 분분히 빛을 그리며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졌다.
한제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멀어져가는 여러 도우들을 바라보았다. 허나 끝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련자는 하늘의 뜻을 거스른 이들로 대쪽 같은 성격일 수밖에 없다.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 경우 그에 반발하는 것이 보통이다. 허나 방금 이곳을 떠난 수련자들은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행위를 거스른 것이 아니라 피한 것이었다. 세상을 운명을 규칙을 피하지 않고 그에 맞서 싸워나가는 것이 진정한 거역이었다.
“수련자에게 스스로의 도가 없다면 수련을 할 수가 없는 법인데⋯⋯.”
한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걸었다.
“수련⋯⋯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 스스로의 도를 가져야만⋯⋯.”
얼마나 지났을까? 한제의 눈앞에 운려해의 저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속에서 등불이 밝혀진 운려해의 저택에서는 부드러운 빛이 퍼져 나왔다. 한제는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등불의 빛은 흐릿하고 작았지만 저택의 윤곽만큼은 또렷하게 드러났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등불이 흔들렸다. 등불 안에 들어 있던 촛불은 꺼질 듯 깜빡거렸다. 그러나 그 등불은 완강히 바람에 버텨냈다.
순간, 한제의 눈에 한 줄기 깨달음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충분치는 않았다. 뭔가 잡아챈 듯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한제의 몸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기척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둠에 잠긴 땅은 아침 해에 천천히 빛을 되찾았다. 한제의 눈에서도 어둠이 마치 밀물처럼 밀려나갔다.
순간, 한제의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 스쳤고 귓가에서는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밤의 어둠이 아침 해에 밀려나가는 것. 이 역시 거역 아닌가? 거역이 바로 내가 문정기에 이르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구나!”
한제의 머릿속에 모호한 느낌이 떠올랐다. 깊은 깨달음은 아니었지만 점차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한제는 기이한 눈빛으로 방향을 틀어 강변으로 향했고 마치 노승처럼 그곳에 앉았다. 놀잇배는 없었지만 그의 귓가에서는 계속해서 거문고 소리가 울리고 있는 듯했다.
“거문고 소리는 무정하나 연주자의 마음속에 슬픔이 들어 있으니 슬픈 소리가 된다. 이것은 거역이 아니다. 나의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한데 어째서 그 거문고 소리를 들을 때마다 거역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한낮이 되자 높이 떠오른 태양이 대지에 한가득 햇살을 쏟아 부었다. 저 멀리서 놀잇배가 둥둥 떠왔고 그 위에는 거문고와 여인, 며칠 전 보았던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의 눈빛이 한제에게 닿았고 그 순간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년은 뱃머리에 앉은 여인의 곁에서 일어나 한제를 향해 손에 든 술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한제 또한 술주전자를 가볍게 들어 보인 뒤 한 모금 들이켰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뱃머리를 가리켰다. 손에 든 술잔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한제는 살짝 웃었다. 청년의 외모는 평범했지만 탈속적인 느낌을 풍겼다.
한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몸을 훌쩍 날려 강 위를 걸어 뱃머리에 이르렀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자는 배에 한 사람이 더 오른 것을 알지 못한 채 슬픈 연주를 이어갔다.
청년은 웃음을 머금은 채 술잔을 비우고는 소매를 휘두르며 자리에 앉았다. 한제도 자리를 잡고 앉아 술주전자의 술을 들이켰다.
가까이에서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한제는 여인의 아름다운 손가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뱃머리에 앉은 세 사람은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년은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고 한제 역시 묵묵히 거문고 소리에 취해 있었다.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때 다른 말은 모두 잡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문고 연주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놀잇배는 강을 따라 흘러갔다. 한제는 청년처럼 배 위에 앉아 하인이 수시로 배 안에서 가져다주는 술을 마셨다.
하늘은 점차 어두워졌고 양쪽 강변에는 등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놀잇배에도 적지 않은 등불이 걸려 있어 밝고도 아름다웠다.
