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27
“내게 재료는 없지만 법보는 있지. 이 법보들을 녹여 꼭두각시에 섞으면 분명 효과가 있을 거야.”
한제는 결심을 굳히며 한 줄기 화염을 일으켜 법보들을 에워쌌다. 그러자 법보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거의 모든 법보들이 녹아 새카만 빛을 발하는 주먹만 한 액체의 공이 되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저물대에서 또 몇 개의 법보를 꺼내 이 작은 액체 공에 녹여 넣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 8백여 년간 꽤나 난잡해졌던 한제의 저물대에서 이제 더 이상 필요치 않은 법보들이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한 송이의 남색 장미꽃 하나가 한제의 손에 떨어졌다. 그 장미를 바라보던 한제의 머릿속에 불처럼 붉은 누군가의 인영이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던 한제는 장미를 다시 저물대에 넣었다.
같은 과정이 며칠간 이어졌다. 그 동안 한제가 녹여낸 수많은 법보 중에는 제법 고급 법보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한제의 눈앞에 떠 있는 액체 공은 다채로운 색으로 빛났다.
한제는 오른손을 움직여 그 액체를 꼭두각시 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제련이 시작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두 달이 지나갔다.
이 날, 꼭두각시의 몸에서는 노란 빛이 발산되더니 틈 안을 환하게 밝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꼭두각시가 발하는 노란 빛을 바라보며 다소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동(銅)급 강도인가? 뭐, 그런 대로 쓸 만하겠지.”
첫 번째 단계는 완성됐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는 한 번만 실패해도 제련 전체가 실패로 돌아간다. 게다가 일단 실패하면 제련 대상의 육신도 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원신으로 새로 시작해야 했다.
한제의 두 눈에 신중함과 동시에 망설임이 드러났다.
그는 고개를 들어 틈 밖을 내다보았다. 지난 반년 동안 바깥의 흡인력은 잠시도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은근히 강해지고 있는 듯했다.
한제는 이를 악물고 저물대에서 존혼번을 꺼내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머리 하나가 떠올랐다.
흐릿한 허상의 머리는 흑청색이었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어 마치 악귀 같았다. 특히 두 눈은 허상인데도 불구하고 실체화된 듯 음산하고 서늘했다.
그는 존혼번 안에서 부유하며 한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존혼번 안에 있는 대부분의 혼백은 모두 이 머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량의 선량을 섭취한 뒤 기이한 일련의 변화를 맞은 기린 혼백만이 유일하게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머리를 노려보며 포효했다.
머리는 맹렬히 그 기린을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낮게 그르렁거렀다.
머리는 다름 아닌 천귀(天鬼)였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한 손을 들어 움켜쥐었고 그러자 천귀는 그의 손에 그대로 붙들렸다. 천귀는 굉장히 사나운 존재로 만약 제대로 회복하지 못해 가장 허약해졌을 때가 아니었다면 한제는 절대 녀석을 붙잡지 못했을 터였다.
천귀는 입을 쩍 벌려 한제를 단숨에 삼키려 들었다. 허나 한제가 차게 코웃음을 치며 천귀 체내에 남겨 놓았던 낙인을 진동시키자 천귀는 흩어져 사라질 듯했다.
“크아아!”
천귀는 뒤로 물러났으나, 그러면서도 한제를 노려보며 낮게 포효했다.
“꼭두각시의 신체 강도가 부족하고 원신도 두 번째 단계를 버티기 어려울 것 같으니 천귀를 이용해 사나운 기운을 더해야겠어. 그래도 실패한다면 선위 제련은 포기할 수밖에…”
한제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 뒤 손에 쥐고 있던 천귀를 그대로 꼭두각시의 미간에 쑤셔 넣었다.
“좋은 등급의 꼭두각시를 만들어야만 해. 정말 문정기 후기 절정 수준의 꼭두각시를 만들 수만 있다면 법보들이나 천귀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아!”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결인을 그린 왼손으로 미간을 두드려 줄기줄기 전광을 뽑아냈다. 이 전광에는 불의 기운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제가 소매를 휘두르자 이 전광들은 꼭두각시의 체내로 뚫고 들어갔다.
“제련!”
천귀는 더욱 격렬하게 포효하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그때 한제가 어느새 꺼내 든 채찍을 휘둘렀다.
짝!
“캬아아! 크르르…”
천귀는 참혹한 비명을 내질렀고 저항이 약해졌다. 곤극 채찍은 천귀에게 천적과도 같은 법보였다.
다시 한 달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는 동안, 한제는 제련에 힘썼다. 꼭두각시 안의 천귀와 두건의 원신은 융합되어 함께 빻아지고 있었지만 천귀의 강한 힘은 그 와중에도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옥패에 기록된 두 번째 과정의 관건이 되는 조건이었다. 원신이 빻아지는 과정의 고통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고 그 고통에 굴복하면 죽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제련은 실패로 돌아간다.
한편,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낸다 해도 계속해서 호흡을 유지하지 않으면 의식 안의 정신이 남지 않을 수 있다. 이 또한 실패의 원인이 된다.
그러니 두 번째 단계를 성공시키려면 원신의 마음속에 강력한 집념이 있어야만 했다. 이는 자신의 도를 가진 수련자들을 선위로 제련시킬 때의 성공률이 높은 원인이기도 했다.
반년의 시간을 들인 끝에 한제는 마침내 첫 번째 선위 꼭두각시를 제련하는 데 성공했다. 천귀를 원신에 넣어 제련한 덕이 컸다.
“드디어…”
사실 한제는 지금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앞에서 은은한 노란 빛을 발하고 있는 비쩍 마른 꼭두각시를 바라보았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느껴졌다.
