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96
한제의 표정이 변한 순간, 사방을 휩쓸었던 검기가 떨리다가 무너져 내렸다. 이에 더욱 약이 올라 공격을 퍼부으려던 제검은 요제의 손에 붙들렸다.
“이 형, 내 조카가 좀 짓궂지? 용서하게. 이 아이는 태생적으로 검령이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아주 친한 벗의 딸아이였는데 갑작스러운 변고로 검령이 되었네. 나에게는 내 딸이나 다름없지. 그러니 어찌 이 아이에 대한 음탕한 희롱을 참을 수 있겠나!”
요제는 웃음기를 머금고 이야기했지만 그의 눈이 자신을 향했을 때 허이국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제의 눈빛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잠깐 굳어졌다. 요제가 방금 요력의 결정을 폭발시켰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또한 그 순간 요제가 발휘한 힘은 문정기 후기 절정에 이른 수련자에 비해서도 결코 약하다 할 수 없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한제는 허이국을 잡아채 저물대에 집어넣은 뒤 포권을 하며 말했다.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군. 사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네. 요장 묵비는 지금 어디에 있나?”
요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한제와 이렇게 대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허나 자신의 딸과 다름없는 아이가 희롱당하는 상황을 그 역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허이국은 잘 감춘다고 했겠지만 그 안에 억눌린 극도의 음탕함을 요제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 형, 묵비는 이미 부수가 되었다네. 그는 천수와 함께 좌로대군을 이끌고 있지. 지금쯤 분명 화요군 송도성(松濤城)에 이르렀을 게야.”
말을 마친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형이 조령의 사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선포해 두었네. 그러니 이 형이 무슨 일을 하든 어려움은 없을 거야. 또한 이 형이 내 옥패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직접 이 형을 대동하는 것과 같으니 누군가 불손하게 굴거든 천수를 동원해 처리하게!”
요제 고운돈은 말을 마친 뒤 하얀색 옥패를 한제에게 건넸다.
요제가 건넨 옥패에는 독특한 기운이 어려 있어 감히 흉내 내거나 복제할 수 없었다.
한제는 옥패를 받아 든 뒤 말했다.
“고맙네!”
말을 마친 그는 포권을 한 뒤 몸을 돌려 먼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졌다.
고운돈은 한제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한제, 그 거문고 소리를 들을 때부터 나는 알았다. 나와 너는 같은 배를 탄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 난 너와 나쁜 관계가 되기를 원치 않아 선의를 보인 것이니 너도 잘 알고 있기를 바란다.”
한편, 허이국은 조심스레 한제에게 물었다.
“주인님, 그 소녀는⋯⋯?”
“그 일에 대해서 다시는 언급하지 마라!”
한제는 단호하게 명한 후 손에 쥔 옥패를 만지작거리다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눈치가 빠른 그는 이미 요제의 뜻을 이해했다.
천요군의 좌로대군에 속한 요병은 1천만에 달했다. 그들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대지가 울렸다. 천(天), 주(宙), 황(荒) 세 명의 요수가 이끌고 홍(洪), 현(玄), 황(黃) 세 명의 부수가 보좌하는 1천만 요병은 화요군의 경계에 있는 송도성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천수, 주수, 황수는 각자의 마수에 올라 요병들을 이끌고 내달리는 중이었다. 그들은 서로 대화 없이 묵직한 살기를 풍기며 천요군의 대군을 이끌고 송도성으로 향했다.
대군의 우익에서는 갑옷을 입은 부수 묵비가 기린과 닮은 요수의 등에 올라 있었다. 그의 뒤쪽, 기린 요수의 꼬리에 한 중년 남자가 두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등에 커다란 검을 멘 그에게는 신선의 풍모가 가득했다.
꽈르릉!
그때, 멀리 떨어진 하늘 끄트머리에서 천둥이 울리더니, 1천만 요병들의 살기를 압도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갑옷의 사내가 짙은 마기를 피워 올리며 나타나는 모습은 마치 강림하는 마왕 같았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쪽으로 쏠렸다.
검은 갑옷의 사내, 한제는 한 줄기 유성처럼 빠르게 하늘을 갈랐다.
그는 좌익 묵비에게 신식을 고정시켰고 묵비는 냉랭한 눈으로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묵비의 뒤쪽에 있던 중년 남자가 줄곧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그 눈에는 심오한 빛이 담겨 있었다.
수많은 요병들을 이끌고 달려오던 세 요수 중 주수와 황수의 눈이 번득였고 1천만 요병들의 살기가 들끓었다. 허나 한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살인은 다른 자의 기세를 빼앗는 일로 반드시 단숨에 처리를 해야 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요제의 옥패를 내보인다면 기선제압을 할 기회를 잃고 대나검종 제자에게 능천후의 검기를 사용할 시간을 주는 꼴이 될 것이다.
