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28
“참라결(斬羅訣).”
한제가 금부에 집중했던 마음을 거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금부는 마치 일생을 다한 듯 완벽하게 사라졌다. 한제의 마음속에 하나의 깨달음만을 남긴 채…
그 후로는 끝없는 적막과 쓸쓸함뿐이었다.
한제는 매일 이렇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묵묵히 틈 밖을 내다보았다. 귀로는 바람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칠흑처럼 검은 어둠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작은 한숨 소리가 저물대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저물대가 저절로 열렸고 그 안에서 그림 족자가 붕 떠올랐다. 족자는 허공에서 펼쳐졌고 그 안에서 한 여인의 허상이 점점 나타났다.
한제는 그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놀란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덤덤했다.
족자가 나타난 순간,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아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던 작은 공이 체내로 녹아들었다.
“내려가…”
족자에서 떠오른 여인의 허상은 등을 보인 채 느릿하게 말했다.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묘하게도 틈 안에 울려 퍼졌다.
한제는 말없이 두 손가락을 들어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기이한 힘이 나타나 족자를 다시 휘리릭 말아버렸고 더 이상은 어떤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한제는 족자를 힐끔 바라보다가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지난 3년 동안 족자 속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총 네 번이었다. 매번 나타나서 하는 것이라고는 방금처럼 내려가라는 말을 속삭이는 것뿐이었다.
깊은 구멍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한제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심지어 틈 밖의 맞은편 아래쪽에 비죽 튀어나온 거대한 돌과 그 위에 배치된 전송진에 대해서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충분한 실력이 갖춰지기 전까지 호기심은 스스로를 죽이는 덫에 불과했다.
한제는 깊은 구멍 속의 흡인력이 약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멍 속의 흡인력에 규칙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2년 전 폭발하듯 강력해졌으니 언젠가는 다시 약해질 날도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기다려야 했다.
어둠 속 한쪽에서 두꺼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제는 전광이 어린 눈빛을 번득여 옆을 비추었다. 그곳에는 손바닥만 한 푸른 두꺼비가 있었다.
뇌와였다.
1년 전 깨어난 뇌와는 손바닥만 해진 상태였다. 한제의 원신에 어린 우레의 위엄에 감응한 듯 깨어난 그 순간부터 이 두꺼비는 저물대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대신 한제 옆에 온종일 엎드려 있었다.
한제는 오른손 손가락을 비벼 한 줄기 번개를 뇌와에게 뿜어냈다. 뇌와는 눈꺼풀을 올려 눈을 뜬 뒤 긴 혀를 내어 한제가 쏘아낸 번개를 잡아채더니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녀석의 뱃속에서는 우르릉 쾅쾅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뇌와의 표정은 한없이 편안해보였다.
한제는 두 눈을 감고 도념 속에 빠져들었다.
그의 도에는 두 가지 술법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도의 황천이었고 두 번째는 황천의 혼을 응결시키는 것이었다.
한제는 이 두 번째 술법인 황천의 혼에 1억 개의 혼백을 응결시켜 보았지만 그 혼백들에게는 흉악한 기운이 모자랐다. 반면 천귀는 이 흉악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지만 흉악한 것만으로는 천혼(泉魂)으로 삼을 수 없었다.
‘진정한 천혼은 그런 강대한 혼백이 아니야. 간단하고 약한 혼백일수록 더욱 많은 흉악함과 살기를 품을 수 있지.’
한제는 생각했다.
‘만약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일반인 세계에 가서 일반인의 혼백으로부터 흉악함과 살기의 기운을 뽑아 황천의 혼백을 만들어보리라.’
한제는 두 눈을 뜨고 틈 밖을 내다보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틈 안과 밖의 경계선을 가리켰다. 이 경계선은 밖으로 넘어가면 흡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 끝이 경계선을 넘은 순간, 한제는 피와 살이 그대로 뽑혀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손가락 끝의 피부에는 파문이 일었고 손톱이 빠질 듯했다.
“이곳에 갇혀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도념의 세 번째 술법을 만들겠다.”
한제는 덤덤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전에 골칫거리를 확실히 해결해야겠지.”
한제는 손가락을 거두었다. 손가락 끝에서는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한제는 살육 선결을 남김 없이 꼭두각시에게 넘겨둔 상태였다. 살육 선결은 그의 가장 중요한 신통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고민이 있었다.
한제는 이 살육 선결을 수행하면서 체내에 살육의 마음이 생겼다. 이 살육의 마음은 살육의 기운을 꼭두각시에게 모두 넘긴 후에도 여전히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 몇 개월 전부터 한제는 살육의 마음이 변이를 일으키고 있음을 명확하게 느꼈다. 마치 승선과를 먹었을 당시와 비슷한 광증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는 꼭두각시에게서 살육의 기운을 다시 회수하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한제는 결연한 눈을 번득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흡인력이 미치는 경계선 밖에 이르렀다.
