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07
지난 1백 년간 이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존재는 이미 화요군 사람들에게도 천요군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져 있었다. 이들은 어디서인지 모르게 갑자기 나타났고 어느 쪽 세력인지도 알 수 없었다. 포위하여 토벌하려 해도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았다.
한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돌연 움직임을 우뚝 멈추더니 광기에 가까운 환호를 지르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전장을 떠나는 그들의 몸에서는 짙은 살육의 기운이 줄기줄기 피어올라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튀어나갔다.
이런 장면이 화요군 곳곳의 수많은 전장에서 동시에 나타났고 하늘은 수많은 회색 기운으로 가득 찼다. 이 회색 기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살기를 풍기며 일제히 한곳을 향해 날아갔다.
이 순간, 세상은 마치 끝없는 살육으로 뒤덮인 듯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느껴졌다.
화요군 안의 모든 전장에서는 전투가 중지되었다. 요병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요군과 화요군의 고급 장교들 사이에도 연혼 부족원은 존재했다. 이 순간, 화요군의 수많은 장교들이 몸을 덜덜 떨었고 그들의 정수리에서는 살기가 빠져나가 빠르게 사라졌다. 살기를 잃은 그들은 곧장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각자의 수단을 발휘하여 얼른 그곳에서 벗어났다.
살육의 기운이 일제히 하늘로 솟아올라 화요군 제도로 몰려들면서 하늘은 이미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10만 갈래의 살육의 기운은 짙은 살기를 품은 채 사방팔방에서 한제를 향해 몰려들었다. 제도 상공에서는 휘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한제가 서 있는 곳이 마치 거대한 회오리의 중심이 된 것처럼 10만 갈래에 달하는 살육의 기운이 그곳을 향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각각의 살육의 기운은 1백 년 전보다 몇 배는 더 순도가 높아져 있었고 살기 역시 당시보다 훨씬 짙었다. 1백 년 동안의 자양을 거친 덕분에 이 10만 갈래의 살육의 기운은 거의 실체화된 듯했다.
“분리!”
한제는 붉은 눈빛을 번득이며 살심과 살의를 융합시켜 살육의 기운의 근원을 만들었다.
하늘을 가득 뒤덮은 10만 갈래의 살육의 기운은 한제의 외침에 순간 하나에서 둘로 분리되었다. 이에 눈 깜짝할 사이 10만 갈래의 살육의 기운은 20만 갈래로 불어났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20만 갈래에서 또 나뉘고 또 나뉘고 또 나뉘었다.
살의와 살심으로 응결된 살기가 안개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열 배로 분화된 살육의 기운은 이제 1백만 개에 달했다.
더 분리할 수도 있었지만 한제가 익힌 살육 선결은 아직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지금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살육의 기운은 1백만 개가 한계였다.
“파괴!”
한제는 긴 머리를 나부끼며 요력으로 이루어진 보호막을 가리켰다.
1백만 갈래의 살육의 기운이 순간 일제히 그 봉인을 향해 돌진했다.
고요의 봉인을 제거하려면 한 지점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봉인의 모든 위치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야 했다.
1백만 갈래의 살육의 기운은 10년 동안 자양시킨 뒤 만들어낸 것이라 그 신통력은 가히 놀랄 만했다. 이제 살육의 기운은 적멸지를 대신하여 한제의 또 다른 필살기가 되었다. 마갑(魔鉀)을 입은 후의 화마지, 도를 이용해 만들어낸 황천과 함께 한제의 3대 필살기로 등극한 상태였다.
정신술을 시험 삼아 두 번 사용해본 한제는 이 신통술을 최대한 깊숙이 숨겨놔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존재를 감춰두어야만 절체절명의 순간 허를 찔러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1백만 갈래의 살기는 쏟아지는 빗물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화요군 도성을 감싼 보호막에 떨어졌다.
펑! 펑!
마치 1백만 개의 검기가 보호막을 내리치는 것처럼 곳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고 이 소리는 갈수록 격렬해지더니 끝내는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들렸다.
요력의 보호막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을 한제는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호막에 줄기줄기 균열이 나타났고 결국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보호막은 완전히 무너졌다. 1백만 갈래의 살기는 그 안으로 돌진했고 순간 온 도성 곳곳은 회색 기운으로 가득 들어찼다.