놀잇배가 다시 한 번 한제를 태웠던 강변에 가까워졌을 때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을 향해 포권을 취한 뒤 떠나려 했다. 한데 그때, 온종일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청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 거문고 소리를 듣고 드는 다른 생각은 없습니까?”
한제는 흠칫 멈추었다가 말했다.
“옛사람이 떠오릅니다.”
청년은 술잔을 비워버린 뒤 씁쓸하게 말했다.
“역시, 마음에 걸릴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거문고 소리에 이렇게 취할 수 없지요. 형장은 저와 같은 보통 사람인가 봅니다.”
그때, 거문고를 타는 여인의 몸이 살짝 떨렸고 거문고의 소리도 그에 따라 살짝 떨렸다.
“일이 없으시다면 함께 밤새 대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명원의 거문고 소리를 곁들여서 말입니다.”
청년의 말에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청년은 빙그레 웃더니 술잔을 가득 채우며 말했다.
“형장을 며칠 동안 봐왔습니다. 강변에 앉아 있기는 하나 마음은 먼 데 가있는 과객 같더군요.”
한제는 술을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보통 사람입니다. 사실 과객이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지요. 그리고 형장 또한 정신은 이 배에 있으나 몸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요.”
청년은 한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집에 많은 손님이 와 계셔서 번잡합니다. 정신이라도 이곳에 두어 즐기고자 함입니다.”
“집이 있는 분이었군요.”
한제가 조용히 말했다.
“형장은 집이 없습니까?”
청년이 반문했다.
“있지요. 먼 곳… 아주 먼 곳에⋯⋯.”
한제의 머릿속에 주작성의 산골짜기 마을이 떠올랐다.
“집에 다른 이가 있습니까?”
청년이 물었다.
“없습니다. 형장은요?”
한제는 술주전자를 들고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조카가 있습니다. 장난이 심한데다가 최근에는 이상한 사람에게 괴롭힘까지 당했다더군요.”
여기까지 말을 한 청년이 웃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한담을 나누다가 또 한참을 침묵했다. 조용히 뱃머리에 앉아 달빛을 쐬며 거문고 소리에 곁들여 술을 마셨다.
깊은 밤이 지나고 하늘 끄트머리가 희끄무레 밝아오더니 대지가 점점 밝아졌다.
명원은 일찍이 쉬러 떠난 후라 뱃머리에는 두 남자만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거문고 연주는 끊겼지만 귓가에서는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한제는 술주전자를 들고 청년을 향해 포권을 하더니 발을 굴러 그 자리에서 아침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 ★ ★
요장 전투의 첫 번째 단계는 끝이 났다. 수백 명의 요장들 중 승리자는 48명뿐으로 나머지는 전패하거나 1승 1패로 참전 자격을 잃었다.
그 수많은 전투에서 오적을 제외한 어떤 요장도 중상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수련자들 중에는 죽은 사람도 심하게 다친 사람도 많았다.
특히 대나검종의 몇몇 사람들은 요장과 싸울 때에는 별 힘도 쓰지 않았지만 수련자와 맞닥뜨릴 때에는 전력을 다했다. 마치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아침 햇살이 제도의 광장을 뒤덮었을 때, 세 개의 높은 관람대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남은 전투는 요장들 중 진정한 강자들만이 참가하는 전투이기 때문이다.
48명의 요장들이 천요문을 통해 틀어오자 짙은 전의가 풍겼다.
광장 중앙에 선 총관은 냉랭한 표정으로 참가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한제와 눈이 마주치자 차게 웃었다. 그는 외부 수련자가 요령의 땅에서 요장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것이 너무도 불쾌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요령의 땅에서 저 수련자들은 한 무리의 강도와 같은 존재다. 저들이 이곳에 온 것은 고요를 전승받기 위해서일 뿐이지. 그런 저들이 요장을 다치게 하다니, 참을 수 없다!’
총관은 한제를 향해 살기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한제는 냉랭한 눈으로 상대를 힐끗 바라보았다. 살육 선결을 익힌 그는 살기에 대해 상당히 민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