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29
“살육 선결!”
한제의 눈에서 번득이던 서늘한 빛이 차차 잦아들었다.
고개를 숙인 한제의 눈빛은 이제 발아래의 전송진에 닿았다.
허나 그는 이내 눈을 감고 더 이상 전송진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묵묵히 사방의 흡인력을 느꼈다.
이 흡인력에 녹아들어야만 흡인력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려면 자신의 심신을 포기하고 이 흡인력에 저항하지 말아야 했다. 자신을 이 흡인력에 투과되는 투명한 존재가 된 것처럼 여겨야 했다.
한제는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또다시 3년이 지났다.
칠성검진은 더 이상 회전하지 않고 돌에 꽂힌 채 한제의 사방에 둘러져 있었다. 한제는 마치 자신이 깔고 앉은 돌과 혼연일체가 된 듯했다. 처음에는 경미하게 떨리기도 했지만 점점 그는 형태를 잃은 존재가 된 것처럼 흡인력을 그대로 통과시킬 수 있게 됐다.
시간은 착실히 흘러 또 3년이 지났다. 한제가 뇌룡을 피해 이 깊은 구멍으로 들어온 지도 10년, 이 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지도 6년째였다.
이 무렵, 흡인력은 한제의 몸을 타고 조금도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흘러나갔다. 한제의 옷과 머리카락조차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제의 심신 또한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잔잔한 수면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 6년 동안 흡인력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과정 속에서 마치 감각을 완전히 잃은 것 같은 상태가 됐다. 그렇게 되면서부터 흡인력은 그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허나 그의 원신만은 흡인력을 완벽히 통과시키지 못했다. 한제는 흡인력을 투과시킬 수 있었고 자신의 몸을 흡인력 속에 녹여낸 것처럼 만들 수도 있었지만 원신을 흡인력에 일체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제는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덤덤하게 흡인력을 느끼면서 이 기이한 상태에서 천천히 자신의 원신을 느슨하게 만들어갔다.
어느덧 또다시 7년이 지났다.
이 구멍 속에 머문 지도 벌써 17년, 이 돌 위에서 보낸 시간만 해도 13년이 되던 어느 날,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두 눈에는 노련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심신과 흡인력의 융합⋯⋯ 조금의 저항도 있어서는 안 돼. 흡인력을 깨닫고 그것과 진정으로 융합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흡인력의 일부로 삼아야 해. 내가 흡인력이 된다면 자연히 융합도 되겠지.”
이는 몇 년 전부터 해온 생각이었다. 허나 말로는 쉬워도 실제로 마음을 그렇게 먹는 것은 어려웠다. 자신을 어떻게 흡인력의 일부로 삼아야 할지, 어떻게 흡인력의 일부가 될 수 있을지는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지난 17년 동안 흡인력에 의한 바람 소리에는 완전히 익숙해진 상태였다. 마치 숨소리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때, 원신을 통해 족자의 그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려가⋯⋯.”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전광이 번득이는 눈으로 고개를 숙여 아래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번득이는 빛은 갈수록 짙어졌고 밝기가 정점에 이른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제는 지난 13년 동안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내딛었다. 이 한 걸음에 그는 어떤 신통력도 발휘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 발을 디뎠을 뿐이다.
그의 몸은 깊은 구멍 아래쪽으로 뚝 떨어져 내렸고 눈 깜짝할 사이 어둠에 삼켜졌다.
한제의 몸은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그러는 동안 한제는 두 눈을 꾹 감고 있었다. 흡인력은 그의 몸을 미친 듯이 파고들어 한제의 모든 것을 붙잡고 마구 끌어당겼다.
아래로 향할수록 한기는 더욱 강해졌고 벽에 서리가 끼인 곳도 나타났다.
허나 한제는 이 모든 것을 보고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심신은 기이한 상태에 녹아들어 있었으며,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은 흡인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흡인력에 녹아들고 흡인력으로 변해 흡인력이 되어야 한다.’
쾅!
그 순간, 한제의 원신은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한제의 체내로 들어온 흡인력이 원신에 섞여들더니 마구 휘저었다.
펼쳐진 족자의 비밀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몸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흡인력은 아무런 방해 없이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의 원신도 육신도 이 순간 완전히 흡인력에 녹아든 상태였다. 즉, 그는 지금 흡인력의 일부가 된 셈이었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자 깊은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마치 끝이라고는 없는 황천 같았다.
“떠나야 할 시간이야. 내 도념의 세 번째 술법은⋯⋯ 황천의 힘이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데 그때, 다시 한제의 원신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달리 감정이 실린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내려가⋯⋯. 부탁이야⋯⋯. 내려가⋯⋯.”
한제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부탁이야. 내려가⋯⋯. 날 데리고 내려가⋯⋯.”
목소리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으며, 약간의 다급함도 느껴졌다.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근 13년 동안 이 여인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제야 다시 입을 열었고 그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족자를 꺼냈다. 흡인력은 이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족자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족자는 저절로 펼쳐졌고 여인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한제는 처음으로 족자 속 여인을 자세히 살폈다. 볼 수 있는 것은 뒷모습뿐이었지만 매우 아름다웠고 또한 기품이 느껴졌다.
