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15
한제는 눈앞의 진을 보자마자 자신의 수준으로는 절대 파괴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 진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주일 자신뿐일지도 몰랐다.
한제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고랑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러자 주일은 바르르 떨리는 눈을 힘겹게 떴다.
텅 빈 눈이었다. 공허한 눈에 깃든 것은 오로지 깊은 슬픔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능천후의 신식이 펑 하고 금빛 철창을 뚫고 나와 방향을 틀더니 다시 검기가 되어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작은 한숨 소리가 고랑에 울려 퍼졌다. 주일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그 한숨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능천후의 신식이 곧장 무너져 내렸다. 그러더니 곧장 빛의 공이 되어 땅에 박힌 네 번째 검 위로 떠올랐다.
“가라⋯⋯.”
주일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한제의 원신은 이미 큰 부상을 입은 상태라 육신을 떠나지도 못했다. 그의 원신은 갓난아이만 하게 줄어 있었고 반짝이던 몸도 지금은 혼탁했다.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온 것은 오로지 주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한데 힘겹게 찾아낸 주일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가라’라는 말뿐이었다.
그 순간, 한제의 얼굴에 짙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마음이 이미 죽었군요. 오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습니다.”
한제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려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주일의 은혜는 그가 이 고랑의 균열에 들어온 순간, 그리고 그의 원신 여섯 갈래가 무너져 내린 순간 이미 갚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이 죽었다⋯⋯. 그래, 정아를 떠난 그 순간, 나의 마음은 정말 이미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주일의 공허한 표정과 눈에 깃든 슬픔은 더욱 짙어졌다.
이곳에 봉인된 수백 년 동안 그는 줄곧 이런 상태였다. 고요의 잔혼이 침입했을 때에도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저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만 미간에 자리한 금색 빛에는 정아에 대한 치정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작은 한숨을 내쉰 주일은 이미 보라색으로 물든 오른손을 들어 앞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한 줄기 금색 빛이 튀어나왔다. 이 금색 빛에는 검기가 깃들어 있었는데 그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당시의 능천후 역시 이 검기에 적지 않은 낭패를 본 바가 있다. 이것은 우의 선검의 검령이 갖는 목숨과 연결된 검기인 영기로 주일의 체내에도 99개 갈래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능천후를 뒤쫓았을 때 주일은 그가 가지고 있던 검기 중 반을 써버린 상태였고 이곳에 봉인된 동안 하나씩 사라져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단 네 개 뿐이었다.
검기는 곧장 땅에 꽂힌 네 번째 검 위에 떠 있는 빛의 공으로 돌진하여 그것을 관통했다.
능천후의 신식은 굉장히 강했지만 우의 선검 검령의 검기만큼은 아니었다. 빛의 공은 부서졌고 그 안에 깃들어 있던 능천후의 신식 역시 파괴되어 빛으로 흩어지더니 검기를 따라 마치 은하수처럼 한제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그 순간, 한제 체내의 원신은 급속도로 회복됐다. 심지어 원신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도 빛은 다 흩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남은 빛들은 자동적으로 한제의 원신 안에 들어있는 능천후의 검기로 섞여 들어갔다. 검기는 눈 깜짝할 사이 이전보다 좀 더 맹렬해졌다.
“내 목숨과 연결된 영기를 네게 줄 방도가 없구나. 나로 인해 입은 내상이니 회복을 도와주겠다. 가라. 앞으로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주일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울려 퍼졌다.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저물대에서 주일의 신식이 깃든 보탑을 꺼냈다. 보탑을 잠시 살피던 한제는 이내 그것을 뒤쪽으로 내던졌다.
“당시의 약속은 지켰으니 더는 이 보탑을 지키지 않겠습니다.”
주일은 두 눈을 번쩍 떠 옆에 있는 보탑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슬픔은 이제 하늘을 다 뒤덮을 듯했다.
“정아야⋯⋯.”
한제는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정아가 아닙니다. 제가 잘못 짚은 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이름은 청상입니다.”
주일의 영체가 급격하게 진동했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공허함은 사라지고 그 대신 맹렬한 기세가 들어찼다.
“청상?”
한제는 몸을 돌려 주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청상의 옥패를 내던졌다.
주일은 굳은 얼굴로 옥패를 쥐고는 신식을 주입했고 이내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한참 뒤, 그가 씁쓸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청상이라⋯⋯.”
“선제 청림의 딸이기도 하지요. 청림은 선계의 최강자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선계가 붕괴할 때 빠져나와 요령의 땅 어느 별채에 숨은 채 상처를 치료했다고 합니다.”
한제는 덤덤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주일의 눈에 담긴 맹렬한 기세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더니 그의 체내에서는 한 줄기 생기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몸을 뒤덮은 보라색 빛은 빠른 속도로 맴돌았지만 피어오르는 생기를 막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저⋯⋯ 정아의 아버지가 이곳의 어느 별채에서 상처를 치료했다는 것이냐? 확실한 것이냐?”
한제는 주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직접 본 일은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일의 표정에서 멍한 빛이 차차 사라지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이 일은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다만⋯⋯ 만약 정아의 아버지가 정말 이곳에 있다면 그렇다면 그의 수준으로는 정아를 분명 살려낼 수 있을 터⋯⋯.”
지금의 주일은 그가 말하는 정아는 그가 1천 년 동안이나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의 시체를 보호하면서 생성된 잔혼이라는 사실을 이미 잊은 듯했다. 그리고 그 잔혼은 이미 흩어져 사라져버렸다는 것도⋯⋯.
“정아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데려가겠다.”
