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19
“존재를 숨기고 안개 속에 숨어 계십시오. 제가 들어가 저들을 만나보겠습니다.”
“혼자서 들어가려면 조심해야 할 것이다.”
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부터 한제가 하는 말의 무게가 그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탐랑은 방금 그냥 소리를 쳤을 뿐 쫓아오지도 공격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두려워하고 있거나 의심이 많은 것이겠지요.”
주일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한제의 명석함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제가 생각하기에 저 탐랑의 목적은 영패가 아닐까 합니다. 그 영패는 청상 선배의 아버지를 찾아갈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주일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 말거라!”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번 포권을 한 뒤 안개 속으로 나아갔다.
사실 그와 주일이 계속해서 안개 속에 숨은 채 주일의 신식으로 안쪽을 살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탐랑에게 발각되었으니 멀리서 살피는 것보다는 직접 상황을 파악하는 편이 더 나았다.
한제가 직접 가보려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탐랑이 자신을 알아보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제는 자신이 이전에 그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제는 안개 속에서 신식을 펼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안개로 막혀 있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제는 그 안의 공터에 이르렀다.
한제가 나타난 순간, 여섯 쌍의 눈빛이 그에게 집중됐다.
“넌⋯⋯ 이한제?”
단번에 한제의 정체를 알아차린 대나검종 제자들은 서슬 퍼런 살기를 피워 올렸다. 대나검종과 천운종은 앙숙이라 마주치면 별다른 이유 없이도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들을 한 번 훑어보았고 탐랑에게 시선이 이르렀을 때에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탐랑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저 한제가 나타났을 때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을 뿐이었다.
“난 진룡이다. 너는 천운종 자계의 이한제 아닌가?”
낮은 목소리가 진룡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제는 말없이 진룡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나검종 제자들이 원해서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갇혀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만약 그들이 원해서 남아 있는 것이라면 그의 추측이 틀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무엄하다. 대사형이 묻는데 답도 않다니!”
옆에 있던 대나검종 제자가 소리를 질렀다.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탓인지 무척 초조해 보이는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등에 있던 검을 뽑았다.
“멈춰라, 오마!”
진룡이 진중한 목소리로 제지했으나, 그의 사제인 오마는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기가 튀어나오더니 붉은 눈을 번득이는 검은 말의 허상으로 변했다.
말의 허상이 뿜어낸 푸른 콧김에는 사악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 콧김은 검기와 함께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의 수준은 영변기 후기 절정에 불과했지만 본인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곁에는 동문도 많았고 대사형도 있으니 자신이 불리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다.
“대나검종은 손님 접대가 형편없군!”
한제는 검기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시선을 진룡에게 고정시켰다. 그는 이미 대나검종 제자들이 이곳에 억지로 갇혀 있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토록 초조해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때 진룡이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동시에 한제가 움직였다. 그의 미간에서 번쩍 튀어나온 생의 낙인이 보호막을 이루어 달려들던 검기를 막아냈다.
쾅!
폭발음 속에서 한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보호막을 이루었던 생의 낙인 중 일부가 갈라져 나와 허공에서 살육의 기운이 되어 포악하게 사방으로 퍼지더니 각각이 한 마리 창룡처럼 사방을 맴돌며 오마를 감쌌다.
보라색 안개의 합체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데다가 알 수 없는 기운에 포위된 오마는 분노하며 재차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한데 그때, 진룡이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물러나라!”
앞으로 나선 진룡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린 채 살육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우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더니 살육의 기운에 속박된 오마를 걷어차 밖으로 내보냈다. 이어서 몸을 돌리더니 자신의 몸에 둘러진 살육의 기운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한제를 향해 포권을 했다.
“이 도우, 내 사제가 무례를 저질렀군. 이해하게.”
“괜찮네!”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진룡을 포위했던 살육의 기운은 방향을 틀어 오마의 보검을 감싸더니 한제에게로 돌아왔다. 한제는 대나검종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오마의 검에 깃든 신식을 제거하더니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크윽! 쿨럭!”
오마는 보검에 걸려 있던 신식이 지워진 순간, 한 움큼 피를 토해내더니 한제를 노려보았다.
“날 건드렸으면 책임을 져야지. 진룡 도우의 사제이니 목숨만은 살려주겠으나,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한제는 오마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한제를 보며 진룡은 빙그레 웃었다.
“옳은 말이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냉랭한 눈으로 오마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저리 가거라. 이 도우는 네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한 번만 더 경거망동한다면 스승님을 대신하여 내가 직접 네 수준을 폐할 것이다.”
오마는 진룡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에 더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이를 지켜보던 한제의 마음에 경계심이 깊어졌다. 자신의 사제를 공격하고 보검까지 빼앗았지만 진룡은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가 얼마나 생각이 깊은지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또한 이 순간, 한제의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진룡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바로 그때, 탐랑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한제에게 말했다.
