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83
문정의 결정
고요의 허상 역시 한제와 동시에 땅에 내려섰는데 그 순간 흩어질 듯한 기미를 보였다. 허나 두 번째 거역자로서 일생동안 수많은 천벌에 대항해온 존재답게 고요의 허상은 다시금 또렷해졌다.
그때, 붉은 구름이 흩어진 곳에서 두께가 1백 척에 달하는 한 줄기 붉은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의 위력은 붉은 번개와 천벌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그 붉은 빛은 나타나자마자 한제가 아니라 고요의 허상을 향해 내리쳤다.
고요와 한제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고요의 두 눈에서는 한 줄기 요사스러운 빛이 폭발하듯 발산되었다.
“적소운망! 저 녀석의 맛을 본 지도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순간, 고요의 허상은 훌쩍 뛰어올라 한입에 그 붉은 빛을 삼켜버렸다. 그러자 고요의 전신이 무너져 내렸다가 곧장 다시 조합되었다.
이렇게 붕괴됐다가 조합되는 과정이 짧은 순간에 1만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 무렵, 붉은 구름이 흩어진 하늘은 원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고요는 트림을 꺽 하더니 다소 피곤한 듯한 눈빛으로 한제를 내려다보며 한 줄기 푸른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3개월 뒤, 용담에서 보자⋯⋯.”
고요의 목소리가 드넓은 공간에 가득 울려 퍼졌다.
고요가 사라진 후, 한제 역시 몸을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맑은 바람이 불어왔다. 다섯 노인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천벌 같으니! 운돈, 썩 나와라!”
한 노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운돈 이 자식아, 얼른 나오지 못해!”
“셋 셀 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경을 칠 것이다!”
노인들은 한 명씩 목이 찢어질 듯 호령했다.
그러자 한 줄기 잔영이 저 멀리 떨어진 폐허가 된 땅속에서 얼른 기어 나와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손자 운돈, 다섯 선조 할아버님들을 뵙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한 자는 놀잇배에서 한제와 밤새 대작을 했던 그 청년이었다.
“이 망할 녀석, 천요성을 이렇게 사라지게 해버리다니… 세 달을 줄 테니 이곳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놔라! 그러지 않으면 네놈을 용담에 집어넣어 1백 년간 가둬둘 것이야!”
“2백 년!”
“5백 년!”
“1천 년!”
“평생!”
마지막 노인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청년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3개월 안에 천요성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놓겠습니다.”
“선조 어르신께서 결정한 그자를 찾아서 3개월 후에 용담으로 데리고 가는 것도 잊지 마라!”
다섯 노인은 말을 마친 뒤 폐허가 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사라졌다.
★ ★ ★
한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제도 광장으로부터 1만 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곧장 신식으로 사방을 둘러본 뒤 한시름을 놓고는 저물대에서 영패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일전에 금색 문양을 가진 석상들을 지나 찾아갔던 별채의 통행증으로 이것만 있다면 어디서라도 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영패에 기록된 주문을 외우며 결인을 그리자 영패에서 밝은 빛이 번득이더니 한제를 감쌌고 이내 사라졌다.
다시 평평한 대 위에 나타나게 된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빠른 속도로 관문을 지나 돌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 한제의 경지는 완벽하게 가득 찬 상태였다. 선력과 그것을 융합하면서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문정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까딱 잘못하면 평생 쌓아온 수준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원신마저 무너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분리시켜둔 본체도 영향을 받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감히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돌문의 별채는 문정에 이르기에 가장 좋은 공간이었다.
한제는 최대한으로 속도를 높여 평평한 대들을 지난 끝에 마침내 별채에 이르렀고 곧장 그 안으로 향했다.
술주전자가 놓인 정자까지 곧장 달려간 한제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저물대를 두드렸다.
천벌에 맞서 싸우면서 크게 소모한 탓에 남은 선옥은 많지 않았다. 어쨌든 일단 모든 선옥을 꺼내자 대량의 선기가 풍겼다.
이어서 한제는 저물대에서 또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손톱 크기의 붉은 옥이었다. 이 옥이 나타나자 사방의 선기가 우뚝 멈추었다. 마치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붉은 옥 안에서는 천도의 위엄이 발산되었다.
“문정의 결정! 당시 주일 선배가 주었던 것이지. 오늘 내가 문정에 이르는 데 실패하더라도 선배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그 결정을 한입에 집어 삼켰고 이어 두 눈을 감고 경지와 선력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문정에 침잠되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위의 선옥은 끊임없이 소모되어 가루로 변해 갔고 엄청난 양의 선력이 한제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문정기에 이른 사람 체내의 원신에는 문정의 결정이 하나 생기는데 이 결정은 말하자면 원신의 심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주일에게서 받은 문정의 결정은 한제의 두 번째 심장이 된 셈이었다.
★ ★ ★
원고 시대의 전장. 그 중앙의 검은 탑 최고층에 있는 시커먼 갑옷의 투구 안에서 어스름한 빛이 번득였다.
“고요까지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렇게 끌어들이기에는 조금 아깝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문정의 힘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경지와 선력의 융합은 일종의 연소였다. 선력을 연료로 삼아 경지를 태우면 문정의 결정 한 알이 생겨난다.
문정의 결정이 만들어진 순간, 한제는 세상을 마음대로 주유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문정의 깨달음이었다.