한제 또한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보호막을 잃은 도성 중심의 요곡에서는 폭발하는 듯한 요기가 뿜어져 나와 허공에서 보라색 안개를 이루었다. 이 안개는 꿈틀거리며 요동치다가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린 거대한 고요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깊고 심오한 눈으로 마치 벌레를 보듯 한제를 내려다보았다.
“비천한 수련자로군. 배이라의 보호를 받고 있다 해도 내 요력의 보호막을 망가뜨린 이상 널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 것이다.”
고요의 목소리는 마치 아주 깊은 심원에서 울려 퍼지는 듯 종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고요가 손을 뻗자 온 세상의 기세가 변하더니 지면 곳곳에서는 용암이 끓어올랐고 이에 하늘마저도 타오르는 듯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펑펑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분출되었고 그 열기는 하나하나의 허상을 이루었다. 눈 깜짝할 사이 1백 개의 허상이 나타났다.
한제가 오른손을 들자 1백만 개의 살육의 기운은 하나둘 그의 몸으로 녹아들더니 곧 1백만 개의 중첩된 생의 낙인이 온몸을 뒤덮었다.
뒤이어 한제는 저물대를 두드렸다. 그러자 마갑이 검은 선이 되어 주위를 맴돌다가 그의 몸을 감싸더니 검은 갑옷이 되었다. 얼굴도 투구에 가려져 서늘하게 번득이는 두 눈만 드러났다.
한제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몸을 훌쩍 날렸다.
고요 앞에 나타난 허상들은 포효를 내지르며 각종 신통력을 발휘해 한제를 저지하려 했다. 허나 한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은 마갑의 마기에 막혔고 혹여 그러지 못한 것들은 생의 낙인에 저지당했다.
한제는 하늘에서 보라색 안개로 나타난 거대한 고요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요는 비웃음이 담긴 눈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고마 좌하 산마의 갑옷이라… 허나 네게는 마심(魔心)이 없다. 그런 네게 그 갑옷은 사치다.”
그 말을 끝으로 고요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고 그 소리는 파문이 되어 짙은 요기를 품은 채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고요의 비웃음을 무시한 채 손가락을 하나 펼치며 가볍게 외쳤다.
“화마!”
그 순간, 한제의 몸을 두른 마갑에서 환호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많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 마기들은 빠른 속도로 한제의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으로 흡수되었고 체내를 맴돌다가 손가락에 집중되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마갑을 입은 지금, 화마지는 절정의 위력을 발휘했다.
꽝!
마기가 깃든 바람이 폭발과 함께 튀어나가며 고요의 휘파람에서 파생된 파문을 파괴했다.
허나 고요는 여전히 비웃음이 담긴 눈으로 마기의 바람을 쳐다보다가 입을 쩍 벌려 단숨에 삼켰다. 그러더니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으며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다. 순수한 마기로구나!”
그때 이미 그와 고요의 거리는 1천 척 정도였다. 한제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자 순식간에 1백 척의 거리가 줄었다.
순간, 고요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더니 얼른 몸을 움직였다. 그의 거대한 몸 안에서는 순간 거대한 요기가 폭발하듯 발산되었는데 그 안에는 고요의 신식이 배어 있어 반경 1천 척 범위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펑! 펑!
한제의 몸 곳곳에서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마갑의 마기는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다.
허나 한제는 날카로운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황천!”
그러자 그 압박 속에서 한 줄기 황천이 나타나 한제의 발아래로 흘렀고 뒤이어 그의 사방을 맴돌며 윤회의 힘을 사방으로 확산시켰다.
한제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또 한 번 1백 척을 다가갔다.
“흥! 잔재주를 피울 셈이냐?”
고요는 차게 코웃음을 치며 오른손을 살짝 뻗어 한제를 잡아채려 했다. 그의 손에서는 짙은 요기가 피어올라 마갑을 검은 선으로 흩어버렸다. 흩어진 마갑은 한제의 체내로 숨어들었다. 한제의 몸을 두른 1백만 개의 생의 낙인은 눈부신 빛을 번득였다.
