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57
“이제 우리 집 아이도 나이가 슬슬 차고 있지 않은가. 조만간 결혼시킬 생각이라네. 해서, 집을 좀 고쳐야겠는데 나 혼자는… 자네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 왔네.”
청년, 한제가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사내는 안도한 듯 웃었다.
“다행이구먼. 이 노루는 선금으로 두고 가겠네.”
말을 마친 그는 인사를 한 뒤 떠나갔다.
사내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걸상에 앉아 있던 이평은 얼른 노루 곁으로 다가와 이리저리 살폈다.
“아버지, 주 씨 아저씨는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 큰 노루를 잡다니…”
한제는 부드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만 보고 이리와, 평아. 약부터 먹어야지.”
그 말에 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버지, 약은 너무 써요.”
한제는 말없이 방에서 하얀 액체가 든 사발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평은 사발을 받아들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들이켰다.
기어코 사발을 다 비운 이평은 얼른 물동이로 가서 물을 몇 번이나 삼켜댔다.
“아버지, 저는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해요?”
한제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이제 조금만 참거라.”
★ ★ ★
깊은 밤, 달빛이 쏟아지면서 대지에 은빛 면사를 드리웠다. 서늘한 밤에 접어든 기련봉 아래 마을은 고요했다. 종종 개들이 짖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평은 이미 방에서 잠든 상태였다. 작은 얼굴은 창백했지만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듯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웠다.
그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제의 미간에서는 빛이 번득였다. 그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자 미간의 빛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뻗어 나왔다.
한제는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아들의 미간에 댔다. 순간 빛은 이평의 전신을 맴돌았고 그러자 검은 기운들이 순간 아이의 피부로 배어 나왔다.
그 기운은 점점 짙어지면서 전광 속에서 용솟음치다가 결국 피부 밖으로 튀어나왔다. 한제는 얼른 오른손으로 그 기운을 검은 구체로 응축시켰다. 그리고는 그것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잠든 이평의 얼굴에 약간의 혈색이 돌았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아이가 차버린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방에서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그의 몸 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5년이 되었군⋯⋯.”
5년 전, 한제는 염운성으로 돌아와 그의 고향과 꽤나 비슷한 이 낙월촌(落月村)이라는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이평은 여전히 원영(怨嬰)이었으나 류미가 남긴 단약을 먹이고 한제의 번개류 신통력으로 통제한 끝에 원망의 기운은 많이 사라졌다. 덕분에 일반적인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매일 약을 먹이고 원망의 기운을 정리해주지 않으면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터였기에 원망의 기운을 완벽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매일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한제는 이평의 기억을 지운 상태였다. 말하자면 아이에게 새로운 삶을 준 셈이었다.
살육과 분쟁에서 벗어나 이 조용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동안 한제의 마음도 평안해졌다. 그는 꽤나 성실하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한제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목수 일로 생활을 꾸려갔다. 당시 아버지는 한제의 과거 시험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자신의 뒤를 이어 목수 일을 하기를 바랐다.
정원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몇 가지 도구들이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지낸 5년간의 증거와도 같은 것들이었다.
갑옷을 벗다
이평이 다른 아이들과 놀러 나갈 때마다 한제는 아이에게서 당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도 이평만 할 때에는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찾을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달빛 아래 서 있으려니 정원 밖에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점차 다가왔다.
“아이는 자나?”
등이 굽은 노인 하나가 정원 안으로 불쑥 들어오며 물었다.
한제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노인은 손태였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늙어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 한제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3년 째 되던 해, 손태는 마치 인생의 말년을 고독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는 듯 이곳으로 찾아왔다.
손태는 달빛 아래의 집을 자애롭게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는 이평이라는 아이가 퍽 마음에 들었다.
“아이는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인가?”
손태는 한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느긋하게 물었다. 그의 몸에서는 무척 짙은 죽음의 기운이 풍겼다.
한제는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달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한 번의 윤회가 돌아올 때까지⋯⋯.”
“윤회라⋯⋯.”
손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수련은 시키지 않을 생각인가? 자네라면 금세 내로라하는 수련자 가문 직계 자손들도 주눅 들게 할 정도로 키울 수 있을 텐데…”
“아니. 절대 안 돼.”
한제는 씁쓸한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왜? 아이의 타고난 자질도 아주 훌륭하지 않나?”
“수련자의 길을 걷게 할 수는 없어!”
한제는 덤덤한 눈길로 손태를 바라보며 못을 박듯 덧붙였다.
“영원히!”
수련을 해서 남는 것이 무엇이던가.
한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불행하고 외로웠다. 아이에게도 이런 길을 걷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수련계의 잔혹함과 위험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평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을 이미 너무 많이 겪었어. 내가 저 아이에게 평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평생 평안하게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야. 평범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그러니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
한제의 목소리에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결연한 의지가 배어 있었다.
★ ★ ★
세월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또다시 5년이 지나갔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일찍 시작됐고 입동 전에 내린 큰 눈이 대지를 덮으면서 아직 떨어지지 않고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잎들까지 얼려 버렸다. 찬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눈꽃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마치 어떻게든 더 오래 살아보려 애쓰지만 결국 하늘의 뜻을 저버릴 수 없는 사람처럼, 이파리들은 찬바람 한 번에 어쩌지 못하고 그렇게 떨어져나갔다.
지난 5년 동안 낙월촌에서는 세 명의 노인이 죽었고 세 명의 새 생명이 탄생했다. 돌고 도는 윤회는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손태는 더욱 늙은 상태였다. 그는 한제의 옆집에 살고 있었다. 이미 죽음의 기운이 역력한 그는 온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정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휘황찬란했던 지난날을 회상하기를 좋아했다.
이평은 어느덧 열 살이 되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매우 작고 말라서 겨우 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였으나, 5년 전보다 혈색은 더 좋아진 편이었다.
게다가 이평은 상당히 준수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귀엽고 잘생긴 아이를 좋아했고 마을의 여자아이들도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 큰 눈이 내려 날은 더욱 추워졌다.
이날도 손태는 두꺼운 가죽옷을 입고 조용히 정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곁에는 두꺼운 솜옷을 입은 이평이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평아, 어찌 아버지랑 같이 있지 않고 이 늙은이한테 온 게냐?”
손태는 따뜻한 눈으로 고개를 숙여 아이를 바라보았다. 손태는 이 아이가 퍽 마음에 들어, 만약 한제가 수련자로 키우지 않겠다고 하지만 않았다면 제자로 삼아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안 갈래요, 장 부인이 또 왔어요.”
이평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손태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식, 걱정 마라. 네 아버지는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에요, 할아버지. 지난 3년 동안 장 부인이 몇 번이나 왔는지 아세요? 전 다 세어봤어요. 총 열두 번이라고요, 열두 번! 이 마을의 다른 누이들도 그렇고 아주머니들도 그렇고 왜 다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죠?”
이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손태는 소리 없이 웃으며 정원 밖을 내다보았다.
“네 아버지 걱정은 말거라. 자 밖에 주 씨네 딸내미가 왔구나. 널 찾으러 온 것 같은데?”
이평은 흠칫 놀라 정원 밖을 내다보았다. 눈 쌓인 땅 위에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살짝 붉은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라버니, 여기 있어?”
정원 밖에서 여자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외쳤다.
“나 없어!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