그 순간, 거대한 흡인력이 그의 몸을 잡아 끌었다.
한제는 선력을 이용해 천천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하는 동시에 묵묵히 흡인력의 변화를 느꼈다.
서늘한 기운이 배어 있는 흡인력은 체내로 녹아들어 한제의 경맥을 타고 흘렀다. 선력으로 한기를 몰아내며, 한제는 그 자리에서 며칠이나 흡인력의 변화를 느꼈다. 그리고 며칠 후, 바깥쪽으로 한 걸음 더 이동했다.
그 한 걸음에 더욱 강한 흡인력이 느껴졌다. 심지어 피까지 밖으로 빠져나갈 듯 흐르는 속도가 느려졌다.
“아직 모자라!”
한제는 눈을 번득였다.
★ ★ ★
조석의 심연의 복도. 깊은 구멍 옆으로는 흉악한 흡혈 마수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지만 감히 그 깊은 구멍 쪽으로 접근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중에는 온몸이 보라색으로 빛나는 흡혈 마수가 한 마리 있었다. 녀석이 지나는 곳마다 다른 흡혈 마수들은 분분히 길을 비켜주었다. 심지어 녀석이 포효할 때마다 다른 마수들은 벌벌 떨어야 했다.
한데 이 보라색 흡혈 마수의 눈빛은 초조해 보였다.
깊은 구멍 주위를 배회한 지도 벌써 3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녀석은 몇 번이고 구멍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곁에 있는 동료들이 막아섰다.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가 애타게 가족을 부르는 듯한 소리였다.
세 번째 술법
틈의 입구는 한제를 삼키려는 음산한 짐승의 아가리 같았다. 거대한 흡인력이 한제의 몸을 잡아당겼고 이에 옷이 마구 나풀거렸다. 머리카락도 틈 밖으로 휘날렸고 피부도 잔뜩 잡아당겨져 굴곡이 생겼다.
한제가 가부좌를 틀고 이곳에 앉은 지도 벌써 일주일 째였다. 지난 7일 동안 한제는 점점 흡인력에 적응해가고 있었고 급기야 눈을 뜨고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제 한제는 틈의 출구로부터 10척 안에 들어오게 됐다.
거대한 흡인력에 감싸인 한제의 몸은 이제 마치 무형의 손에 잡아당겨지듯 기울었다.
‘엄청나군!’
한제는 어두운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흡인력에 저항했다.
체내의 피는 이미 흐름을 거의 멈춘 상태였다. 선력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육신 곳곳에 부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직 부족해!”
한제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체내의 선력을 풀었고 그 순간 그는 그대로 틈의 바깥쪽으로 빨려나갔다. 그러다가 몸이 틈의 출구에 이르렀을 때, 한제는 저물대에서 칠성검진을 쏘아 보냈다.
펑!
일곱 자루의 검은 즉시 땅 깊숙이 박혔다. 일곱 자루 검에서 뿜어져 나와 서로 교차된 빛은 그 중앙에 한제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번득이는 전광은 끝없이 진해져 이윽고 하나의 막을 이루어 한제를 감쌌다.
한제는 칠성검진 안에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미 틈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는데 짙은 한기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체내의 원신도 그 흡인력에 바깥으로 뽑혀 나오려 했다. 하지만 이때, 한제를 한참 동안 가두었던 막이 다시 나타나 원신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원신뿐만 아니라 한제의 신식에 존재하는 살육의 의지도 실체화된 듯 점점 밖으로 뽑혀 나갔다. 이는 살육의 마음에서 생성된 것으로 한 줄기 붉은 선이 되어 한제의 피부 아래에서 번득였다.
한참 뒤, 한제는 두 눈을 번득이며 다시 앞쪽으로 3척 정도 더 나아갔다. 주위의 일곱 자루 검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흡인력은 더욱 강해졌고 한제의 피부에는 붉은 선이 하나 더 나타났다.
일곱 자루 검은 웅웅 우는 소리를 내더니, 모든 검혼이 한데 응집되어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어가면서 흡인력에 저항했다. 뿐만 아니라 이 검들에서 번득이는 빛은 파지직 소리를 내며 검들을 더욱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이에 검들은 땅과 하나가 된 듯 그 자리에 굳건히 붙어 있었다.
한제가 앞으로 이동함에 따라 그의 피부에는 점점 많은 붉은 선들 나타났다. 마치 온몸이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붉은 선들은 너무도 가늘었는데 그 수가 1백만 개에 달했다. 이는 살육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생의 낙인의 개수와 똑같았다.
