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10
그런 과감한 결정은 아무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운자 역시 한제가 고요의 유산을 느끼는 와중 살육 선결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터였다.
“천운자 당신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면 나 역시 당신을 속이지 않을 거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한제의 목소리는 더없이 싸늘했다.
“살육 선결의 신통함은 분명 놀랄 만해. 허나 천운자 당신이 지독히도 악랄한 자라는 건 변치 않지. 내 깨달음에 한계가 있어 살육의 기운을 1백만 개 얻어내는 데 그쳤으니 망정이지, 만약 1천만 개의 살육의 기운을 만들어냈더라면 진정한 살육의 기운으로 변해 당신에게 흡수됐겠지!”
한제의 눈빛과 목소리는 점점 차갑게 변해갔다.
“당시 그 회색 옷의 천운자는 내 경지가 생사윤회의 경지였기 때문에 살육 선결을 전수받았다고 했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수백 년 전 내가 화신기에 이르렀을 때 천운자는 내 생사윤회의 경지를 보았고 그래서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
한제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나이술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물론 억측일 수도 있다. 천운자가 내 재주를 알아준 것은 분명히 감사한 일. 당초 살육 선결을 선택한 것도 내 결정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그런 선택을 하도록 그가 수를 쓴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야겠군. 어쨌든 내가 천운자와 맞서 이길 수 있을 때까지는 자중해야겠어. 그리고 이 살육 선결만큼은 자세히 연구해볼 필요가 있겠어.”
한제는 며칠 만에 화요군 밖에 자리한 조석의 심연 출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한제는 거기에 강력한 진이나 봉인 대신 간단한 금제 몇 개만 숨겨두었다.
이 금제에 공격력은 없었지만 흔적을 남기는 효능이 있었다. 때문에 누군가 이 출구를 통해 나간다면 수준이 매우 높은 자가 아닌 이상 한제에게 발각될 것이다.
작업을 마친 한제는 수요군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곳의 입구를 통해 들어가서 신식을 펼치고 온힘을 다해 주일을 찾을 생각이었다. 주일이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한제는 꼭 그를 구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동해 요령의 땅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자신의 비검인 금부를 봤던 것을 떠올리며, 한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금부도 찾아야 한다.”
수요군 서부의 운해의 땅. 언제나 안개로 휩싸여 있는 이곳의 깊숙한 곳에는 끝도 모르게 이어진 땅 속의 균열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조석의 심연으로 이어지는 통로 중 하나였다.
두 남자와 두 여자로 이루어진 네 명의 수련자가 이 운해 위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머리를 틀어 올리고 양쪽 귀밑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있었다. 미간을 몇 개의 수정으로 장식한 그녀의 눈은 초승달 같은 눈썹 아래의 밝은 별처럼 빛났고 갸름한 얼굴은 옥처럼 하얬다. 절세미녀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성숙해 보이는 눈빛과 달리 이제 갓 스물 남짓 되어 보였으나, 수련자들은 본래 외모만으로는 실제 나이를 알 수 없으니 그녀의 나이도 짐작키 어려웠다.
긴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린 다른 여인은 비교적 평범한 외모였는데 몸이 낭창하여 무척 연약해 보였다. 분홍색 옷을 입어 창백한 얼굴이 더욱 도드라졌다.
“사매들, 이곳은 수요군 운해의 땅이라네. 당시 내가 무의식중에 발견했다가 푹 빠져서 돌아갈 시간조차 잊게 된 곳이지. 난 선계에는 가본 적이 없으나 이 운해의 땅은 분명 선계보다 훨씬 아름다울 거라고 믿네. 모용 형,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두 여인 곁에 선 붉은 옷차림의 청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청년은 외모가 매우 준수했고 높은 집안 자제인 듯 약간의 고고한 느낌도 풍겨났다.
“훌륭하군!”
곁에 선 또 다른 남자가 냉랭하게 답했다. 검은 옷이 그의 얼굴에 걸린 냉혹함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두 눈을 감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붉은 옷의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상대의 간단한 소통방식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두 사형이 이곳에 푹 빠져 돌아갈 것을 잊은 것이 혹시 이 구름안개 때문인가요?”
아름다운 여인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 사매, 난 이 운해의 땅에서 지면에 갈라진 틈을 하나 발견했다네. 이곳은 어쩌면 전설로만 전해지는 조석의 심연인지도 몰라.”
붉은 옷의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조 씨 여인이 눈을 빛내며 뭔가 말을 하려던 그때, 돌연 한쪽에서 내내 눈을 감고 있던 검은 옷의 청년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강하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먼 하늘 끄트머리에서 한 줄기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빛에는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있었는데 외모도 평범했고 어떠한 출중한 기색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허공에 선 그는 네 사람을 본 척도 않고 냉랭한 눈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을 바라보다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저자는…?”
붉은 옷의 사내는 상대를 알아보고 놀랐고 그 수준이 벌써 문정기에 이르렀음을 알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사제, 잠시만!”
하얀 옷의 청년은 한제였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일행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의 시선이 꽂힌 것은 두 여인도 붉은 옷의 청년도 아닌 검은 옷의 청년이었다.
