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89
찌익!
한제가 움켜쥔 오른손을 당기자 뭔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고치 형태의 허상이 그에게로 끌려왔다. 한제는 그 고치를 뒤로 휙 내던지고는 다시금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펑!
폭발음과 함께 뒤쪽으로 내던져진 고치의 허상이 터져나갔다. 대량의 고름이 터져 나왔고 동시에 허공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치가 던져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풍음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녀의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굽은 칼이 맹렬하게 그녀를 공격했다.
풍음은 비수를 휘둘러 굽은 칼의 공격에 맞섰다. 그러다가 그녀가 크게 칼을 휘두르자 굽은 칼이 뒤로 밀려났고 풍음 역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굽은 칼과 교전을 벌이다가 이쪽까지 떠밀려온 풍음은 한제가 내던진 고치와 충돌했으나, 그녀는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고치가 터지자 비쩍 마른 노인은 선혈을 한 움큼 토해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제와 선검을 번갈아 보았다.
이때, 한제가 엄지를 펼쳤다. 그러자 적멸지의 검은 빛이 다시 나타나 놀라운 속도로 뻗어 나갔다.
노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쩍 벌려 그 검은 빛을 흡수하려 했다. 허나 아까와는 다르게 노인의 입에 들어간 빛은 흩어지는 대신 그의 등을 뚫고 나왔다.
바로 그때, 풍음은 비수를 휘둘러 굽은 칼을 떼어놓은 뒤 음산한 바람이 되어 자신에게서 등을 보이고 있는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말 그대로 바람 같은 속도였다.
허나 한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오른손으로 저물대를 문질러 곤극 채찍을 꺼냈다. 길고 새카만 채찍에서 영혼을 벌벌 떨게 할 기운이 풍겼다.
풍음이 가까이 접근한 순간, 한제는 곤극 채찍을 휘둘렀다.
짝!
채찍이 무언가를 타격하는 소리가 퍼져나갔고…
“크아아!”
이어서 풍음이 참혹한 비명을 내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붉은 채찍 자국이 남아 있었고 두 눈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풍음은 곧장 모습을 감추었다.
허나 한제가 손을 쭉 뻗자 운려해를 놀라게 했던 것과 같은 손자국이 생겨났다.
한제의 살기가 깃든 손자국은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알아서 움직였다.
콰오오!
손자국은 광풍을 일으키며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풍음을 따라잡더니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크윽!”
풍음의 몸을 파고 들어간 살육의 기운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육신을 터뜨려버렸다.
맑은 바람이 불어왔다.
한제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다시 허공으로 떠올라 이동했다. 그의 곁에는 세 개의 검이 붙어 있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피범벅이 된 살덩어리 한 무더기와 마른 시체 하나, 그리고 끝도 없이 진하고 짙은 죽음의 기운뿐이었다.
검은 탑 안의 갑옷에서 번득이는 어스름한 기운은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약간의 두려움도 깃들어 있었는데 이는 지난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저 손자국⋯⋯ 그자로구나! 저 녀석과 그자 사이에 설마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 ⋯⋯설마 그자가 이곳에 온 것인가!”
신식을 통해 혼란한 기운이 전해졌다.
평소라면 절대 이런 당황한 모습을 보일 리가 없는 그였지만 마음속에 ‘그자’의 모습이 떠오른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저 녀석의 손자국…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자의 신통력과 비슷해. 이건 우연인가 아니면⋯⋯.”
★ ★ ★
“이한제!”
커다란 고함이 하늘을 진동시켰다. 이는 한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1억 개 혼백이 융합되어 함께 내지르는 고함이기도 했다. 그 우르릉거리는 목소리에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했다.
승선과의 효력에 원신까지 푹 잠겨 있던 한제는 그 목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그의 두 눈에는 아직도 강한 붉은 빛으로 번득였지만 맑은 빛도 섞여 있었다.
한제가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을 때, 하늘에서는 무수히 많은 영혼으로 이루어진 검은 구름이 빽빽하게 몰려들고 있었다. 각 영혼은 혼력(魂力)이 충만한 상태였다.
그 구름 아래 허공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평범한 외모의 청년 하나가 허공에 뜬 채 원한이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한제, 나를 알아보겠나?”
어느덧 맑은 빛으로 돌아온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던 한제가 불쑥 말했다.
“후포.”
“알아보는군! 이한제, 오늘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죽일 것이다. 크하하!”
후포는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검은 구름이 진동하면서 그 구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영혼으로부터 거대한 압력이 흘러나와 사방을 뒤덮었다.
“이한제, 이 후포가 여태 살아 있을 거라고 너는 생각도 못했겠지? 당시의 나는 감히 너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으나 지금 너는 내 눈에 개미만도 못한 미물에 불과하다.”
후포는 한제를 노려보며 묵은 원한을 쏟아내듯 소리쳤다.
“그래, 생각지도 못했다.”
한제의 목소리는 하염없이 덤덤했다.
“당시 너는 나와 십삼을 버렸다. 나는 그 총령의 손에 온몸의 경맥이 잘리고 온몸의 뼈가 부러졌다. 그 어두운 감옥에서 내가 끝없는 고통과 치욕을 받고 있던 그때 너는 어디 있었지? 당시 나는 수도 없이 네 이름을 부르고 구해달라고 애걸했다. 허나 네게 있어 나와 십삼은 그저 한낱 장기 말일 뿐이었겠지. 멍청한 십삼은 그런 일을 겪고도 네 진짜 얼굴을 알지 못했고 말이다.”
