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04
“넌 내 제물이 될 자격도 없어.”
이어서 한제는 빠른 속도로 수만 리 밖으로 이동했다.
초조한 얼굴로 열 명이 넘는 수련자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허운산은 먼 하늘 끄트머리에서 한 줄기 빛과 함께 한제가 나타난 순간, 한제의 한쪽 손에 붙들린 자신의 동생을 보고는 감정이 북받쳤다.
“양라야!”
허나 동생에게 다가가던 허운산은 한제의 반대쪽 손에 붙들린 사내를 본 순간 흠칫 멈추어 섰다.
“선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선조를 본 순간 허운산의 마음은 진동했다.
한제는 허양라를 허운산에게 건넨 후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기린 혼백이 포효하며 나타났고 허운산을 비롯한 십여 명의 수련자들의 미간에서는 덩어리진 푸른빛이 하나둘 빠져나가 기린 혼백의 입으로 들어갔다.
기린 혼백은 기분이 좋은지 포효하며 혼번으로 얌전히 들어갔다.
“허 형, 금제는 풀렸고 여동생도 구해왔습니다. 허 형의 사숙은 성루에 가서 찾으시면 될 듯합니다. 연혼 부족에 묶어두었던 분도 곧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허 씨 남매의 갈등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한제는 말을 마치자마자 왜소한 노인을 쥔 채 발을 굴러 나이술을 발휘했다.
연혼 부족의 탑에서 다시 나타난 한제는 손을 풀어 노인의 몸을 한쪽으로 내던진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저물대를 두드렸다. 그러자 세 자루의 검이 나타나 노인 곁에 이르렀다. 검광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한기에 노인의 피부에 소름이 돋아났다.
자서와 말양, 해저의 것이었던 검으로 한제는 제련을 통해 이 세 자루의 검에 존재하는 검진(劍陳)을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존 능천후의 삼재검진(三才劍陳)에 대해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한제의 덤덤한 목소리에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세 자루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 곤선망에서 풀려났을 때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검존의 검진이 얼마나 현묘한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지.”
삼재검진이라는 이름은 해저의 혼백에 존재하는 기억을 통해 알아낸 것으로 검초십이자가 가진 검 중 세 개로 활성화시킬 수 있다. 만약 동시에 열두 개의 검을 이용한다면 검존 능천후가 자랑하는 천살십이지검진(天殺十二地劍陳)을 만들 수 있었다.
“자 이제 말해봐라. 네 정체가 뭔지.”
이미 상대의 담이 얼마나 작은지 파악한 한제는 목소리에 천마음을 약간 섞어 말을 이었다.
“말하지 않는다면 수혼술을 쓰겠다. 네 혼백은 제련해서 영원히 윤회되지 않도록 만들어주지.”
노인은 흠칫 놀라면서도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나는 선계 사람이다. 감히 내게 불손하게 굴다니, 너⋯⋯”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제는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는 수혼술의 어스름한 빛이 번득였다. 한제는 곧장 노인의 정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크아악! 끄윽…”
노인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미 곤선망에 몸이 속박된 상태라 옴짝달싹 못 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말할게, 말할게! 말할게!”
한제는 본래 멈출 생각이 없었으나, 표정이 약간 변하더니 손을 거두고 탑 밖을 내다보았다. 상공을 뒤덮은 검은 안개 사이로 돌연 길이 하나 만들어지더니 웅웅 칼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의 굽은 칼은 번개처럼 빠르게 탑 근처로 돌진해왔고 허이국은 그 위에 올라탄 채 한 손으로 붓을 쥐고 있었다.
얼른 탑 안으로 들어온 허이국은 알랑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을 위해 제가 이 법보를 찾아왔습니다. 정말 힘들었어요. 주인님은 모르시겠지만 그 녀석, 굉장히 빠르더군요.”
“잘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붓이 곧장 그의 손에 쥐어졌는데 그 순간 한제는 붓에서 흘러넘치는 듯한 선력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욱 강한 위압감도 느껴졌다.
한제의 칭찬에 허이국은 헤벌쭉 웃었다. 반역에 실패한 뒤 줄곧 공을 세울 기회만 찾았는데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한제는 허이국과 굽은 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붓을 쥔 채 천천히 두 눈을 감고 체내의 선력을 붓 안에 느릿하게 들여보냈다.
순간, 붓의 끝에서 한 줄기 금색 빛이 나타났다. 이 빛은 한제가 선력을 유입할수록 점점 밝아지더니 결국 온 탑 안을 번쩍이게 만들 정도로 밝아졌다.
멀리서도 이 탑 안에서 번쩍이는 금빛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연혼 부락 안의 부족원들은 분분히 경건한 표정으로 자리에 꿇어 앉아 탑을 향해 절을 했다.
곤선망에 속박된 노인은 한제의 손에 들린 붓이 눈부신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당시 처음으로 그 붓을 손에 넣었을 때에도 금빛이 나긴 했지만 지금 한제의 손에서 번득이는 금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흥! 금빛이 밝아도 뭐하겠어? 내 도움이 없는 한 저자가 붓의 사용 방법을 알 방도가 어디 있겠냐고! 나도 당시에 그 옥패가 아니었다면 저 붓의 신통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을 테니까. 물론 내 자질도 한몫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노인은 득의양양해졌다.
한데 다음 순간, 노인은 그야말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두 눈을 부릅뜬 한제가 손에 든 붓으로 한 획의 문양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아, 그래. 아까 내가 문양을 그려내는 것을 보고 흉내 내는 거겠지? 그래, 그럴 거야!’