선제 청림은 선위의 배반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제련 과정에는 수많은 조종 방법이 있었다. 한제는 원신의 기운을 이용해 제련한 끝에 며칠 만에 이 꼭두각시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다.
살육 선결의 숨겨진 폐해
한편 천귀는 굉장히 포악하고 오만했지만 제련 과정 중의 신통력 덕분에 완벽하게 꼭두각시의 체내에 녹아든 상태였다.
한제는 피를 한 방울 내 꼭두각시의 미간에 튕겼다.
피가 녹아든 순간, 꼭두각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텅 빈 눈동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음양이의의 경지!”
한제는 신식을 통해 꼭두각시를 한 번 훑어본 순간, 당시의 사도환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도환보다 강하지는 않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하하하! 으하하하하! 이런 법보의 제련법을 만들어 내다니… 선제 청림, 당신의 능력은 그야말로 놀랍군!”
한제는 진심으로 선제 청림에 대해 탄복했다.
“이 선위는 원신이 육신에 녹아든 것이라 많은 신통력들을 발휘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진정한 음양이의의 경지에 이른 수련자에 비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옥패에는 선위만을 위해 준비된 신통력들도 있지!”
한제가 눈을 번득였다.
“그리고 내가 따로 선위를 위해 준비해놓은 선물도 하나 있고…”
한제가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리자 줄기줄기 회색 기운이 나타나 1백만 갈래의 살육의 기운이 되더니, 순간 그 꼭두각시의 체내로 뚫고 들어갔다.
꼭두각시의 두 눈에 살육의 기운이 번득였다가 차차 사라졌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전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듯했다.
작업을 마친 한제는 저물대에서 옥패를 꺼내 든 후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옥패는 곧장 꼭두각시의 미간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꼭두각시 선위의 눈에 여러 개의 문양이 번득였다.
한참 뒤, 옥패는 떨어져 나와 다시 한제에게로 돌아왔다.
“은닉!”
한제가 덤덤하게 외쳤다. 그러자 선위가 몸을 훌쩍 날려 순간 허공에서 사라지더니 한제의 뒤에서 나타났다. 이곳에는 빛 한 점 없어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지만 한제는 선위가 자신의 그림자 속에 숨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위의 신통력을 이용한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6할은 된다. 이곳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안전한 곳이기도 하지.”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저물대에서 커다란 검을 하나 꺼냈다. 문짝처럼 커다란 검이었다.
“금부⋯⋯ 나의 첫 번째 검! 대체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거지?”
한제는 금부의 검신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다가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틈 밖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끝없는 흡인력은 구멍 안쪽에서 모든 것을 삼킬 듯 흘러나왔다.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틈 바깥의 어둠을 내다보았다. 그는 사방을 채운 어둠에 녹아들어 분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오직 그의 눈 속에서 이따금 번득이는 전광만이 틈 안을 어렴풋이 밝힐 뿐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고독감이 차올랐다. 이곳에 갇혀 세상과 단절되고 모든 사람에게 잊힌 듯했다.
유일하게 곁에 있는 것은 지난 8백여 년의 기억이었다.
한제는 자신의 인생을 스쳐간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럴수록 쓸쓸함은 점점 짙어져갔다.
그는 기억 속 어느 시간에 멈추어 흐르는 시간을 느껴보기도 하고 또 기억 속 어느 공간에 숨어 그리워지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했다.
“부모님 묘를 누가 살피고 있긴 할지⋯⋯?”
어둠 속에서 한제가 중얼거렸다.
미약하게 빛나는 작은 공이 그의 곁에 떠 있었다. 그 빛은 너무도 미약하여 어둠을 밝히는 데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공에는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 온기는 한제의 귓가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며 부드럽게 그를 달래주는 듯했다.
이곳은 여전히 음습하고 서늘했다. 마치 모든 온기마저 깊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듯했다. 하지만 이 공만 있으면 한제의 마음속 온기는 흩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한제가 가볍게 손을 들자 작은 공은 천천히 그의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그는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하는 빛을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의 행복은 서로 다르지. 나의 행복은 부모님, 그리고 모완과 함께 하는 것인데⋯⋯.”
한제는 쓰게 웃었다. 그에게 행복은 아무래도 갖기 어려운 것인 듯했다.
이 요령의 땅 안, 깊은 구멍 아래의 틈에서 누군가가 운명과 갈등하며 쓸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제가 이곳에 들어온 지도 벌써 3년이었다.
그 동안 틈 밖의 흡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2년 전, 한제가 금부를 매만지며 살피고 있을 때, 깊은 구멍 속의 흡인력은 마치 폭발하듯 커졌다. 수십 척 크기였던 이 틈의 반도 그 흡인력에 빨려 들어가 버린 상태였다.
선위 꼭두각시의 신통력이 있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확률이 6할은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흡인력이 폭발한 바람에 이제는 2할로 줄어들었다.
한제는 실망하지않고 2년을 더 견뎌냈다.
문정기에 이른 수준은 그동안 천천히 안정되어갔다.
문정기는 수련자에게 있어 수련 첫 단계의 절정이었다. 이 넓은 우주에서 수련 첫 번째 단계의 절정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늘의 은총을 받은 자들을 제외하면 이 절정에 이르는 동안 오랜 고통과 연마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질이 평범한 한제 또한 도심에 대한 집착과 특별한 경험들이 없었다면 이 경지에 오르기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문정기 중기, 후기, 절정 세 관문 앞에 수많은 수련자가 좌절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온 생을 바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지금 한제의 앞에는 그렇게 넘기가 힘든 거대한 산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한제는 덤덤한 마음으로 묵묵히 금부 안의 의지를 느꼈다. 금부에는 단 하나의 검결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