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34
한제는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으로 염월을 바라보았다. 염월은 꽤나 똑똑했고 척 봐도 어느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인 듯했다. 무엇으로 보아도 이 네 사람의 우두머리는 그녀였다.
“동림성이다. 알고 있느냐?”
한제는 족자의 여인에게서 들었던, 자신이 나천성역에 대해 이전에 알고 있던 유일한 지역을 미끼처럼 던져놓고는 덤덤하게 고개를 돌렸다.
“동림성!”
그의 말에 이번에도 손설산은 충격을 받은 듯 화들짝 놀랐고 창백한 얼굴로 몇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이는 두 명의 염 씨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염월마저 찬 숨을 들이마셨다. 한제에 대해 했던 그간의 모든 추측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런 반응은 영변기 수련자답지 못한 것이었다. 영변기 수련자라면 비록 문정기 수련자들만큼 교활하지는 않더라도 꾀가 많고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한제는 족자의 여인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문파가 아닌 가문 단위로 세력이 이루어져 있다면 대부분은 피비린내 나는 경험을 해보지는 못했겠군.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이 쌓이지 않고서야 제아무리 수준이 높다한들 애송이에 불과하지.’
허나 한제는 그들과 다르게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동림성을 아는 모양이구나!”
염월은 공손하게 말했다.
“나천성역 동역(東域) 최고의 수련성이자 동림살성(東臨殺星)이라는 별칭이 붙은 곳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때로는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그 전설 같은 장소를 모를 수가 없지요.”
염월이 비록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동림살성’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동림성 출신 사람들에게 잔혹한 면이 있다는 점을 한제는 추측할 수 있었다. 일전에 동림성 출신 어느 수련자가 다른 수련성의 모든 수련자 가문을 말살했던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더구나 네 수련자의 반응으로 보아 동림성은 나천성역 수련자들에게 두려운 존재일 것이다.
동림성에서 왔다는 말에 손설산도 더 이상 한제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심지어 이 허목이라는 자를 염운성으로 안내해야 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머지 세 사람도 같은 고민에 빠지면서, 이들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은연중에 염운성까지 안내하기 싫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허나 그들은 허목이 길 안내를 요구한다면 거부할 수도 없었기에 천천히 따랐다.
그들 입장에서 한제는 말수가 적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도중에 몇 번이나 네 사람은 방향을 틀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저 허목이라는 자가 냉랭한 눈으로 자신들을 흘겨본 것을 보면 말이다.
며칠 뒤, 마치 바다처럼 남색으로 빛나는 수련성이 한제의 신식에 포착됐다. 실제로 그 수련성은 바다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색깔과 모양이 멀리서 보기에 무척 아름다웠다. 영력 또한 무척 강했다.
네 사람의 표정으로 한제는 그곳이 염운성임을 알게 됐다.
한제는 성라반을 저물대에 넣은 후 염운성을 바라보았다. 바다에서 강한 영력이 발산되는 것이 느껴졌다.
한제는 말없이 몸을 훌쩍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같이 염운성으로 들어온 네 사람은 곧장 자신들의 가문으로 향했다. 이곳에 오는 동안 겪은 일들을 가문에 고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멀리 떨어진 나천성역의 다른 쪽 끝과 맞닿은 연맹성역에서부터 시커먼 빛 한 줄기가 날아들었다. 이 빛은 폭발할 듯한 엄청난 기운을 품고 있어 지나는 곳마다 놀라운 기세를 떨쳤다.
빛 안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포악하고 오만한 인상으로 그의 비쩍 마른 얼굴에는 악에 받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는 성라반 같은 법보를 이용하지 않고 그저 순간이동을 하듯 발을 내딛었다.
곁에는 매우 아름다운 한 여인이 있었다. 연지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입술은 붉었고 봉황의 눈과 같은 눈동자는 칠흑처럼 검었다. 그 눈망울은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가는 눈썹은 아주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3척에 달하는 긴 머리카락은 세 갈래로 땋았는데 그중 가운데 갈래는 틀어서 나비모양 장신구로 장식했고 두 갈래는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알록달록한 옷감으로 만든 궁복을 입은 그녀의 치마에는 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풀거리는 옷에서는 기품이 느껴졌다.
여인의 외모는 당시의 홍접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하늘에서 내린 아름다움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또한 그녀에게서는 요염한 느낌도 풍겨 매력이 배가됐다.
그녀는 노인의 곁에 붙어 있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노인의 선력에 얹혀 가는 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미 문정기에 이르렀다 해도 노인의 속도를 쫓아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여인은 중간중간 기이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탄식하는 것 같기도 한, 복잡한 표정이었다.
