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79
검은 액체들이 한제 전신의 모공을 통해 배출되었다.
“세수(洗髓)!”
천수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감탄의 눈빛을 번득이며 중얼거렸다.
“아까의 그것이 겉핥기였다면 저것은 진정한 세수다!”
이제 한제를 바라보는 다른 요수들의 눈빛에서는 질투가 느껴졌다.
천요고가 왜 용담에 버금가는 보물인지 그들보다 잘 아는 이도 없었다.
용담은 고요의 령(靈)이 존재하는 곳이니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했다.
한편 천요고는 고요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고요의 힘이 깃들어 있었으며 심지어는 역대 요제들이 이 천요고를 울림으로써 전승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천요고를 울리면 그 안에 어려 있는 고요의 힘을 추출하여 천요군이 긴 세월 누리고 있는 영광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요의 힘으로 세수하는 것은 본래 천요군의 황족들 또는 혁혁한 공을 세운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요수들은 그 자리에 오르기 전에 천요고를 울릴 기회를 한 번씩 부여받았다. 허나 천요고를 울려 세수를 할 수 있느냐는 각자의 실력에 달린 것이었다.
세 번의 북소리는 강력한 충격이 되어 한제의 체내에서 미친 듯 질주했다. 그리고 이미 불순물이라고는 거의 없는 한제의 몸을 다시 한 번 씻어냈다.
“열네 번⋯⋯.”
총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귀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담긴 충격과 진동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것은 골수를 씻어내는 세수의 소리였다!
누군가가 세수를 할 때 그의 체내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수에 버금가는 파동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체내의 모든 불순물이 씻겨나간 순간, 그는 하늘에 흡수된 듯했고 이내 맑은 눈빛으로 천요고를 바라보았다.
“지난 7백 년 동안 수련을 해왔고 경지를 체내에 원만히 들였으나 문정기에는 이르지 못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내 경지는 체내에는 들어왔으나 도심이 가득 차지 못해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슬픔과 아픔, 봉인된 흉터 때문이었어.”
한제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스스로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모완이 죽었을 때 나의 경지는 승화되어 체내로 들어왔지만 그녀에 대한 집착이 남아서 강가에서의 거문고 소리를 들었을 때 슬픔을 느끼고 공명했던 거야. 허나 오늘, 이 북소리로 나는 짧은 시간 안에 1백 년의 흐름을 겪었다. 내가 느꼈던 모든 슬픔을 북소리에 녹여내 마음에 남은 슬픔도 사라졌고 도심이 충만해져서 문정기에 이르렀다.”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다시 가볍게 내리쳤다. 그 순간, 한제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모완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용솟음쳐 손바닥을 타고 천요고로 향했다.
“허나 이렇게 하는 것은 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정말 잊을 것인가⋯⋯?”
한제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망각. 이는 기억 속에서 완전히 말소한다는 의미로 마음속에서 상대를 삭제한다는 의미였다. 그리되면 언젠가 석주 안의 모완이 깨어나더라도 한제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녀를 주작성으로 보낼 것이다. 원래 있어야 하는 곳으로…
그때, 맑은 바람이 불어와 한제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천수는 몇 걸음 걸어 나와 관람대 끄트머리에 서서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제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 듯 중얼거렸다.
“억누를 수 있을까? 당시의 나는 억누르기를 택했는데 저자는 과연⋯⋯? 문정에 이르지 못한 자가 어찌 문정의 의미를 알겠는가? 문정은 고독.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경지를 돌파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런 갈등을 겪어본 적이 없는 그들의 수준은 크게 발전하지 못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에 뭔가를 품고 있지. 그런 자들에게 경지를 돌파시키는 것은 일종의 시험이자 고난이기도 하다.”
한편, 유일한 여자 요장인 사련은 비웃음이 어린 눈으로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부 수련자의 제자인 그녀는 수련자가 문정기에 이르려할 때 겪는 경지의 시험에 대해 다른 원주민들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일체의 집착과 감정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때,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석소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개수작을 부리고 있군!”
그의 곁에 선 진도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돕기로 한 요장에 대해 처음으로 혐오감을 느끼며, 진도가 덤덤하게 말했다.
“자네는 지금 사제의 갈등을 모르고 있군. 보통 사람처럼 신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야.”
그 무렵, 묵비는 더욱 서늘해진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당시의 그자처럼 부럽게 만드는군. 재미있어.”
그의 뒤에 선 대나검종 수련자는 유일하게 묵비의 그 말을 들었으나,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부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수련자가 아니었지만 부수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자인만큼 문정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지금 한제의 모습에서 한 줄기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같은 시각, 저 멀리 강에서는 놀잇배가 수면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한제와 함께 대작을 했던 청년이 뱃머리에 앉아 들고 있던 술잔을 비운 뒤 조용히 읊조렸다.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의 앞에 앉은 여인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거문고를 연주하지는 않고 그저 매만지기만 하고 있었다.
한편, 한제의 손은 여전히 북에서 1촌 정도 떨어진 채 멈춰 있었다.
“도심은 가득 채워졌다. 마음속 슬픔만 지워버리면 돼. 허나 그리하는 것이⋯⋯ 정말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인가?”
모완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고 그녀와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스쳐갔다.
“마음속 슬픔을 지워버리고 모완의 모습을 잊어야만 문정기에 이를 수 있다면 나는 무슨 도를 수련하는 것인가? 그것이 정말 나의 도인가? 여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완의 기억을 이리 버려 버린다면 그녀는 그저 나의 제물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한제의 눈빛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난 지금껏 스스로에게 물어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 천도는 본래 무정한 것이니 나 또한 무정해진다면 그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순응하는 꼴 아닌가! 감정을 포기한다면 요장 전투 중 도망친 수련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도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이한제의 도가 아니다!”