그러나 뒤이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노인은 급기야 넋을 잃고 말았다.
그 무렵, 한제의 눈은 금빛으로 은은히 번득이고 있었다. 그는 붓을 다시 휘둘러 아까 전 그려낸 문양에 하나의 획을 더하더니 두 개의 획으로 이루어진 문양을 만들어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획을 그렸다. 순간 그의 앞에는 태양처럼 밝은 빛을 번득이는 세 개의 획으로 이루어진 문양이 나타났다.
그 순간, 한제 체내의 선력이 저절로 일어나 그의 손을 타고 문양으로 흘러들었다.
세 개의 획으로 이루어진 문양은 곁에 있는 허이국과 노인의 눈에 완벽한 존재로 느껴졌다. 마치 천도의 낙인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번득이는 금빛은 붓에서 발산되던 금빛을 능가해 하늘에 자리한 존혼번으로 이루어진 검은 안개마저 밀어내자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드러났다.
한제는 번득이는 눈으로 세 개의 획으로 이루어진 금빛 문양을 바라보며 붓을 쥔 손을 그대로 멈추었다.
붓을 쥔 그는 마치 그림 속의 선인 같았다. 특히 두 눈에서 번득이는 금빛은 천도와 무궁무진한 위엄을 품은 듯했다.
허이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한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허이국은 금빛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한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은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임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광경은 마치 뜨거운 낙인처럼 그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남았다.
한편, 노인은 멍하니 한제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서⋯⋯ 선제…”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붓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문양은 순간 사라져 금빛으로 부서지더니 탑 밖으로 나가 세상에 녹아들었다.
“자 이제 말해봐라. 네 정체가 뭐지?”
한제의 눈에서 번득이는 금빛은 점점 어두워졌으나, 그의 눈빛은 노인의 두 눈을 그대로 관통하여 마음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듯했다. 또한 천마음이 발휘되어 한제의 목소리에는 마력이 깃들었고 그대로 노인의 귀를 통해 노인의 원신이 있는 곳까지 흘러들었다.
“나는 연우파(煉羽派)의 수련자 황옥이라고 한다. 당시 요령의 땅에 들어온 것은 원수에게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러다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이곳에 남기로 했다. 이곳은 좋은 곳이야. 조심하기만 하면…”
텅 빈 눈으로 중얼거리는 노인을 보며 한제가 물었다.
“어떻게 이곳 요령의 땅에서 선종과 각종 선계의 법보를 손에 넣었지?”
“우연히 어느 버려진 별채에 들어갔다가 발견하게 됐지.”
“선종과 붓 말고 또 뭘 찾았나?”
한제는 덤덤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물었다.
“두 개의 저물대를 찾았다. 그중 하나는 신식의 낙인이 없었고 그 안에는 곤선망 등과 옥패 하나가 들어 있었지. 다른 저물대에는 신식의 낙인이 찍혀 있어 열 수가 없었어. 그러다가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지.”
노인은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누구한테 빼앗겼는데?”
“어느 부부였어. 두 개의 저물대를 따로따로 보관하고 신식이 찍혀 있지 않았던 저물대에 내 신식의 낙인을 남겨두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모두 빼앗겼을 거야.”
노인의 목소리는 공허했으나, 그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분노가 어렸다. 그 일은 그에게 꽤나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누구든 방금 손에 넣은 보물을 남에게 그대로 빼앗긴다면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허망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부부의 생김새에 대해 자세히 묻던 한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전에 말한 옥패에는 뭐가 기록되어 있었지?”
“몇 가지 선보(仙寶)의 사용 방식과 선술, 그리고 선위라 불리는 꼭두각시 만드는 방법. 하지만 그 옥패에는 금제가 걸려 있어 모든 내용을 다 살피지는 못했다.”
노인이 자세히 털어놓았다.
지금 그는 한제의 몸에서 피어오른 금빛 위엄에 넋이 나간 데다가 천마음까지 더해진 목소리에 눌려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그 옥패는 어디 있지?”
“내 저물대에⋯⋯.”
노인이 답했다.
“곤선망은 사람을 며칠 동안이나 묶어둘 수 있지?”
“사흘.”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매를 휘둘러 선기를 노인의 체내에 불어넣어 원신을 철저히 봉인했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노인은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곁에는 삼재검진이 경계하고 있었다.
★ ★ ★
사흘째 되던 날, 노인의 몸을 둘둘 말고 있던 곤선망은 푸른빛을 내뿜으며 노인의 몸에서 떨어져 내리더니 손바닥만 한 푸른색의 작은 그물망이 되었다.
한제는 불쑥 두 눈을 뜨고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노인의 몸에서 저물대가 휘릭 날아왔다. 신식으로 저물대를 살핀 한제는 이어서 다시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인의 몸이 끌려왔다.
노인의 몸 곳곳에는 열 개가 넘는 저물대가 있었다.
한제는 노인을 한쪽으로 밀쳐버린 뒤 삼재검진을 붙여 혼수상태에 빠진 노인을 철통같이 경계하게 했다.
신식으로 저물대를 훑던 한제의 눈이 그중 하나에 꽂혔다. 한제는 그 저물대에 찍혀 있던 노인의 신식을 지워버리고 안을 살폈다.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옥패만 들어 있었다.
그중 푸른빛을 발산하는 옥패를 손에 든 한제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청상(靑霜)
옥패의 재질은 영석도 선옥도 아니었다. 한제로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나무 같으면서도 나무는 아니었고 돌 같으면서도 돌은 아닌 재질의 옥패를 쥐자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뒤덮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