광기 어린 후포의 고함에 상공을 채운 수많은 혼백이 동요하며 그와 함께 소리쳤다.
“다행히도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를 사지로 몰아넣는 대신 새 삶을 주었지. 주인님을 만난 덕에 나는 이곳에서 연혼술을 완성했고 1억 개가 넘는 혼백을 모았다. 오늘, 네 영혼을 육신에 봉인하여 가장 끔찍한 암흑의 감옥에 가두고 네 혼백을 뽑아내 혼번에 봉인하여 매일 너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악에 받친 눈빛으로 한제를 노려보던 후포의 입술이 비틀렸다.
“네 혼백을 거둔 뒤에는 연혼 부족으로 돌아가 그곳에 있는 모든 자들을 혼백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후포는 키득거렸으나, 그 표정은 다소 슬퍼 보이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다
“나를 그렇게도 원망했구나.”
한참이나 후포를 바라보던 한제가 불쑥 말했을 때, 후포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1억 개의 혼백에게 뜯어 먹히는 고통을 느끼게 해주마!”
후포는 그런 허장성세를 부릴 자격이 충분했다. 수많은 혼백이 풍기는 위력은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1억 개가 넘는 혼백 대부분은 이 원고 시대의 전장에서 싸웠던 영웅들의 것이었다. 생전의 수준이 낮았던 혼백은 없었고 개중에는 요수 급 수준을 가졌던 혼백도 있었다.
“이 땅에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의 목숨을 구해준 주인님뿐이다. 오늘, 여기서 너를 죽인 후, 나는 10억 개, 1백억 개의 혼백을 모아 이 요령의 땅에 열 번째 군을 만들고 1대 요제가 될 것이다. 바로 이 후포가!”
그때까지도 묵묵히 후포를 바라보고만 있던 한제가 낮게 혀를 찼다.
“나에 대한 원한 못지않게 연혼술을 익힌 자는 누구든 죽여 버리겠다는 욕망도 크군. 네가 가진 혼백을 빼앗길까 두려운 모양이지?”
후포는 한제를 똑바로 마주보다가 피식 웃었다.
“과연 나의 전 주인답군. 그렇다. 너는 어쨌든 내게 연혼술을 전수해주었지. 그러니 고마운 마음도 있다. 허나 난 그 감옥에서 네가 내 주인 노릇을 한 것은 오로지 네가 강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뛰어넘어 너의 주인이 될것이다.”
한제는 후포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10년 만에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하늘의 딸이라 불리던 여인의 자질로도 불가능한 일이지. 허나 이제야 알겠어. 너는 잠재력과 생명을 촉진시키는 공법을 익힌 것이다. 그러니 네가 이 경지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분명 굉장히 짧을 터. 어쩌면 단 하루조차 유지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닥쳐라!”
후포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가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혼백들로 이루어진 구름이 갈라지며 검은 안개가 나오더니 수백만 개의 혼백이 되어 후포의 손가락질을 따라 한제에게로 달려들었다.
“1백만 혼백의 위력을 보여주지. 네 평생 1백만 개의 혼백을 본 적이나 있겠느냐? 크하하하!”
후포가 미친 듯이 웃었다.
선검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허이국은 혀를 끌끌 찼다.
‘겨우 1백만 개 가지고 호들갑은…’
한제는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백만 개의 혼백으로 이루어진 검은 안개가 한입에 삼켜버릴 듯 달려드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하나의 문양이 번득인 순간, 맹렬히 달려들던 1백만 개의 혼백이 돌연 우뚝 멈춰 서더니 한제 손바닥의 문양을 바라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기이한 광경에 후포는 넋이 나가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연혼술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한제가 작게 외치며 손을 휘두른 순간, 그에게 달려들던 혼백들의 눈빛이 순종적으로 변했다. 번득이는 문양을 본 순간, 이들은 후포가 아니라 한제야말로 자신들의 진정한 주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후포와 1백만 혼백들의 연결은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이건 말도 안 돼⋯⋯.”
정신을 차림 후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크게 외쳤다.
“다들 앞으로!”
그 한 마디에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검은 구름이 미친 듯이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세상이 혼백들로 가득 찬 듯한 느낌이었다.
1억 개에 상당하는 혼백들이 달려들었으나, 한제는 사방으로 신식을 펼치며 당시 자신이 남겨두었던 연혼술의 결함을 건드렸다. 그러자 모든 혼백이 일제히 부르르 떨더니 순종적으로 변해 한제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게 무슨…”
후포는 거의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네 연혼술은 분명 발전했다. 이제 혼백들을 더욱 기민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됐지. 하지만 연혼술을 진정으로 전수받지 않는 이상, 근간은 익힐 수 없다.”
한제는 적통 연혼술을 전수받은 직계 제자였다. 혼번을 위주로 수련을 진행하는 연혼종의 술법은 그렇게 놀라운 신통력은 아니었지만 몇 대에 걸쳐 연구하고 정진한 결과였다. 그러니 정식으로 전수받지도 않은 연혼술을 겨우 십여 년의 수련만으로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후포의 은인이라는 자도 갑옷 안의 존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