한제는 냉정함을 유지한 채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그는 틈의 가장자리에 이르렀지만 이곳에서도 살육의 의지는 드러나기만 할 뿐 밖으로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틈 밖의 시커먼 어둠을 바라보던 한제는 2백 척 정도 아래 벽에서 비죽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돌과 그 위에 배치된 오래된 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몸을 훌쩍 날려 틈의 출구로부터 튀어나가 번개처럼 그 거대한 돌을 향해 움직였다. 칠성검진은 그의 몸에 바짝 달라붙어 함께 이동했다.
한제의 몸이 틈으로부터 벗어난 그때, 거대한 흡인력이 깊은 구멍 아래쪽에서 미친 듯이 그를 빨아들였다. 틈 안에 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힘에 한제의 피부에 드러났던 붉은 선들은 바깥쪽으로 뽑혀나갔다. 그 붉은 선들은 한제의 몸에서 떠난 순간 몸부림치듯 꿈틀거렸지만 이내 그 선들은 한 덩어리의 붉은 기체가 되어 사라졌다.
칠성검진은 한제의 몸을 맴돌며 빠르게 회전했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거대한 회오리가 되었고 그 회오리 안에서 추진력이 발생했다. 이 추진력은 회오리가 점점 빠르게 회전할수록 더 커졌다.
한제는 검진 안에서 그 커다란 돌을 향해 나아가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까딱하면 그대로 깊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방의 음산한 기운은 매우 짙었고 흡인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마치 수많은 무형의 손들이 위쪽에서 짓누르고 아래쪽에서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귓가를 스쳐가는 휘휘 소리는 그 손의 주인이 내는 분노의 포효처럼 들렸다.
칠성검진의 속도는 이미 한계에 달했지만 회오리에서 생성된 추진력은 흡인력에 대항하지 못했다. 한제의 몸은 검진의 회오리와 함께 아래쪽으로 끌어당겨졌다.
그 순간, 한제가 눈을 번득였고 그의 발아래 허공에서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 그림자는 한제의 몸과 단단히 연결된 듯했고 나타나자마자 방향을 틀며 기이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한편 기이한 결인을 그렸다.
검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한 줄기의 검은 폭풍이 됐다. 이 폭풍의 맹렬한 힘은 흡인력을 잠시 멈칫하게 만들었고 그 사이에 검진과 그 안의 한제까지 끌어안은 채 멀지 않은 곳에 비죽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돌로 이동했다.
그 돌을 밟은 순간, 한제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선위 꼭두각시의 신통력과 검진의 힘을 더해 짧은 시간이나마 흡인력에 저항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효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제는 재빨리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쉽지만 전송진을 연구할 여유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피부에 드러난 붉은 선들을 완전히 몰아내야 했다.
눈을 번득인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렀고 순간 폭풍이 된 꼭두각시는 깔때기 모양이 되어 한제의 뒤쪽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폭풍이 사라진 순간, 일곱 자루의 검은 한제의 몸 바깥쪽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폭풍이 사라지자 한제는 다시 강력한 흡인력에 이를 악물었다.
한제의 피부에 드러난 붉은 선들은 빨려나가기 싫다는 듯 발버둥을 쳤지만 이내 절반 정도가 떨어져나갔다. 그리고는 펑펑 소리와 함께 붉은 기체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의 몸에는 수많은 붉은 솜털이 돋은 듯 대량의 붉은 선들이 끊임없이 꿈틀거려 보기에 퍽 기괴했다.
붉은 선들이 흡인력에 의해 하나하나 안개로 흩어지면서 한제 주위에는 붉은 안개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 붉은 안개들은 곧장 흡인력에 의해 소멸됐지만 그보다 빠른 속도로 다른 붉은 선이 터져나가며 안개로 변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제의 피부는 점차 본래의 색을 찾아갔다.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 있던 그림자에서 허상이 다시 나타나 폭풍을 일으키더니 한제를 감싼 채 이전의 그 틈으로 향했다.
힘들게 틈 안으로 되돌아간 한제는 흡인력이 느껴지지 않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정기 후기 수준의 수련자와 열흘 밤낮을 싸운 것처럼 기진맥진했다.
지난 며칠 동안 한제는 흡인력에 저항하는 동시에 칠성검진을 통제했고 붉은 선들을 몰아냈다. 뿐만 아니라 선력을 이용해 그 전송진이 배치된 돌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고정시키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해내느라 한제는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지친 탓에 일단 푹 쉬면서 힘을 회복한 뒤 다시 움직여야 했다.
이런 과정을 몇 달이나 이어가 이곳에 갇힌 지 4년이 지난 어느 날, 한제는 깊은 구멍 속의 비죽 튀어나온 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의 오른손 피부에서는 한 가닥 붉은 선이 꿈틀대며 흡인력에 의해 빨려나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손가락 끝에서 빠져나가 붉은 안개로 흩어져 사라졌다.
이는 그의 체내에 남아 있던 마지막 붉은 선이었다. 이 붉은 선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 그 순간,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잔뜩 지친 얼굴이었지만 두 눈은 서늘한 빛으로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