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12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손바닥은 날벌레들과 그 안에 감싸인 두건까지 그대로 관통하여 두건 뒤쪽의 고랑 벽에 찍혔다.
이 뜻밖의 광경에 모용탁은 드물게도 흠칫 놀라며 날벌레들을 바라보았다. 조의훤 역시 심오한 눈으로 그 날벌레들을 바라보았고 서희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으나 한제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눈빛을 바꾸었다.
이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한제는 모용탁의 신통력이 그 벌레들에게 먹히지 않는 것을 보며 눈을 번득였다.
모용탁은 앞으로 한 발 나아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는 연이어 몇 가지 신통력을 발휘했으나, 그 어떤 공격도 벌레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사각사각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두건의 몸을 두른 일곱 빛깔 광채는 빠르게 어두워져갔다.
그 순간, 두건의 머릿속에 번개가 스치듯 번쩍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돌연 한제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이한제! 난 스승님의 비밀을 몇 가지 알고 있다. 날 구해준다면 다 알려주지!”
그 무렵, 한제는 두건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날벌레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날벌레들은 너무나도 기이했기 때문이다.
“저 벌레들이 두 사형을 다 뜯어먹으면 다음은 우리 차례일 거예요. 지금이 떠날 기회예요!”
조의훤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데 바로 그때, 두건의 몸을 두른 일곱 빛깔 광채가 돌연 무너져 내렸다. 두건은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 구명 기회를 바로 써버렸다. 옥패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재로 변해 흩어졌다.
하지만 사각사각 하는 소리는 마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계속 울려 퍼졌고 이에 두건은 점점 조급해졌다.
“난 허은의 비밀도 알고 있다. 그가 왜 스승님을 배반했는지도! 구해준다면 다 말해주겠다.”
두건은 이를 악물며 그가 알고 있는 가장 큰 비밀을 꺼내놓았다.
한제는 평온한 눈길로 두건을 힐긋 살폈다. 그러더니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눈부신 금색 빛이 한 줄기 튀어나왔다. 신선의 별채로 가는 길에 발견했던 열한 개의 금빛 문양 중 하나였다.
태양처럼 눈부신 금빛에 어둠은 순간 밀려났다. 그러자 두건을 포위했던 날벌레들이 격렬하게 웅웅 소리를 내며 방향을 틀더니 금빛 문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지자 눈을 번득였다. 이 날벌레들은 빛에 굉장히 민감했다. 녀석들은 아무래도 빛을 먹는 것 같았다.
한제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저물대를 두드려 수정처럼 반짝이는 붓을 꺼내 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이 쇄신필을 사용할 기회가 왔군.’
한제는 붓을 휘둘러 몇 개의 문양을 더 그려냈고 그러자 벌레들은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하나하나의 문양을 에워싼 채 정신없이 그 금빛을 뜯어먹었다.
한제는 붓을 멈추지 않고 놀려 하나하나의 문양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날벌레들의 수는 사실 수백 정도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 다만 녀석들의 크기가 손가락만 한데다가 요란하게 변하는 색 때문에 실제보다 더 많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들은 열 개가 넘는 문양을 에워싼 채 그 빛을 흡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광경에 일행들은 모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의훤과 서희는 거의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한편, 한제 역시 그녀들의 그런 표정에 내심 놀랐다. 마침내 이 두 여인에게서 왜 그렇게 이상한 느낌을 받아왔는지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한제는 순식간에 두건의 곁에 이르더니 그를 꽉 움켜쥐었다.
두건은 천운자의 제자인데다가 적계의 일곱째로 문정기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의 신통력은 분명 놀라운 데가 있었다.
한제에게 붙잡힐 위기의 순간, 그는 혀끝을 깨물어 원신의 정혈을 한 움큼 토해냈다. 그 피는 공중에서 끓어오르는 듯하며 곡식의 씨앗 형태가 되었다. 그것이 몸에 떨어진다면 제아무리 한제라도 깊은 구멍이 뚫리게 될 터였다.
한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소매를 휘둘러 두건이 뿜어낸 피를 사방으로 흩어버렸다. 원신의 정혈을 이용한 이런 신통력은 거의 모든 수련자가 부릴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자칫하면 원신에 손상이 가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런 수법을 부리기를 꺼렸다.
