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13
“이런 일로 나를 속여 봐야 배이라에게는 아무런 득이 없어. 나를 해하려 한 것이라면 이런 졸렬한 수단을 쓸 필요도 없으니까. 아니면⋯⋯ 거짓으로 나를 이곳에 끌어들여 다른 자의 손을 빌려 날 죽이려는 건가?”
한제는 고민에 잠긴 채 몇 번이나 신식으로 주위를 다시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런 평범한 곳을 고르진 않았을 텐데⋯⋯.”
한제는 신식을 다시 펼쳤고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욱 신중하고 자세하게 고랑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
한제는 저물대에서 존혼번을 꺼내 흔들었다. 그러자 수천 개의 강력한 혼백들이 그의 통제에 따라 흩어져 각각의 고랑으로 들어갔다.
한제는 두 눈을 감고 그 혼백들을 통해 직접 하나하나의 고랑을 더욱 철저히 살폈다.
2각 후, 수천 개의 혼백들이 되돌아왔을 때, 한제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다.
“어디에도 주일 선배의 기운은 없어! 배이라가 정말 나를 속인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만. 내가 만약 능천후라면 절대 어느 고랑 안에 주일 선배를 봉인해두지는 않았을 거야. 내가 능천후였다면 나라면…?”
잠시 후 한제는 체내에서 맴도는 능천후의 검기에서 능천후의 경지 한 가닥을 뽑아냈다. 그 순간, 한제의 눈에는 난폭한 빛이 나타났다.
능천후의 경지는 패도(覇道)의 경지로 천도에 대항하고 평생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었다.
검기가 체내에서 맴도는 동안 한제의 눈빛에 담긴 패도의 빛은 갈수록 짙어졌다.
“만약 내가 오랫동안 싸워왔던 검령을 봉인한다면⋯⋯ 단순히 봉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 패도에 굴복시키려 했을 거야. 굴하지 않는다면 1천 년을 그럼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1만 년을 봉인하고 그래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 영체(靈體)를 훼손하여 법보로 만들어서라도 굴복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니 뻔히 보이는 고랑에 봉인해 두지는 않았을 터. 나였다면 아마도⋯⋯?”
한제는 더욱 짙어진 패도가 담긴 오만한 눈으로 사방의 고랑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공백까지도 꼼꼼히 살폈다.
잠시 후, 눈에 담긴 패도의 빛이 점점 사라져가면서 이마에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혀 흘렀다. 이윽고 패도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한제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휘청거렸다.
“능천후의 검기에 들어 있는 경지도 굉장히 사납군. 아주 잠시 빌렸을 뿐인데도 내상을 입었어.”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체내의 선력을 맴돌게 한 뒤 저물대에서 선검을 꺼냈다. 굽은 칼도 선검을 따라 나왔다.
한제는 오른손으로 선검을 쥐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몸을 돌렸다. 선검은 격렬한 선기를 발산하며 한제를 중심으로 회오리를 이루었다.
“파(破)!”
한제가 낮게 외쳤다. 돌연 그의 몸이 우뚝 멈추었고 그 순간 선기의 회오리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을 향해 미친 듯이 뻗어나갔다.
쩌적!
검기의 공격에 양쪽 벽에는 균열들이 일더니 결국 1천 척 밖까지 퍼져나갔다.
“열(裂)!”
천둥 같은 한제의 외침이 사방으로 울리자 양쪽 벽에서는 균열을 따라 돌과 진흙 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1천 척의 심연은 한제의 검기에 와르르 진동했다.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다시 선검을 들고 선기를 발산하여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양쪽의 벽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1각 후, 한 줄기 미세한 균열을 통해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로 희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극단의 패도를 품은 기운이었다.
한제는 재빨리 결인을 그려 앞을 가리켰고 선검에 이어 굽은 칼이 곧장 달려 나가 그 균열에 공격을 퍼부었다. 수많은 돌덩이들이 떨어져 내리면서 눈 깜짝할 사이, 30척 아래로 깊이 묻혀 있던 고랑이 나타났다.