“곧 떠나겠네⋯⋯.”
여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디 불편하기라도 한 게냐?”
노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만하기만 할 듯했던 노인의 눈빛은 의외로 매우 상냥했다.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인데 떠나려니 아쉬워서요.”
여인은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아쉬울 게 뭐가 있느냐? 수준을 좀 더 높이고 다시 돌아오면 될 것을… 나는 연맹성역에서 그 보물을 찾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너와 같은 제자를 거두었으니 성공한 셈이다!”
여인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는 눈에는 여전히 복잡한 빛이 담겨 있었다.
노인은 시선을 거두었다. 이 여인은 그가 수백 년 전 우연히 만난 사람으로 당시 그는 단박에 상대가 천환무정도를 수련하고 있으며 만환천마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차렸다.
그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정도의 수련은 성역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공법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심리 상태의 깨달음인데 혼자만의 수련으로 천환무정도를 익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자질이지만 노인이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여인의 몸에서 어렴풋이 만환천마도의 느낌이 풍겼기 때문이다.
노인은 나천성역 북역의 주성인 천환성 환가(幻家)의 대장로로 그동안 수많은 자손과 후배를 봐왔지만 이 여인과 같은 천부적인 자질을 갖춘 자는 드물었다. 더구나 그중 이 여인만큼 잠재력이 충분한 자는 단연코 없었다.
수백 년을 함께하며 노인은 자신의 제자를 깊이 아끼게 됐고 심지어는 그녀를 위해 천역주를 찾는 것조차 포기하고 나천성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옥을 구하는 방법
나천성역 염운성.
한제가 나타난 순간, 세 갈래의 강력한 신식이 나타나 돌연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그것들이 가까워지자 한제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기운을 숨겼다. 그러자 신식들 중 두 갈래는 서로에게 두려움을 느낀 듯 조용히 각자의 구역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나머지 한 갈래는 온 염운성을 훑으며 한제를 찾아내려 했다. 그러다가 결국 찾아내지 못하자 차게 코웃음을 치며 사라졌다. 그의 코웃음은 염운성 전역으로 퍼져 한제의 귓가에도 이르렀다.
한제는 염운성 북부의 어느 평원 위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문정기 중기 하나와 초기 둘. 나천성역은 흥미로운 곳이군. 이렇게 영력이 충만한 곳에 세력이 겨우 셋뿐이라니… 게다가 각 세력의 수준도 문정기에 이르렀을 뿐이군. 염운성이 수련연맹에 속한 곳이었다면 벌써 누군가에게 빼앗겼거나 수준 높은 수련자에게 점령되어 6성 수련국이 됐겠지. 겨우 문정기 수준의 수련자 세 명이 세력을 형성하는 일은 없었을 터.”
한제는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기운을 숨겼다. 겉으로 보기에 이제 그는 결단기 후기 수준에 불과해 보였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수준 높은 수련자가 아니라면 이제 누구도 그의 존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천운자도 내가 이런 곳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하겠지.”
한제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점점 사라지더니, 결국 흑백의 구분이 명확한 맑은 눈으로 변해 더는 전광을 번득이지 않았다.
“이곳으로 안내해준 네 명의 반응으로 미루어 동림성은 세력이 상당한 모양이니, 충분한 수준이 갖춰지기 전까지 그곳은 피해야겠어.”
말을 마친 한제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걸렸고 이제 그는 더 이상 냉랭해 보이지 않았다.
한제는 평범한 비검 하나를 저물대에서 꺼내 타고는 날아올랐다. 그러는 도중 그의 외모도 천천히 변해, 잠시 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그를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었다.
모습을 바꾸는 신통력은 사실 수준 높은 수련자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 법이다. 수준 높은 수련자라면 상대의 모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단번에 꿰뚫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한제는 그림자 안에 있는 선위의 신통력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기에 그의 진짜 모습을 꿰뚫어 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잠시 후, 저 멀리 성이 하나 나타났다. 거대한 푸른 돌로 둘러싸인 성에서는 강력한 위엄이 느껴졌고 문 위에는 커다란 글씨 두 개가 쓰여 있었다.
손가(孫家)
그 성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서 한제는 비검을 거둔 후, 날아드는 모래 먼지를 헤치며 걸었다.
수준을 숨겼기 때문인지, 성문에서도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외려 성 북쪽에 외부 수련자들을 위한 전용 별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한제는 영석 몇 개를 지불하고 임시 거주 영패를 받은 뒤 손가 성으로 들어섰다.
성 안에는 일반인이 더 많았지만 수련자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길 양쪽으로는 상점이 즐비했는데 개중에는 수련자들을 위한 도도 있었고 일반인들을 위한 곳도 있었다.