한제의 눈빛과 목소리에 점차 어떤 확신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한제의 도는 거역이다. 하늘의 뜻에 거역하는 것, 그것이 나의 길이다! 상고 시대 수련자들은 하늘을 가리고 수련했다 한다. 나는 이제야 하늘을 가린다는 말의 뜻을 알았다. 그것은 하늘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피하는 것이었어. 하늘에 순응하지 않더라도 최후의 길은 하나의 끝을 향해 나 있는 것이니까!”
그의 눈빛은 이제 더없이 굳건해져 있었다.
“난 마음속 슬픔을 지워버릴 수 있지만 마음속 집착은 천도라 하더라도 빼앗아 갈 수 없다!”
한제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몸에서는 순간 놀랄 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로 강해 보이지 않는 기운이었지만 천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기운은 예리한 검처럼 한제의 몸에서 튀어나와 하늘로 솟아올랐다. 순간, 구름이 그 기운을 피해 물러나면서 그 너머의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저것은⋯⋯?”
천수는 자제력이 엄청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한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당시의 요제와 비슷한 선택을 한 것인가!”
천수는 한제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편, 총관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욱 창백해진 상태였다. 한제가 고민하는 모습에 내심 안도했으나, 곧 한제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몸이 떨려왔다.
그의 눈빛에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지금 저자를 죽인다면 요제님께 질책을 받긴 하겠지만 과한 벌을 받지는 않을 터. 어찌되었든 저자는 일개 수련자인 반면 나는 요령의 땅에 사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 천요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사람 아닌가?’
한제의 기세는 조금 전의 폭발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진정한 수련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마음속 집착을 남겨둔 채 슬픔만 없앤다고 문정기에 이르는 것은 아닐 터. 문정기의 경계는 하늘이 아니라 수련자 자신이 정하는 것이니 나를 방해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나의 마음일 뿐! 마음과 타협한다면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마음이 굳건하다면 하늘이 어찌 나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거리낄 것은 없었다. 모완으로 인한 슬픔을 모두 자신의 오른손에 녹여낸 그 순간, 하늘의 색이 변하면서 수많은 벼락들이 내리쳤다. 벼락들은 은빛 뱀처럼 하늘에서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한제에게로 집중됐다. 심지어 놀잇배 위의 청년도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도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한편, 천요성으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곳, 후포가 음혼들을 흡수하던 오래된 전장 위의 시커먼 탑 최상층에서는 새카만 갑옷의 투구에서 돌연 어스름한 빛이 번득였다. 그 빛이 나타난 순간, 탑의 상공에서는 놀랄 만한 파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빛의 목소리가 탑 안에 울렸다.
“거역의 뜻을 담은 수련이라⋯⋯ 훌륭하군.”
그때, 한제는 모든 슬픔을 응집시킨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총관이 강렬한 살기를 뿜어내면서 돌연 몸을 훌쩍 날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총관은 크게 외치며 한제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의 오른손은 마치 태양을 움켜쥔 것처럼 눈부시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한제에게 가까워지면서 대지가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반경 1천 척은 작열하는 지옥으로 변했다.
천수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면서 튀어나왔다.
“금오욱!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때, 한제가 총관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사실 그는 상대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완전히 회복된 생의 낙인과 열다섯 번째 북소리의 위력까지 더해진다면 그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총관은 한제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고 왼손은 천수를 향해 휘둘렀다. 상대가 천수라 해도 한제를 죽이려는 자신을 방해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쾅!
결인을 그린 천수의 오른손이 검은 빛을 뿌리며 총관의 주먹과 충돌했다.
이때, 놀잇배에 앉아 있던 청년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지더니 분노가 떠올랐다.
“겁도 없구나, 금오욱!”
그 순간, 총관은 흠칫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에 어린 살기도 삽시간에 사라졌고 반경 1천 척을 불태우던 화염도 꺼져버렸다. 그는 귓가에 우르릉 울리는 목소리에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목소리는⋯⋯?”
그와 동시에 천요성에서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전장의 높은 탑 안, 투구에서 번득이던 어스름한 빛이 순간 폭발적으로 번쩍이며 서늘한 코웃음을 쳤다.
그 순간, 총관은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뒤덮는 것을 느꼈고 코웃음 소리도 허공을 가르며 그의 귓가에 들어왔다.
총관은 몸을 바르르 떨었고 그의 금색 갑옷은 곧장 재가 되어 사라졌으며,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태양과 같은 빛도 어두워졌다. 이어 그는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이 모든 것은 천수와 총관의 손이 충돌했을 때 발생한 일이었다. 천수는 상대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의 기이한 중상을 입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거역
천수는 총관을 저지하려 했을 뿐, 죽일 의도는 없었기 때문에 곧장 신통력을 거두어들이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총관은 몸을 휘청거리다 또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그의 체내에서는 요력이 전부 흩어졌고 경맥에도 금이 간 상태였다. 지금의 그는 한 마리 맹렬한 호랑이에서 도마뱀으로 변한 듯했다.
‘그 코웃음 소리는⋯⋯ 누가 낸 거지? 요제 폐하의 힘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해! 게다가 나를 죽일 생각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총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고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천수의 일격에 총관이 내상을 입은 것으로 보였으나, 가까이서 지켜본 한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