수련성에서 수련자가 문정기에 이르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문정의 깨달음으로 명혼(命魂)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성공할 확률은 5할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반드시 시도해야 할 일이긴 했다. 허나 한제는 이미 명혼을 회수한 상태였으니 상관은 없었다.
한제는 사방에 널린 선옥의 선력을 거의 다 흡수했다. 대량의 선기가 모공을 통해 체내로 들어와 빠른 속도로 경맥을 채웠다. 그리고 일제히 원신에 있는 생사윤회의 경지에 모여들었다.
끊임없이 제련이 이어지면서 한제의 체내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원신은 거대한 고치 같았고 경지는 그 안의 영혼 같았으며, 선기는 고치 바깥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 같았다.
불의 기세가 거세질수록 영의 기운은 강해져 고치 안의 경지는 그것과 더욱 밀접하게 결합했다.
선력과 경지가 융합하는 이유는 결국 원신과 일체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신과 경지의 구분이 불가하게 되면 원신은 곧 경지가 되고 경지가 곧 원신이 되는 것이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는 문정기가 되고자 하는 모든 수련자가 알고 있는 말로 이 형태 없는 불과도 관련이 있는 말이었다. 만약 이 관문을 뛰어넘지 못하다면 이 불은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원신과 육신을 모두 불태워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린다.
화염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원신의 고치는 더욱 기민해졌으며 그 안에 자리한 생사윤회의 족자는 더 이상 원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천천히 녹아내리며 원신의 고치와 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지만 원신의 고치를 태우는 불은 약해지기는커녕 끊임없이 흘러드는 선력에 따라 점점 더 이글이글 타올랐다.
고치 안의 경지는 이제 모두 녹아 원고 시대에 원기(元氣)라 부르던 기운을 형성했다.
원고 시대에는 수련자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 당시의 수련자는 스스로를 연기사(練氣士)라고 불렀다. 여기서 ‘기’가 바로 원기를 뜻했다. 그들이 수련한 것이 바로 그 원기였던 것이다.
원기는 마치 엄마 뱃속의 아이처럼 한제의 원신 고치 안에 있는 경지가 제련됨에 따라 생성되었다. 체내의 형태 없는 불은 더욱 격렬해졌고 원기가 점차 서로 응집해 하나의 물방울이 되더니 반짝거리며 각종 형태로 변해갔다. 다만 이 물방울을 끝끝내 결정화되지 못해 문정의 결정을 형성할 수 없었다.
여러 번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자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주위의 선옥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고 그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선력들이 한제의 코를 통해 체내로 흘러들었다.
마지막 선옥의 선기가 체내로 들어갔을 때, 무형의 불이 몇 배나 더 강력해졌다. 이어서 한제의 몸에서는 엄청난 양의 땀이 흘렀다. 이제 막 액체 형태가 된 문정이 뜨거운 물에 끓어오르며 만들어진 땀이었다.
한제의 정수리에서는 점점 짙은 하얀색 김이 피어올랐다. 체내의 불은 갈수록 격렬하게 타오르면서 원신의 고치를 태웠다. 그러자 그 안에 들어 있는 원기의 액체는 불에 끓어오르다 결국 결정화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정이 돌연 진동했다. 이 진동에 원신의 고치도 이끌려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바깥을 두르고 있던 불은 금방 사라질 듯하더니 더는 타오르지 않고 바깥으로 확산되었다.
한제의 몸에서 타오르던 무형의 불이 점차 실체화되어갔다. 이는 문정에 실패할 조짐이었다.
바로 그때, 주일에게서 받은 문정의 결정이 한제의 단전에서 떠올라 타오르는 불 속에 녹아들었다. 선기의 불은 그 문정의 결정을 따라 움직이며 약간 어두워져 사라질 듯했다. 이어서 이 문정의 결정은 한제의 원신 고치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제가 만들어낸 문정의 결정 곁에 이르렀다.
두 문정의 결정은 각각 생사윤회의 경지와 죽음을 불사한 미친 사랑의 경지를 담고 있었다.
주일의 문정의 결정은 한제의 문정의 결정을 한 바퀴 맴돌더니 돌연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원기가 다른 문정의 결정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손톱만 했던 문정의 결정이 빠른 속도로 커지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손가락 크기로 변했다.
이때 원신의 고치는 더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 밖을 두른 선기의 불은 약해졌다.
원활한 과정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 방금 한제는 생사의 경계를 밟은 것과 같았다.
문정의 결정이 불어난 순간, 원신 고치가 수축해 그 결정 안에 녹아들었다. 그러자 원신의 고치에서 풍겼던 새 생명의 기운도 천천히 무르익어갔다.
이 과정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영원히 그렇게 있을 것처럼…
천요성은 벌써 10년 전에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제도가 그 중앙에 우뚝 솟아 있었고 천요문 아래의 광장도 여전했다. 그 광장에 세워진 거대한 천요고 역시 변하지 않았다.
허나 천요성 주민들은 10년 전의 그 엄청난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이한제라는 이름의 수련자와 관련된 소문도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놀잇배 위에서 한제와 대작했던 청년, 운돈은 제도의 어느 누각 위에 올라 먼 하늘 끄트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는 매우 아름답지만 무척 말괄량이 같은 외모의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운돈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상하구나. 10년 동안 그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어. 다섯 선조분들의 신식으로도 발견하지 못했지. 이 땅에서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