크지 않은 고랑의 높이는 5척 정도였고 안은 깜깜했다. 그곳으로 신식을 밀어 넣었더니 강력한 패도에 매섭게 튕겨나왔다.
“큭!”
한제 역시 뒤로 튕겨나가며 맞은편 벽에 등을 부딪쳤다.
쾅!
한제는 심연의 벽 깊이 박힌 채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벽에서 빠져나오는 그의 얼굴을 더욱 창백했고 긴장감이 역력했다. 방금의 충돌로 원신마저 붕괴해버릴 듯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정기에 이르기 전이었다면 방금의 충돌로 원신이 파괴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강하군.”
한제는 패도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균열을 주시했다. 대체 얼마나 깊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일이 그 안에 있으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그 패도는 분명 능천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 깊이 묻어둔 힘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능천후의 수준은 대체…?”
문정기 후기 절정은 수련자에게 있어 첫 번째 단계의 끝을 의미한다. 음양이의의 시기만 넘어가면 수련의 두 번째 단계, 즉 쇄열삼경에 이를 수 있다.
쇄열삼경은 규열, 정열, 쇄열 세 개의 단계로 나뉘어 있으며, 각 단계에는 초기, 중기, 후기, 절정으로 나뉜다. 천운자는 자신이 두 번째 걸음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있었다고 했으니 삼경 중 쇄열 초기 수준 정도일 것이다.
‘천운자와 능천후는 오랜 시간 동안 적수를 이루고 있는 만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을 터이니 정열의 절정 정도가 아닐까?’
천운자나 능천후 등에 비한다면 한제의 수준은 보잘것없었다. 심지어 수련의 첫 번째 단계 절정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허나 그는 수련자의 길에 첫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직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뤄낸 사람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나아온 끝에 결국 문정기에 이르게 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보통의 수련자들 입장에서 문정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한제는 긴장한 얼굴로 미간을 두드렸다. 10만 개의 살육의 기운이 곧장 생의 낙인이 되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정확히는 한 개가 모자란 10만 개였다. 마지막 하나의 살육의 기운은 한제에 의해 추출되어 심신에 섞여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한제는 일격으로 그의 원신에 깃든 마지막 한 줄기 살육의 기운이 파괴되지 않는 한 생의 낙인을 끊임없이 생장시키고 번식시킬 수 있었다.
이어서 그는 저물대에서 마갑을 착용했다.
날벌레로 뒤덮인 금색 문양들도 둥둥 뜬 채 방어막을 이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저물대에서 존혼번을 꺼냈다. 혼번은 펄럭이며 검은 구름이 되어 한제의 몸을 감쌌다. 1억 개의 혼백이 그 구름 안에서 포효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가자!”
한제는 결연한 눈빛으로 능천후의 기운이 느껴지는 틈으로 돌진했다.
선계에서 아주 짧은 만났을 뿐이었으니 주일과 한제의 관계가 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일의 인상은 한제의 영혼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영혼을 태워서라도 사랑하는 여인와 함께 하고자 했던 사내. 그의 치정은 감동적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스스로의 영혼을 태우던 그의 눈은 깊은 밤의 달처럼 맑고 밝았다. 그 순간 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더구나 그는 귀한 문정의 결정을 한제에게 선뜻 내주기까지 했다.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시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위해…
그 후 주일은 우(雨)의 선검의 검령이 됐지만 그 여인의 시체 체내에 그가 남겨놓은 잔혼이 불타 사라지는 바람에 더는 함께할 수 없게 됐다. 그 순간, 주일은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진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죽기 직전에 어떤 생기도 없는 검기를 가진 검령의 몸으로 능천후를 처단하기 위해 추격했다. 그에게 더 이상 삶이란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살아오던 모든 이유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수련계에서 한제가 만난 자의 대부분은 그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사도환, 둔천, 치호, 주일⋯⋯.
당시의 그는 화신기 수준에 불과했다. 주일 앞에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존재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 한제는 문정기에 이른 상태였다.
십삼을 구할 당시의 한제는 그저 요장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주일을 구하기 위해 검존 능천후가 남겨놓은 신식에 맞서려고 하고 있다. 위험할 것을 알더라도 해내야 하는 일들이 있는 법이었다.