“함께 온 친구는 어디 있느냐?”
탐랑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안개 속에서 느껴지는 어렴풋하지만 강력한 검기만 아니었다면 그는 한제가 나타난 순간 곧장 공격했을 것이다.
사실 좀 전에도 그는 내내 눈을 감고 있긴 했지만 체내의 신통력을 세 번이나 조종하고 있었다. 허나 매번 준비했던 신통력을 발휘하려 할 때마다 안개 속에서 느껴지는 매서운 신식이 마치 경고를 보내오는 듯해 감히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망설이던 탐랑은 결국 공격을 포기했다.
한편, 한제는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말했다.
“성격이 특이한 친구라 시끌벅적한 것을 싫어합니다. 선배님께서도 대나검종 분이십니까?”
한제의 물음에 탐랑은 대답 대신 냉소했다. 대답은 진룡에게서 나왔다.
“이 형, 이 선배님은 탐랑. 자네와 나의 스승님과 같은 연배의 선배님이시네. 만약 선배님이 부상 때문에 문정기 후기 절정의 수준에 국한된 상태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곳에서 1백 년 동안 갇혀 있을 일도 없었을 거야!”
‘진룡 저자 정말로 범상치 않군!’
한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룡은 한 번의 말로 탐랑의 대답을 막는 동시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까지 은근히 녹여낸 것이다.
“탐랑 선배님, 천운종의 이 도우와 그의 친구까지 이곳에 왔다니 힘을 합쳐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그 마수들을 처리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진룡이 말을 이었다.
“마수들이라⋯⋯.”
한제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나, 단어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았다.
탐랑이 막 거절하려던 순간, 그의 눈빛이 굳어지더니 먼 곳의 보라색 안개 너머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의 보라색 안개는 약간 실룩이다가 살짝 수축했다.
진룡을 힐긋 보던 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거절해봐야 공연히 의심만 살 테지. 좋다, 다시 한 번 해봐라!”
진룡은 능글맞게 웃으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하하! 의심이라니요, 선배님. 감히 저희가 어찌 선배님을 의심하겠습니까? 그저 너무 오래 갇혀 있으려니 바깥에 있을 사제들이 걱정됐을 뿐입니다.”
그 말에 탐랑은 냉소하며 몸을 훌쩍 날려 발을 구르더니 길을 따라 안개 속으로 돌진했다.
진룡은 깊은 숨을 내쉬며 한제에게 포권을 하더니 작게 말했다.
“이 형, 문파끼리의 갈등은 잠시 미뤄두세. 이곳의 안개는 들어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가 없어. 출구는 하나뿐인데 그 출구 전방에 기이한 마수들이 모여 있어서 출구 밖으로 나가는 순간 포위되고 말걸세!”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나검종 제자들과 함께 몸을 날렸다. 하늘을 가르며 보라색 안개로 향하는 와중에도 그는 몰래 생의 낙인을 몸에 둘러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다.
사실 그뿐만 아니라 진룡도 신통술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한제가 자신을 기습할 것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한편 다른 대나검종 제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오마는 한제를 악독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각기 다른 마음을 품은 그들은 출구를 향해 날아갔다.
가장 앞에 선 탐랑은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어렴풋한 신식이 계속해서 자신을 훑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그 신식에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젠장, 이한제 저 녀석에게 언제 이런 협력자가 생겼단 말인가?’
탐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라색 안개의 출구가 있는 곳에 가까워졌다.
이곳의 안개는 아까보다 옅어져서 어렴풋하게 바깥쪽이 보였고 신식도 펼칠 수 있어서 바깥의 상황을 살필 수가 있었다.
신식으로 안개 바깥을 살핀 순간, 한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 저건⋯⋯?”
한제가 찬 숨을 들이마셨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한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고대 신의 기억의 유산 속에서 봤던 그 알 수 없는 별들처럼 흡혈 마수가 빽빽하게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탐랑과 대나검종 제자들은 한제가 놀란 이유를 잘못 이해했으나, 어쨌든 놀라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누구든 저런 끔찍한 마수가 저토록 빽빽하게 모여 있는 모습을 본다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 수많은 흡혈 마수들은 격렬한 날갯짓을 하며 한제를 비롯한 수련자들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흉악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보라색 안개의 또 다른 가장자리에서 한제의 흡혈 마수는 몸을 반 정도 드러낸 채 빽빽하게 모여 있는 동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흡혈 마수가 저물대 안에서 어렴풋이 감지했던 초조한 기운은 생에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익숙하기도 했다. 그것은 영혼에서 기인한 익숙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