“부탁이야, 날 데리고 내려가⋯⋯. 난 이 족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넌 위험해지지 않을 거야. 난 그저⋯⋯ 보고 싶어⋯⋯.”
한제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여인이 말을 이었다.
“난 너를 도울 수도 없고 너한테 뭘 줄 수도 없어. 그냥, 부탁할 수밖에는… 도와줘, 날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 줘⋯⋯.”
한제는 고개를 숙여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냉랭한 기운을 품은 칠흑 같은 어둠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네가 알아서 해. 떠나고 싶다면 그냥 가면 되잖아.”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시 위쪽으로 움직였다. 그에게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천운자 등이 이 요령의 땅에 들어오기 전에 별채 안의 금제를 모두 풀어내 진정한 별채에 들어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요석설의 말대로라면 머지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전에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시간이 부족해. 호기심 따위는 접어둘 수밖에…’
게다가 그는 자신이 영패를 가졌다는 것이나 별채에 대한 사실도 천운자에게 들키지 않을 방법도 찾아내야 했다. 그래야만 요령의 땅에서 무사히 떠날 수 있을 터였다. 작은 실수 하나도 죽음으로 직결되는 상황에서 시간이 부족했다.
족자 속 여인은 몸을 살짝 떨었다. 몸을 틀려는 듯했으나, 어떤 봉인에 갇힌 것인지 끝내 몸을 돌리지는 못했다.
금방이라도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한제의 모습에 여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네 원신 속 구슬의 진정한 내력을 알고 싶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지만 한제의 귀에는 마치 우렁찬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한제는 우뚝 멈추었다.
“그 구슬 속 여인의 잔혼을⋯⋯ 살리고 싶지 않아?”
앞선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면 이번 말에 한제는 눈앞에 1백만 1천 만 개의 번개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제의 육신과 원신까지 덜덜 진동했다. 방금 그 한 마디에 한제의 원신과 기억을 비롯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제하려 해봐도 떨리는 몸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한제는 몸을 돌려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야수처럼 빛나, 지난 8백여 년의 수련을 통해 쌓은 냉정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천운자나 별채, 혈조, 요령의 땅 등에 대한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너, 그게 무슨⋯⋯?”
한참 후에야 한제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짧은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어려 있었다. 이 순간, 수만 년간 멈추지 않고 이 구멍 속에서 흘러나왔던 바람 소리도 약해진 것만 같았다.
“네가 가진 그 구슬의 내력을 알려줄 수 있어. 그 구슬 속 혼을 부활시키는 방법도 심지어는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방법도⋯⋯.”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 저 여인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따질 생각도 어떻게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한제는 말없이 몸을 날려 족자를 쥔 채 곧장 구멍 깊숙한 곳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잡아야만 했다.
모두에게는 그런 것들이 있다.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냉정하다 해도 그 모든 것을 무시하게 하는, 끝없는 위험을 맞닥뜨리고 생사의 위협을 받게 되더라도 달려들게 하는 대상이…
한제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지난 8백여 년간 냉정함은 한제의 뼛속 깊은 곳까지 밴 상태로 그의 본능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본능을 단숨에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잃은 후에야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는⋯⋯. 한제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족자를 쥔 그는 슬픈 눈빛으로 마치 유성처럼 깊은 구멍 아래를 향해 질주했다. 이 순간, 그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진위를 판별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족자 속의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걱정 마, 난 널 속이지 않았어. 이 모든 것을 말하는 데 엄청난 결심이 필요하긴 했지만⋯⋯.”
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족자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마치 그가 쥐고 있는 것이 족자가 아니라 희망이기라도 한 듯이…
아래쪽으로 향할수록 벽에 서린 성에는 더욱 짙어져 반짝였고 흡인력도 강력해졌다.
얼마나 아래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구멍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까워졌어, 가까워졌어⋯⋯.”
족자 속 여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한제는 흡인력을 따라 더 아래로 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루? 한 달? 어쩌면 1년이 지났을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끝없이 이어지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짧은 회랑이 나타났다.
“다 왔어!”
여인의 흥분한 목소리에도 한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회랑에는 거대한 회오리 하나가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는데 흡인력은 다름 아닌 그 회오리에서 흘러나왔다. 다만 이상하게도 그곳의 흡인력은 마치 봉인된 것처럼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고 그 흡인력이 끓어오르는 일정한 범위에 이르러야만 그 힘이 느껴졌다.
그 회오리를 본 순간, 족자 속에서는 기이한 힘이 발산되어 한제의 체내를 타고 들어가더니 두 눈에 응집됐다. 그러자 한제는 회오리를 뚫고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우주와 수많은 수련성들⋯⋯ 그곳은 마치 또 다른 세상 같았다.
“이건⋯⋯?”
한제는 놀란 듯 넋을 놓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