두건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저물대를 두드려 검은색 혹 덩어리들을 꺼냈다. 이 혹들은 그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제련해낸 것으로 굉장히 악독한 법보였다.
두건은 내심 아까워하는 듯했으나, 이를 악물고 그것을 전부 내던졌다. 그러자 혹 덩어리들은 허공에서 하나하나 폭발했고 썩은 냄새를 풍기며 달려들고 있던 한제에게 떨어졌다.
한제는 전보다 더욱 싸늘해진 눈빛으로 몸을 날리면서 황천을 소환했다.
콰르르!
황천은 사방을 휩쓸며 흩어진 혹 덩어리의 파편들을 모두 씻어냈다.
황천은 본디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불결한 강이었기에 혹 덩어리의 파편들을 씻어버린 뒤에도 황천의 위력은 더욱 증가될 뿐이었다.
두건은 같은 수준의 수련자들 중에는 분명 강자였다. 허나 문정기 수준에 자신만의 도까지 가진 한제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제는 파죽지세로 손을 뻗어 절망적인 눈빛의 두건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곧장 선력을 이용해 그의 원신을 봉인했고 원신과 육신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뒤이어 저물대에서 금번을 꺼내 수많은 금제로 두건을 감싼 후 요석설을 가둔 것과 같은 금제의 구체를 만들었다. 두건을 감싼 금제의 구체는 한제의 저물대로 들어갔다.
한제는 몸을 돌리며 붓을 휘둘렀다. 그 무렵, 그가 아까 그렸던 금빛 문양들이 날아와 한제의 몸을 맴돌았고 그 빛을 둘러싼 날벌레들은 오직 금빛을 흡수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허나 이 문양의 금빛은 무궁무진하여 벌레들이 아무리 흡수를 해도 줄어들거나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한제는 왼손 검지를 들었다. 그러자 적멸지의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좀 전에 모용탁이 발휘했던 신통력과 마찬가지로 적멸지의 위력은 날벌레들에게 어떤 효력도 미치지 못했다.
“도우들, 계속 가세!”
한제는 벌레들이 둘러싼 채 갉아먹는 문양과 함께 몸을 날려 가장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그 뒤를 모용탁이 따랐고 조의훤과 서희는 어째서인지 한제와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가장 뒤에서 따라붙었다.
한제는 세상에 신통력을 무시하는 마수가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자신의 신통력이 너무 약해 그 벌레들을 처리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이를 확인해보고자 한제는 손에 능천후의 검기를 한 자락 응집시킨 뒤 한 마리의 벌레를 살짝 건드려보았다. 벌레는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한제는 두 가지 의미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그 모든 신통력을 무시하던 벌레가 이제 자신에게 단 하나 남은, 그것도 1백 분의 1도 안 되는 한 자락을 끌어다 쓰는 것이 전부인 능천후의 검기에 반응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레가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어찌됐건, 신통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존재는 세상에 없다는 그의 생각이 어느 정도 옳다는 것은 증명된 셈이었다.
한제가 수정을 통해 살폈던 몇몇 어려운 구간들이 나타날 때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모용탁의 도움을 받아 차분히 돌파해 나갔다. 조의훤과 서희 또한 제법 도움이 됐다. 특히 조의훤은 상당히 특이한 신통력으로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위력을 품은 공격을 하곤 했다.
그에 비하면 서희의 힘은 약해 보였으나, 한제는 줄곧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를 지켜볼수록 그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져갔다.
‘이곳에서 그 문파의 사람을 보게 될 줄이야⋯⋯.’
허나 한제는 시선을 거두었고 더는 두 여인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들이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자신도 두 여인의 비밀을 굳이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모용탁의 난잡하고 무질서한 신통력은 한제가 난생 처음 보는 것으로 그조차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만약 자신이 모용탁과 법보 없이 맞붙는다면 아마도 큰 부상을 감내해야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상대에게도 상당한 법보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가 선계 사람임을 자처했던 노인처럼 뛰어난 도주술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추격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 노인의 원신은 존혼번에 넣어두었지. 주일 선배를 구하고 이 조석의 심연에서 해야 할 일을 끝내면 그 노인의 신통술을 수련해야겠어!’