“하앗!”
한제는 낮은 기합을 넣으며 몸을 날려 고요의 오른손과 충돌했다.
펑!
하늘과 땅을 뒤흔들 듯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고요의 손은 뒤로 튕겨 나갔고 한제의 몸을 둘렀던 1백만 개의 생의 낙인 중 7할 이상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 생의 낙인들은 곧바로 다시 응집되었다.
한제는 다시 한 걸음 나서 1백 척 앞으로 나아갔다.
고요의 눈에 깃든 비웃음이 차차 사라지더니 서늘한 살기가 들어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제를 그저 잠시 동안의 놀이 상대로 여겼지만 점차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배이라가 저자를 보낸데는 분명 의도한 바가 있을 터!’
고요의 신통력은 소모가 커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기 도륙!”
고요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자 회오리 형태의 요력들이 그의 체내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동시에 용암이 들끓는 대지에서 열기가 솟아올랐고 그 열기는 고요의 앞에서 응집되어 눈 깜짝할 사이 거대한 창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에 짙은 요기를 발산함과 동시에 작열하는 듯한 기운을 품은 창이었다.
그 창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끔찍한 위기감이 한제의 심신을 둘러쌌다. 한제는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1백 척의 거리를 뛰어넘는 동시에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린 후 앞을 가리켰다.
그 순간, 1백만 개의 생의 낙인이 미간에서 튀어나와 끊임없이 한데 모여들더니 결국 하나로 합쳐졌다. 이 한 줄기의 살육에 담긴 살기는 천운자 등이 본다 해도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한제는 다시 한 번 몸을 훌쩍 날려 고요로부터 5백 척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한제의 두 눈은 밝게 빛났고 그의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한제는 왼손으로 고요 배이라가 가르쳐준 결인을 그렸다.
그가 배이라와 한 약속의 첫 번째 단계는 요력의 방어막을 깨부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단계는 고요로부터 5백 척 안으로 진입하여 배이라가 알려준 결인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에 성공하면 약속의 절반을 달성한 것과 같았다.
허나 한제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전쟁이 발발한 것 역시 화요군 도성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한제가 고요로부터 5백 척 거리까지 들어설 가능성이 생긴다.
왼손으로 결인을 그린 그 순간, 한제의 온몸에서 혈기가 끓어오르며 한 움큼의 선혈이 분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제의 몸 곳곳에서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 한제는 마치 피 안개로 흩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
순간, 고요의 얼굴이 처음으로 크게 변했다. 그는 한제 앞에 나타난 피 안개를 바라보면서 신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피 안개 안에 고신의 기운이⋯⋯ 그랬던 거로군⋯⋯.”
회색 인영
피 안개는 모습을 드러낸 뒤 곧장 서로 응집되더니 이내 피로 이루어진 사람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격렬한 신식이 하늘에서 내려와 혈인(血人)의 몸에 떨어졌다. 그러자 혈인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화요군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돌연 어떤 망설임 같은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망설임의 원인을 알고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두려움에 몸을 떨기까지 했다.
나머지 일곱 군 고요의 잔혼들도 안색이 변했다. 그들의 눈빛은 분분히 화요군 쪽으로 향했다.
“운이 좋았구나. 고신의 기운을 가진 수련자를 찾아내 그 피에 네 신식을 연결시키다니. 덕분에 어디에 있든 오랜 시간 혈인의 형태로 천요군의 제한에서 벗어날 수 있지.”
화요군의 고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우린 이미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갈라져 있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하나씩 소멸되고 말 거야. 너와 나의 융합은 새로운 고요의 삶을 연장시킬 것이다. 나머지 일곱 고요도 내가 하나씩 흡수할 것이다.”
혈인에게서 배이라의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혈인은 고요를 향해 돌진했다. 짙은 요기가 그의 몸에서 피어올라 하늘을 뒤덮을 듯한 화염이 되더니 혈인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 안을 제대로 들여다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한편, 한제는 전신의 혈액 중 절반이 뽑힌 상태라 지금 매우 약해져 있었다. 한데 그때, 고요가 들고 있던 긴 창이 한제를 향해 공격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