주일을 구하라
한제가 균열 안으로 들어선 순간, 능천후의 짙은 패도가 어린 신식이 거칠게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쒜엑!
패도의 신식은 마치 예리한 검처럼 서늘한 날로 한제를 찌르려 했다.
“크오오!”
한제의 몸을 두르고 있던 방어막 중 가장 바깥쪽에 있는 존혼번의 검은 막이 격렬하게 포효했고 1억 개의 혼백이 응집되어 하나의 혼번이 되더니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능천후의 신식은 너무나도 강했다. 그 날선 신식은 1억 개의 혼백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을 그대로 관통하고는 그대로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좋다, 오너라!”
한제의 눈에 결연한 빛이 어렸다. 그는 이대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다시는 주일을 구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제는 다시금 결연한 눈빛을 번득이며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그 순간, 예리한 검이 된 능천후의 신식이 더욱 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다시 날아들었다.
쉭!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한제는 두 말 않고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주위를 맴돌고 있던 금색 문양이 그의 몸에 응집됐다. 그리고 검광이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한제의 몸에 떨어진 순간, 금빛 문양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날벌레들에게서 하얀 빛이 흘러나와 한제의 몸을 맴돌았다.
붙어 있던 날벌레 중 반 이상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가 싶더니 금빛 문양에서 떨어져 내렸다.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그 벌레들을 저물대 안에 집어넣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금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그 한 걸음 나아간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신식이 천둥번개와 같은 기세로 달려들었다. 무수히 많은 메아리가 한데 응집되면서 분노한 하늘의 위엄과 같은 엄청난 기운을 떨쳤다. 그 힘에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쾅!
순식간에 존혼번의 혼백들을 지나친 능천후의 신식이 마갑에 떨어졌고 마갑에서 피어오르던 마기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큭!”
한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을 느꼈다. 물러나지 않으면 당장 붕괴해 죽어버릴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한제는 이를 악물고 전보다 더욱 결연한 눈빛으로 원신에서 1백 년 동안 낙인을 찍어댄 산마의 혼을 처음으로 꺼냈다.
온몸이 새카맣고 뿔이 달린 마혼이 곧장 한제의 미간에서 튀어나와 천마음이 어린 목소리로 사납게 웃었다. 그러더니 혼탁한 눈으로 단번에 능천후의 신식을 집어삼키려 했다. 그 순간, 마갑에서 강력한 마기가 끓어올라 마혼의 체내로 들어갔고 마혼은 순식간에 실체화되어갔다.
능천후의 신식을 집어삼킨 마혼은 폭발적인 기운을 발산했다.
“크으으!”
신식에 어린 패도의 기운 때문인지 마혼은 낮게 포효했고 뭔가 갈등하는 기색이었다.
그때 마혼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파악한 한제는 원신을 움직여 신식을 마혼의 체내에 주입했다. 동시에 그동안 찍어놓은 낙인으로 마혼을 통제하려 했다. 아직 공고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백 년이나 깊이 새긴 낙인이었다.
낙인의 힘에 의해 마혼의 몸은 한제의 미간으로 흡수됐고 동시에 마갑도 검은 선이 되어 저물대로 들어갔다. 그 사이 한제는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 1백 척의 거리를 뛰어넘었다.
그 순간,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을 안은 세 번째 신식이 튀어나왔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은연중에 능천후의 목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낮게 포효했는데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 같았다.
존혼번은 이에 저항하지 못했고 갑옷도 벗겨진 상태라 한제의 몸에 남은 것은 생의 낙인뿐이었다.
세 번째 신식이 달려든 그 순간, 10만 개의 생의 낙인은 빠른 속도로 1백만 개로 불어나면서 능천후의 신식에 저항했다. 허나 눈 깜짝할 사이에 1백만 개의 생의 낙인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앗!”
얼굴에 푸른 정맥이 울툭불툭 솟아오른 채, 한제는 낮게 기합을 넣으며 저물대에서 사신차를 꺼냈다. 사신차는 전광을 번득이면서 곧장 뇌수로 변했다.
“캬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