그 뒤로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후, 마침내 한제는 원하는 곳에 도달했다. 그러자 마음이 약간 벅차올랐지만 애써 그런 감상을 억눌렀다. 이제부터 나아가야 할 곳은 배이라가 준 수정으로도 제대로 살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제의 목표는 제법 가까워진 상태였다.
배이라가 느낀 주일의 본체가 있는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배이라의 능력으로도 정확한 장소까지는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봉인된 곳
“모용 형, 내게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 더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네.”
한제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러더니 잠시 고민하던 끝에 말을 이었다.
“모용 형을 알게 되어 난 정말 기쁘다네.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괘념치 말고 말하게!”
한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우정이 깊은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둘 사이에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모용탁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나서야 할 때에는 망설이지 않았고 눈앞의 법보에 대해서도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모용탁 또한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볍게 포권을 한 후에 말없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모용탁을 향해 신식으로 목소리를 전했다.
“조의훤과 서희 두 여인을 조심하게.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두 사람은 시음종 사람이야. 둘 중 한 명은 분명 원신이 깃든 시체일 걸세!”
모용탁은 조의훤과 서희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한제가 신식으로 전한 말을 듣지 못하기라도 한 듯 그저 깊은 곳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번득였다.
시음종에 대해서는 그 역시 들어본 적이 있었다. 거의 모든 수련성에 그 분파가 존재할 정도로 그 세력이 어지간한 수련국보다도 훨씬 강대하다고 했다.
조의훤과 서희는 한제에게 작별을 고한 뒤 모용탁의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 서희는 고개를 숙이며 오른손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옆쪽의 고랑 벽에 머리카락 한 가닥을 은밀히 떨어뜨렸다.
세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한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멀리 떨어진 고랑 벽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서희가 떨어뜨린 머리카락이 그의 두 손가락 사이에 들어왔다.
“흥! 경고가 부족했던 모양이군.”
한제는 차게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머리카락은 녹색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고 그 머리카락에 어려 있던 한 줄기 신식이 실체화되기 시작했다. 한제는 그것이 완전히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입을 벌려 원신의 기운을 분출했다. 그러자 실체화되어가던 신식은 곧장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조석의 심연 아래쪽으로 날아가던 서희의 몸이 움찔하더니 그녀의 입가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녀의 눈빛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희의 신식은 매우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한제라 해도 서희를 줄곧 의심하고 있지 않았다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정도였다.
“시음종의 신통력은 언제나 놀랍군. 서희 머리카락에 신식을 숨겨둘 수 있었다면 그녀가 본체고 그녀의 곁에 있던 조의훤이 시체 인형인가?”
한제는 주일이 강압적으로 한제 자신의 종으로 만든 시음종의 원로 손태를 떠올렸다. 그러자 서희의 신분이 짐작될 듯했다.
손태에게는 비록 어리지만 매우 민첩하고 강한 시체 인형을 가지고 있었다. 손태와 그 시체 인형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마치 두 개의 개체로 존재하는 듯했다.
이어서 한제는 사도환을 생각했다. 사도환이 새롭게 차지한 육신이 바로 그 아이의 육신이었다.
“사도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분명 어느 수련성에서 왕처럼 지내고 있겠지.”
사도환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살인광일지 몰라도 한제에게는 친한 벗이자 스승, 나아가 아버지 같은 존재였기에 자연스레 그를 떠올리는 눈빛 역시 따스했다. 마치 어린 시절 아름다웠던 추억에 잠긴 일반인처럼…
“손태는 주작성 시음종의 대장로였지. 허나 거마족 선조의 신통력에 우주로 내던져진 뒤에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됐다.”
한제는 이내 현실로 돌아와 차분히 주위의 깊은 고랑들을 살폈다. 수십 개도 넘는 고랑 어디에서도 주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일일이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주일 선배를 요령의 땅에 봉인한 것은 검존 능천후다. 그러니 능천후의 기운이 어려 있는 고랑을 찾으면 될 거야!”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신식을 펼쳐 사방을 살폈다.
허나 한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모든 고랑들을 살폈는데도 주일은커녕 능천후의 기운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제는 어두워진 얼굴로 저물대에서 고요 배이라의 수정을 꺼내 들고는 그 안에 신식을 집어넣었다. 허나 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을 뿐이다.
“배이라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여기에 주일 선배의 흔적이 있어야 해!”
한제는 고민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