‘1천 리 밖에서도 날 발견하다니, 수준이 보통이 아니군. 체내에 선원(仙元)의 힘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문정기 초기인 모양이야!’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살핀 뒤 마지막으로 붉은 옷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익숙한 그는 천운자의 적계 소속 제자였다.
그들 중 검은 옷의 청년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모두 영변기 후기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적계의 청년은 이미 거의 문정기에 이른 듯했다. 원하기만 한다면 곧장 문정기에 진입할 수 있을 텐데 아마도 문정기에 이르는 순간 맞닥뜨리게 될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는 것이 두려워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이 사제, 나는 두건이라 하네.”
붉은 옷의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한제가 자신의 이름을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리 이름부터 알린 것이다.
“두 사형을 뵙습니다.”
한제가 포권을 하며 답했다.
두건은 웃으며 검은 옷의 청년을 가리켰다.
“이 사제, 이 친구는 묵문(墨門)의 모용탁이고 여기 두 분은 부운파(浮雲派)의 도우들이야.”
검은 옷의 사내, 모용탁은 가볍게 포권을 했다.
“이 도우, 난 묵문의 4대 제자 모용탁이라 하네!”
그 순간, 두건과 두 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용탁이 이토록 길게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중에 문정기 중기 수준의 수련자를 마주쳤을 때조차 모용탁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방금 그의 목소리나 말투에는 은근한 존경심이 담겨 있기까지 했다.
조 씨 여인은 아름다운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 사형, 소첩 조의훤이라 하고 이쪽은 제 사매 서희라 합니다.”
“서희⋯⋯.”
그 이름에 한제는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한제가 바라보자 그 가냘파 보이는 여인은 몸을 살짝 숙이며 말했다.
“서희, 이 사형을 뵙습니다.”
두건은 한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혹시 서 사매를 아는가?”
한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릅니다. 그저… 어렸을 적 동무와 이름이 같군요.”
두건은 빙그레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이 사제, 여기까지 온 것은 조석의 심연에 가기 위함인가?”
그는 숨기거나 에둘러 말할 생각은 아예 없다는 듯 직설적으로 물었다.
한제 또한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두건은 굳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 사제, 조석의 심연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네. 문정기 수준이라 해도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지. 우리 네 사람 역시 조석의 심연에 들어갈 생각이니 함께하는 것이 어떻겠나?”
한제는 잠시 고민했다.
그는 배이라가 준 수정을 통해 조석의 심연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고 자신의 수준으로는 솔직히 돌파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던 차였다.
만약 일행에 모용탁이 없었다면 곧장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용탁은 문정기 초기 수준일지라도 1천 리 밖에서 한제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만큼 신통력이 뛰어난 자인 듯했다.
이에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편이 좋겠습니다.”
촌뜨기
두건은 마주 웃었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한제가 짧은 시간에 문정기 수준에 이른 것을 보면서 속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한제는 영변기 중기 수련자에 불과했다. 한데 단 1백 년 만에 한제는 문정기 초기에 이르러 있었다. 게다가 문정기에 이른 것이 벌써 한참 전인 듯했다.
‘폐허가 된 수련성에서 온 촌뜨기가 이렇게 빨리 성장하다니… 아무튼 이 녀석이 계속 발전해나간다면 4백 년 뒤 이곳에서 나갈 때면 더욱 높은 수준에 이를 것이고 그럼 자계에서의 지위도 높아지겠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막상 두건의 얼굴은 한없이 온화했다.
허나 한제는 주작성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본 경험이 있었고 그 덕분에 눈썰미가 뛰어나고 눈치가 빨랐다. 한제는 두건이 생각하는 촌뜨기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약삭빠른 사람이었다.
다섯 명이 된 일행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곧장 운해의 땅으로 향했다.
그곳은 구름이 산과 바다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조의훤은 뒤에서 수시로 한제를 살폈으나 어떤 사람인지 좀처럼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 요령의 땅에 존재하는 요수들의 마음까지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그녀가 지난 1백 년 동안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한 명하고도 반 명뿐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파악하지 못한 상대는 대나검종의 진룡이었다. 그는 한 덩어리의 안개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자 그 안개가 날카로운 검으로 변해 그녀의 투시를 저지했다.
조의훤은 이어서 나머지 반 명인 모용탁의 뒷모습을 한 번 훑었다.
진룡과 달리 모용탁은 안개에 감싸인 느낌 없이 투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따금 썩은 물처럼 변화하여 시선을 가렸고 그럴 때마다 조의훤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 조의훤의 눈에 가장 기이하게 보인 것은 한제였다. 그는 진룡과 같이 안개로 보이지도 않았고 모용탁처럼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았지만 그저 스스로의 자제력으로 온 심신을 걸어 잠근 상태였다. 즉, 안개나 환술 없이 그저 심신의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그때, 한제가 불쑥 고개를 돌려 조의훤을 슬쩍 살피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눈길로 한제는 조의훤의 심중을 꿰뚫을 수 있었다.
‘경고인가? 재미있는 자로군. 진룡은 내가 강한 신통력을 발휘했을 때에서야 나를 알아차렸고 모용탁은 그간의 흔적을 통해 내 신통력을 파악했는데⋯⋯ 그런데 저자는 내 눈빛 한 번에 알아차렸어.’
조의훤은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