주일의 체내에서는 생기가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그의 몸을 뒤덮은 보라색 빛은 끓어오르는 것처럼 용솟음치며 미간의 금색 빛을 삼키려 들었다.
“흩어져!”
주일은 맹렬한 눈빛을 번득이며 외쳤다. 보라색 기운이 요동쳤지만 이내 주일의 몸에서 빠르게 흩어지더니 땅속의 진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주일의 영기
보라색 기운을 흩어버린 주일의 몸이 물결치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그 상태로 한참이나 보탑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탑 안에서 한 줄기 검광이 튀어나왔다.
척 봐도 여인의 것 같은 작고 교묘한 이 검은 우의 선검 중 하나였다.
우의 선검의 검령인 주일은 몸을 훌쩍 날려 한 줄기 빛이 되어 그 작고 교묘한 선검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검기는 곧장 고랑의 균열로 돌진했다.
바로 그때, 진의 동서남북 사방에 둥둥 떠 있던 빛의 공이 곧장 신식의 형태로 날아가 주일이 깃든 선검을 향해 돌진했다.
“흥!”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검에서 흘러나오더니 주일의 영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맹렬하고 난폭한 검기가 휩쓸자 하늘을 뒤흔드는 듯한 소리가 조석의 심연 전역에 울려 퍼졌다.
능천후의 세 덩이 선식은 곧장 무너져 내렸고 주일은 선검에서 튀어나온 검기를 삼켜버렸다. 땅에 박혀 있던 네 자루 원신의 검 그림자 또한 주일의 영기에 휩쓸려 사라졌으며, 진 역시 함께 무너져 내렸다.
주일을 봉인했던 고랑도 삽시간에 붕괴해버렸다.
“능천후,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더라면 넌 애초에 나를 봉인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우의 선검의 검령! 이 세상과 동시에 태어난 존재이자 원고 시대 4대 검기의 계승자다. 그런 나를 감히 봉인하려 했느냐! 지난 세월 내 마음은 죽어 있었으나 이 원고 시대 검기를 계승한 것을 느끼지 않았던 적이 없다. 다시 만나는 날, 진정한 나의 힘을 보여주마!”
선검에 깃든 주일은 고랑이 무너져 내린 순간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한제는 그 뒤를 바짝 따랐다.
밖으로 나온 주일은 선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에 봤을 때와 같은 차림이었으나 그때보다 더 노련한 느낌이 풍겼다. 한 손에는 보탑이 들려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내 한제에게 건넸다.
“잘 가지고 있어라!”
한제는 고개를 끄덕인 뒤 보탑을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주일은 한제를 한 번 훑어본 뒤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겨우 몇 백 년 만에 이렇게 성장하다니, 훌륭하구나!”
한제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선배님이 주신 문정의 결정 덕분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한제는 고개를 저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문정의 결정은 정아를 보호한 데에 대한 보답이니 고마워할 것 없다. 정말로 고마워해야 할 쪽은 나야. 수백 년이 지난 뒤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네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면 다시 만날 날은 없었을 테니까.”
한제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주일은 손을 들어 제지하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당시 이 보탑 안에 두 자루의 선검이 있던 것을 기억하느냐? 나머지 하나는아직 네게 있느냐?”
한제는 저물대에서 허이국이 깃든 선검을 꺼냈다.
허이국은 선검 안에 있었지만 주일의 존재를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영체로 감지력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주일은 모든 검령의 주인과도 같은 자였으므로 허이국은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심지어 주일이 자신이 깃들어 있는 이 선검의 진정한 검령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자신은 그저 남의 집을 차지하고 있는 뻐꾸기 같은 존재였다.
“음?”
주일은 그 선검을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허이국이 선검에서 빠져나와 얼른 아첨하듯 고개를 숙였다. 한제에게보다도 더욱 공손한 모습이었다.
“선배님, 저는 허이국이라 합니다. 제 주인님께서 저를 이곳에 넣어주신 것이지 제가 이 검에 들어가고 싶다고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에 한제는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가볍게 허이국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허이국은 움츠러들었으나, 주일은 가볍게 웃었다.
“이한제, 나의 신통력을 너에게는 줄 수 없지만 이 영체라면 괜찮을 것이다. 난 이 녀석이 원고 시대의 검기를 느끼게 해 생장을 촉진하고 심지어는 네 선검을 완벽히 통제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이국은 멍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선배님, 원고 시대의 검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은 대답 다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느껴보면 알 것이다.”
말을 마치 주일은 오른손을 움켜쥐어 허이국을 붙잡았다. 이어서 한 줄기 반짝이는 빛이 주일의 두 눈에서 나오더니 허이국의 눈으로 들어갔다.
“히익!”
허이국은 화들짝 놀라더니 눈을 번득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순간, 그는 수많은 복잡한 정보들이 허공에서 직접 자신의 체내로 들어오는 것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고 심지어는 마혼이 아니라 원영기 수련자였던 당시의 원영이 몸에서 떠나가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그는 점점 그 안에서 사라져갔다.
주일이 손에서 힘을 빼자 눈에서 쏘아내던 밝은 빛도 흩어졌다.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자신의 유산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영체에 상당한 해가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구해줬으니 자신은 한제의 검령이 될 수도 있었다.
“이 검령은 태생적으로 반골의 기질이 강하니 앞으로 조심히 통제해야 할 것이다. 허나 크게 신경 쓸 것은 없다. 내가 이 녀석에게 유산을 전수할 때 낙인을 남겨뒀으니까. 만약 이 녀석이 앞으로 너를 배반한다면 그 유산이 이 녀석을 집어삼킬 것이다.”
한제는 피곤해 보이는 주일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포권을 하며 조용히 말했다.
“선배님,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