“요제의 명에 따라 부수 묵비를 죽일 것이니 모두 비켜라!”
한제가 크게 외치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요제에게서 받은 옥패가 그의 손을 떠나 주수와 황수에게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제는 나이술을 통해 자리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오른손 검지를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적멸지가 전광석화처럼 묵비를 향해 돌진했다.
“…”
묵비는 말없이 냉랭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었다. 동시에 그 뒤에 있던 중년 남자가 신중한 얼굴로 두 손을 들어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그의 등에 매여 있던 대검이 돌연 솟아오르더니 곧 시커멓고 흉측한 돼지의 혼이 나타났다.
한제의 손가락에 뿜어져 나온 바람은 굉장히 놀라운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묵비의 코앞에 이른 순간 무너져 내렸다. 이 광경에 묵비는 흠칫 놀랐으나 표정의 변화 없이 요력을 폭발시켜 전신을 뒤덮었다.
그의 뒤에 있던 중년 남자 역시 흠칫 놀라고 말았다. 허나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순간의 망설임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어느새 중년 남자의 곁에 나타난 한제는 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 둘러진 갑옷의 마기가 응집되어 한 줄기 마염을 이루었다. 이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다.
“헛!”
중년 남자는 크게 변한 얼굴로 순간이동을 했고 곧장 능천후의 검기를 사용하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대지에서 황천이 솟아올랐고 무형의 힘이 사방을 뒤덮었다. 마치 세상에 오로지 그 황천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중년 남자의 미간에서 금색 빛이 번쩍했다. 이때, 한제의 검지가 이미 그의 미간에 닿아 있었고 그 순간 남자는 숨을 거두었다.
한제는 다른 사람이 반응할 틈도 없이 중년 남자의 머리를 잘랐고 이와 함께 그 남자의 커다란 검까지 움켜쥐고는 자리를 떠났다.
자연스럽고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한제는 대나검종의 중년 남자 해저의 머리를 베는 동시에 그의 원신까지 봉인했다. 문정기 수준인 한제에게 영변기 후기 수련자의 원신을 봉인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저의 머리를 쥔 한제는 맑은 바람처럼 눈 깜짝할 사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는 요제가 주었던 옥패도 챙기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이 요제의 선의의 표시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앞에서는 그냥 받았을 뿐이었다.
탐랑의 행방
한제는 해저의 머리를 제련하여 검기를 체내에 흡수한 후 연혼술을 통해 해저의 원신에 담긴 정보들을 파악했다. 그 결과 해저의 원신은 거의 붕괴될 지경이 됐고 한제는 그 원신을 혼번에 집어넣어 하나의 주요 혼백으로 삼았다.
“요령의 땅 안에 있는 대나검종의 사람들은 능천후의 검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탐랑이라는 자의 암묵적인 보호까지 받고 있군. 탐랑⋯⋯ 특이한 이름이군. 들어본 적은 없지만 해저의 기억에 존재하는 탐랑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해. 하지만 그자를 직접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지.”
한제는 이동하는 도중에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탐랑⋯⋯ 해저의 기억에 따르면 그자의 수준은 이미 문정기를 뛰어넘어 음의의 경지에 이르렀다. 양의의 경지에 이른 사도환보다 약간 떨어지는 수준이겠지.”
한데 혼잣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한제가 돌연 우뚝 제자리에 멈추었다.
“사도환!”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저물대를 두드려 옥패 하나를 꺼내 살피더니 이내 표정이 구겨졌다.
옥패 안에는 사도환이 탁본을 떠준 몇 개의 초상이 있었는데 그 초상 속의 사람들은 당시 사도환의 육신을 무너뜨린 자들이었다.
사도환이 이 옥패를 준 것은 한제를 위해서였다. 그들을 마주칠 경우 절대 화를 돋우지 말라는 의미였다.
한제는 자신이 정말 그 초상 속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수련자가 모습을 바꾸기란 굉장히 쉬웠기 때문에 겨우 초상화만을 가지고 원하는 사람을 찾기랑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 탐랑이라는 자가 정말 당시 사도환을 공격한 그 원수라면 분명 석주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터!”
한제는 자신의 미간을 문질렀다. 석주는 그의 가장 큰 비밀이었다. 여태까지 7백여 년을 수련해오는 동안 느낀 석주의 속성은 너무나도 기이했다. 허나 빗물로 물 속성을 가득 채운 뒤로 다음 속성을 채우기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현재는 금속 속성만 채우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는데 한제는 이 마지막 속성을 가득 채우는 것은 분명 여태까지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이 석주가 그의 원신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면 한제는 이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을 터였다. 정말 생사가 걸린 위기의 순간이 온다면 한제는 냉정하게 석주를 원신으로부터 분리해낼 것이었다.
