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
“불만 있냐? 어쩔 건데? 누가 진짜 먹칠을 하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그때까지 아들의 안색을 살피던 한제의 아버지는 불안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한제야, 너는 어떻게 됐더냐?”
한제의 어머니가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이산이 침묵을 깨고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진작 얘기했잖아. 넌 자질이 없다고. 봐봐, 괜히 헛걸음만 하고 창피만 당하잖아. 나야 첫 번째 시험에서 바로 통과했지만 그다음에 네가 무슨 시험을 거쳤는지 몰라도 불합격 소리만 확실히 들었거든. 그것도 3번이나. 그러게 내 말 듣고 가지 말았어야지. 넷째 작은아버지네 아들도 너보다는 강할 거다.”
그 말에 넷째 작은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산, 네가 비록 선인의 제자가 되긴 했지만 무례함이 지나치구나. 내 아들이 자질이 있든 없든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산은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제의 아버지는 갑자기 10년은 더 늙은 듯했다. 그는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한제의 어머니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한제야. 그게… 그게 사실이니?”
한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 상태로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어머니. 선인의 제자가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죽어서라도 꼭 부모님의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한제의 어머니는 달려가 아들을 안고는 흐느끼며 말했다.
“우리 아들, 괜찮다. 슬퍼 마라. 비록 네가 선인의 제자가 되진 않았지만 내년이면 또 과거 시험이 있지 않겠니. 그 일은 단념하고 절대 바보 같은 짓은 할 생각도 말거라.”
한제의 아버지도 다시 기력을 되찾고는 아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들을 안아주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한제야, 절대 바보 같은 생각 말거라. 아버지가 있잖니. 아버지 믿고 돌아가서 공부하면 된다. 내년에 과거 시험도 있다.”
주변에 있던 친척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 구경이나 난 듯 한제네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온갖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한제 저 녀석, 내가 예전부터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 어디 큰 형님네 이산이랑 비교를 해? 정말 가문의 수치군.”
한제 아버지의 여섯째 동생이 조롱하듯 말했다.
한제의 셋째 작은아버지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내가 얘기했잖아. 한제 저 녀석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는 거 다 거짓말이라고… 아비가 출세를 못했으니 아들이라도 어떻게 해보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다 들통 났지, 뭐.”
방금 전까지 한제 아버지 옆에 앉아 아부하던 다섯째 작은아버지는 얼굴색을 싹 바꾸더니 순식간에 돌변했다.
“세 명이 갔는데 한제 저놈만 시험에서 떨어진 거네? 이 씨 가문에서 제일 못난 놈이야. 창피해 죽겠군. 둘째 형님네랑 잘 지내보자고 한 말은 취소야.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부녀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며칠 전에 내가 저쪽 마을에 가서 한제 녀석을 봤잖아. 그때 내가 저놈 어수룩하고 흐리멍덩해 보인다 했어. 어디 이산이나 이현이랑 비교를 해?”
한제의 다섯째 작은어머니도 잔뜩 비꼬았다.
“나도 쟤는 안 될 줄 알았어. 저놈 에미애비를 봐. 어디 그런 선인이 나오겠어? 이산이랑 이현이가 진짜 재능이 있는 거지, 한제 쟤는… 이름부터가 영 아니잖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한제네 가족을 손가락질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갖 아부를 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앞에서 대놓고 모욕적인 말을 해대자 한제 부모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 모습을 본 한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온갖 조롱 섞인 말들은 그를 더 자극시켰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산의 아버지, 이상훈은 내심 비웃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둘째야, 내가 얘기하지 않았니. 선인의 제자가 되려면 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보다 엄격하지. 내 아들처럼 뛰어나지 않으면 사실 기회조차 없어. 네가 재수가 없는 거지. 네 아들, 저렇게 절망에 빠져있는데 이제 어쩌냐?”
한제의 아버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성난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닥치시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분명 내게 재산을 남겨 주셨건만 당신이 친척들이랑 말을 맞춰 가로챘다는 거 알고 있소! 그런 인간들이 감히 나를 조롱해?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소! 방금 전까지 그리 아부 하더니, 이제 와서 비웃어? 당신들은 사람도 아니오!”
이 말에 이상훈은 분노하며 말했다.
“과거 일을 꺼내서 어쩌겠다는 거냐? 좋은 마음으로 충고했더니, 제 자식이 재목이 안 되는 걸 가지고 나한테 화나 내고 말이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네 자식 놈도 너랑 똑같은 놈일 게다!”
한제는 굳은 듯 멍하니 서서 그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 자신과 부모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주변에 있던 친척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에 담아두었다.
“너! 죽여 버릴 거야!”
한제 아버지가 참지 못하고 바닥에 놓인 의자를 집어드는데 넷째 작은아버지가 재빨리 막아서며 조용히 말했다.
“둘째 형님. 이러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저를 믿으세요.”
그리고는 넷째 작은아버지는 다시 이상훈을 노려보며 말했다.
“큰형님. 저도 못 들어주겠네요. 다시 한 번 제 앞에서 둘째 형님을 모욕하시면 더는 형제고 뭐고 없습니다.”