한제는 마치 이 성에 거주하는 사람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며 마땅한 처소를 찾았다.
성의 북쪽에 이르렀을 때, 고요함 속에서 짙은 영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는 혼자서 묵을 만한 방이 많았는데 각 방은 금제로 보호되고 있었다.
입구 옆에도 금제가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 옆에는 30척이 훌쩍 넘는 바위 위로 일고여덟 개의 검은색 영패가 걸려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원영기 수준의 청년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은 채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의 콧구멍에서 콧김이 쉬익 뿜어져 나와 길게 뻗어나갔다.
한제가 입구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바위 아래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청년이 두 눈을 번쩍 뜨고는 한제를 훑어보며 말했다.
“남은 방은 여덟 개 뿐이다. 어느 방을 원하느냐?”
“방마다 차이가 있습니까?”
청년은 귀찮다는 듯 퉁명스레 답했다.
“좋은 방은 1년에 하급 영석 1천 개, 나쁜 방은 1백 개다.”
한제는 1백 개의 영석을 꺼내 놓았다. 그러자 청년은 무시하는 듯한 눈빛으로 소매를 휘둘러 영석을 거두더니 뒤쪽의 바위에서 영패 하나를 집어 건넸다.
“서쪽에서 다섯 번째 방이다. 가봐.”
말을 마친 그는 다시 눈을 감고 호흡하기 시작했다.
한제는 영패를 한번 훑어보았다. 영패에는 두 갈래의 금제가 걸려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입구를 통과하는 데 쓰이는 것이었다.
시선을 거둔 한제는 영패를 쥔 채 입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입구 안으로 들어선 순간, 바위 아래에 앉아 있던 청년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또 한 명의 외부 수련자로군. 우리 손가의 영력을 이용해 원영기에 이르려는 게지. 흥! 원영을 맺는 것이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저자는 자질이 평범하니 결단기에 이르는 데에도 적지 않은 단약을 썼겠지.”
한제는 그 말을 또렷이 들었으나 신경 쓰지 않고 방을 찾아갔다.
그는 방이 퍽 마음에 들었다. 방은 매우 간소해 침상 하나와 앉을 때 쓰는 깔개, 단로와 반쯤 밀폐된 폐관수련실 하나가 전부였다. 크지는 않았지만 우아한 느낌이었고 은은한 영기도 맴돌았다.
한제는 손을 가볍게 휘둘렀고 그러자 방에 걸린 금제의 위력이 열 배 이상 강해졌다. 그 후에야 방으로 들어간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짙은 영기를 흡수했다. 영기는 한제의 경맥을 맴돌았다.
잠시 후 한제는 탁한 숨을 뱉어내면서 감격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아주 오랜만에 흡수하는 영기로군. 허나 안타깝게도 이곳의 영기가 아무리 진하다한들 내 수준을 높여줄 수는 없지.”
한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선옥은 문정기에 이를 때 거의 다 써버려 남은 것은 일상적인 호흡을 하기에도 부족했다.
“선액은 아직 다섯 방울 남아 있다. 승선과를 먹을 때 마신 네 방울 덕에 체내의 선력은 끊임없이 솟아났지만 얼마 가지는 않았지. 또한, 선액 한 방울로 문정기에 이르긴 했지만 이제 그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선력이 필요해. 지금 선액을 마셔봐야 이전과 같은 효과는 없을 테니 그냥 마시는 건 낭비에 불과해. 내상을 입거나 선력을 일시적으로 얻어야 할 때 쓰는 것이 나아! 그러니 평소 호흡할 선옥을 얻는 것이 지금 가장 급한 일이로군.”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한제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은 약하게 타닥 소리를 내며 방을 환히 밝혀주었다.
방의 천장에는 주먹만 한 푸른색 구슬이 하나 박혀 있었는데 방안의 촛불이 타오르며 낸 연기는 그 구슬에 흡수됐고 점차 흐릿해지더니 천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한제는 처음 보는 광경에 구슬을 자세히 살폈다.
1각 뒤, 구슬은 완전히 밝아졌다. 그 구슬이 내뿜는 푸른빛은 굉장히 부드러웠음에도 촛불을 완전히 압도했다.
“이 구슬에는 세 개의 진이 포함되어 연기를 열로 열을 빛으로 만드는군. 나천성역은 이런 방면에서는 연맹성역보다 훨씬 나은 걸.”
동시에 구슬에서 옅은 향이 흘러나와 기분이 좋아졌다. 호흡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보아 보통 향은 아닌 것 같았다.
“세 번째 진은 이 향을 만드는 진이었군.”
한제는 이내 구슬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