허나 지금 석주는 한제의 원신에 완전히 융합된 상태로 분리해낼 수가 없었다. 원신을 꺼내어 능천후의 검기처럼 제련해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 석주의 내력은 대체 무엇이기에 수련 연맹에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거지? 시간을 조금 느리게 흘러가게 하는 것 외에 별다른 신통력을 보여주지는 않았어. 이는 낮은 수준의 수련자에게나 효과가 있을 뿐이지. 또한 이 안에 숨을 수도 있기는 하나 높은 수준의 수련자에게는 발각될 수 있어. 그러니 어찌 보면 계륵과도 같은 물건인데⋯⋯.”
어차피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기에 한제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천요군에 있는 대나검종 제자는 본래 다섯이었다. 말양이 죽은 것을 그들이 눈치챘다면 나를 의심하고 곧장 사람을 보내 책임을 물어왔을 것이다. 한데 지금껏 대나검종이 보인 행동으로 보아 아직 그런 움직임이 없다.”
한제는 계속해서 생각을 정리했다.
해저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탐랑은 화요군에 있었다. 그런 탐랑이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대나검종 제자들에게 알려졌다. 10년이 흐른 뒤 천요군에는 해저만 남게 됐고 나머지는 속속 화요군으로 떠나 탐랑과 접선했다.
“자서도 탐랑과 접선하러 가는 길이었군! 그러다가 도중에 나를 만나 죽은 거야. 그 탐랑이라는 자가 대체 무엇을 발견했기에⋯⋯?”
한제의 눈빛이 번득였다.
“탐랑이 있는 한 능천후의 검기를 모두 수집할 수는 없다. 허나 이 일은 어차피 급하게 굴어서 될 일이 아니지.”
생각을 정리한 한제는 나이술을 이용해 이동했다.
“지금 벌어지려는 전쟁은 내게 살육의 기운을 수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허나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해. 그렇다면…?”
한제는 무언가 결심한 듯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제는 줄곧 나이술을 이용해 며칠을 이동한 뒤 천요군의 연혼 부족에 도착했다. 연혼 부족은 10여 년간 발전해 천요군 황야의 4대 부족 중 최대 세력을 갖춘 상태였다.
한제의 복귀에 온 부족이 들끓었다. 한제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부족원도 많았지만 그들은 다른 부족원들의 입을 통해 한제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은 바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한제는 이미 고요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고 한제를 향해 부복하지 않는 부족원이 없었다.
또한 산골짜기는 그들에게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한제는 십삼과 구양화를 불러 1만 명의 부족원을 선발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살육의 기운을 각각 하나씩 나눠주었다.
이 살육의 기운은 그들의 체내로 들어갔고 덕분에 그들이 누군가를 죽일 때마다 상대의 생기를 체내에 들어 있는 살육의 기운에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많은 살육을 저지를수록 체내에 들어간 살육의 기운이 더욱 강해지고 심지어 위기의 순간에는 생의 낙인으로 변해 그들의 안전까지 지켜줄 것이다.
한제는 이 부족원들을 천요군과 별개로 화요군의 전장으로 파병하여 각자 전투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들에게 한제가 원한 것은 단 하나, 끊임없이 살육을 저질러 체내에 있는 살육의 기운을 키우는 것이었다.
한제는 구양화와 십삼에게 법보를 쥐어 보내며 3개월 동안 남은 부족원을 이끌고 천요군 황야의 나머지 세 부족을 모조리 점령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한제 자신은 하루 종일 산골짜기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산마에 끊임없이 원신의 낙인을 찍어댔고 남는 시간에는 금번을 고쳤다.
3개월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십삼과 구양화는 한제의 법보 덕분에 어렵지 않게 나머지 세 부족을 하나하나 흡수했고 그 부족원들은 이요탕을 먹고 연혼 부족의 일원으로 거듭났다.
한제는 존혼번에서 대량의 혼백을 새로운 부족원들의 체내에 들어가게 했다. 다만 그들의 혼백은 해치지 않고 공존하게끔 해두었다. 이어서 살육의 기운 역시 그들의 체내에 섞어 넣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3만 대군이 생겨났고 이들 역시 화요군으로 파병되었다.
한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이술을 이용해 연혼종에 남은 부족원들을 마탑이 있던 원고 시대의 전장으로 이동시켰다. 이어서 원래 마탑이 세워져 있던 곳에 새로운 탑을 세우고는 그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함께 데려온 부족원들은 이곳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