넷째 동생의 인맥이 엄청나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훈은 질겁했다. 그러자 가장 연배가 많은 셋째 작은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아니다, 넷째야. 그건 네 잘못이다. 둘째네 아들은 자질이 없어. 한제는 안 돼. 어른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
한 통의 편지
“그래요, 넷째형님. 이산이 한 말이 맞아요. 넷째형님네 아들 준이가 한제보다 낫죠. 뭐 선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상재의 다섯째 동생이 옆에서 거들자 이산이 우쭐대며 다시 말했다.
“이게 다 저쪽에서 초래한 결과라고요. 저와 아버지가 이미 경고했는데 듣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우리한테 화를 내고 생떼를 쓰다니.”
이현이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는지 말을 꺼내려 했다.
“한제는…”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무섭게 쏘아보자 이현은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한제의 넷째 작은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이 일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겠소. 한제가 운이 없어서 그런 거지. 다들 이 일은 여기서 끝냅시다. 한제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대산파 제자가 아니면 어떠냐? 이 작은아버지가 강호 문파를 많이 안다. 잘 얘기해서 준이랑 같이 가면 돼. 원래 준이를 그쪽으로 보내려고 했거든.”
이 말을 들은 이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이한제. 넷째 작은아버지 말대로 하던가. 그 사람들한테 네가 대산파에서 떨어져서 온 거라고 하면 과연 받아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때까지 말 한마디 없던 한제가 고개를 들어 이산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산, 잘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네 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게 한 짓은 절대 잊지 않겠다. 오늘의 이 수모를 내가 백 배, 천 배로 갚아줄 것이다.”
이산은 한제의 왠지 모를 박력에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다시 예의 그 비웃는 얼굴로 조롱하려 했다. 허나 넷째 작은아버지가 인상을 쓰며 이산에게 말했다.
“조그만 놈이 말이 너무 많아. 더 이상 너와 시간 낭비하기 싫다. 어리석은 짓 그만해. 대산파에서는 어찌 저런 놈을 받아준 건지!”
그 말에 이산의 아버지가 얼굴을 붉히더니 화를 냈다.
“어디 네가 감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하나같이 냉소를 지었다.
한제의 넷째 작은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웃다 갑자기 뚝 그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큰형을 노려봤다.
“뭐라고요? 감히? 감히?”
그때 이상재가 동생을 말렸다.
“넷째야, 그만하자. 아내와 아이도 생각해야지. 나 때문에 이럴 것 없다. 이 형이 너의 그 마음은 평생 기억하마. 어서 한제 데리고 집으로 가자꾸나.”
넷째 작은아버지는 이산의 아버지를 매섭게 쏘아보고는 다시 둘째 형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한제의 가족과 넷째 작은아버지는 자리를 떴다.
한참이나 마차를 달렸음에도 한제는 친척들이 비웃던 소리가 아직까지 자신을 따라오는 듯했다.
한제의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선인의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어도 한제는 자신의 아들이다.
“한제야, 걱정 말거라. 이 아비도 처음 집을 나올 때 지금 너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느냐. 내년에 과거가 있으니 집에 가서 잘 준비하자. 공부가 하기 싫으면 넷째 작은아버지를 따라가도 된다.”
한제의 어머니는 애처롭게 아들을 바라보았다.
“한제야, 절대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거라. 이 어미는 너밖에 없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미는 살아갈 수 없단다. 아들아, 꼭 이 시련을 이겨내자.”
어머니의 뜨거운 눈물을 본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절대 바보 같은 짓 하지 않을 거예요. 저도 생각이 있어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한제의 어머니는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한제는 어머니의 따뜻한 온기 덕분에 마음의 상처가 천천히 아무는 듯했다.
너무 고단한 날이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면서 한제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한제는 선인이 되어 부모님을 모시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밤이 깊어서야 잠에서 깬 한제는 익숙한 자신의 방을 슥 둘러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 마음을 더 단단히 먹었다.
그는 방에서 나와 부모님의 방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서신 한 통을 남기고 간단히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선인이 되는 길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대산파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저를 제자로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선인이 될 수 있는 다른 파를 계속 찾아볼 겁니다.”
한제는 굳게 마음을 먹고 짐 보따리를 짊어지고 마을을 떠났다.
밝은 달빛이 길을 비추고 하늘의 별들이 길을 안내하는 깊은 밤. 한제는 그렇게 멀리 멀리 떠나갔다.
★ ★ ★
한제는 멈추지 않고 계속 동쪽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일주일 째, 그는 맹수도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던 한제는 동이 틀 무렵, 마침내 저 멀리 구름에 둘러싸인 익숙한 산봉우리를 발견했다.
녹초가 된 한제는 잠시 앉아 허기를 달랬다. 그리고 결연한 눈빛으로 대산파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때,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맹수의 그것이 분명했다.
온몸에 털이 삐쭉 선 채로 고개를 돌린 순간, 한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커다란 백호 한 마리가 매서운 두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