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58
그러더니 아예 정원 밖으로 나가서는 입김을 내뿜으며 다가오고 있는 여자아이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손태는 아이의 모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에는 더 깊은 애정이 담겼다.
한편, 그 무렵에 한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맞은편에 앉아 끊임없이 조잘대고 있는 젊은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제는 지난 5년 동안 약간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 잘 녹아들기 위해 외모를 조금씩 변화시킨 것이다.
“평이도 벌써 열 살이야. 아이도 아픈데 어미가 곁에 없어서야 되겠어? 아이 생각도 해야지. 마을 입구에 사는 조 씨네 딸 어때? 숫처녀에 과년한 아이인데 이 씨를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그 아이라면 평이도 자기가 낳은 애처럼 살뜰히 보살필 거야. 이런데도 관심이 없단 말이야?”
아름다운 부인은 노파심이 드는지 거듭 말했다.
한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됐습니다.”
“아이고 이 씨. 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이 씨가 평이를 끔찍이 생각하는 건 내가 알아. 그러니까 여태 다른 여자도 들이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만하면 됐어. 이 씨가 마을에 들어온 것도 벌써 10년이야. 그때는 시집도 가지 않았던 내가 낳은 아이도 벌써 여덟 살이라고.”
부인은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한제를 설득하려 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평이 들어왔다. 아이는 부인을 노려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그 옆에 앉았다. 그러다가 부인이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듯 보이자 이평이 크게 말했다.
“아버지, 저 배고파요!”
한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부인도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뭐 그렇게 싫다면 나도 더 강요할 수는 없지. 하지만 이 씨, 마음 바뀌면 언제든 꼭 말해줘. 알았지?”
말을 마친 부인은 고개를 돌려 이평을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이평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부인의 손을 피했다.
부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조그만 게 성질이 있네. 아버지 좀 보고 배우렴. 너희 아버지는 우리 마을에서 유순하기로는 두 손가락에 꼽잖니. 그러니 마을 아가씨들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지.”
말을 마친 부인은 인사를 남기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
부인이 떠난 뒤 이평은 화가 난 듯 말했다.
“아버지, 혹시⋯⋯?”
이평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튼 생각 마라. 아주머니도 좋은 뜻으로 그러는 거야. 자 이리와. 약 먹어야지.”
이평은 순순히 한제에게 다가가면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저한테 계모를 찾아주려는 거잖아요. 마을에 사는 두호네 아버지도 새 부인을 들였대요. 그런데 두호의 계모는 매일 두호한테 밥도 안 먹이고 혼만 낸다고요.”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네 새어머니를 들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마. 됐지? 자 이제 약 먹자.”
이평은 그제야 좀 마음이 놓이는 듯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이번에는 약이 달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제는 다시 한 번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밖으로 나가 정원에 쌓인 눈을 치운 뒤 도구를 들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평은 창가에서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그는 몇 년 전에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던 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의 표정은 다소 이상해서 당시에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우울한 표정이었다.
이평은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때문에 그 후로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찾아오자 눈이 끊이질 않았고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일도 적어졌다. 허나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러 어느덧 겨울의 추위가 물러났다.
봄이 되자 아이들은 서당에 가서 글을 배웠다.
평온한 하루하루 지나갔다. 맑은 물이 잔잔하게 흘러가듯이.
그 고요한 나날 속에 한제의 마음속 피로도 씻겨 내려갔다.
이평이 점점 성장해감에 따라 한제는 천도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묵묵히 이평을 지켜보았다.
지난 10년 동안 매일 밤 아이의 원망의 기운을 제거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신통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마치 그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허나 그러는 와중에도 생사윤회의 깨달음은 한제의 마음속에 굳어져 갔다. 마치 이평이 성장함에 따라 점점 깊이 새겨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생사윤회에 대한 그의 깨달음은 죽음의 갖가지 변화에 따른 것으로 삶에 대한 깨달음은 부족한 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도심은 편안해짐과 동시에 천천히 원만해져 갔다.
완전한 생사는 원인과 결과의 순환이었다. 한제의 도는 이 평안한 삶 속에서 천천히 승화되고 있었다.
경지는 선계가 조각난 뒤 수련자들이 깨달은 일종의 독특한 신통력이었다. 심지어는 수련자들이 깨닫는 도도 경지로 인해 만들어졌으며 그 근원을 깊이 파고들면 경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경지는 모든 수련자에게 거의 고정적인 것으로 경지가 승화되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류미가 환무정의 눈에 든 것도 환무정이 수련연맹에서 천역주를 찾는 것을 포기한 채 그녀를 데리고 곧장 환가로 돌아온 것도 그녀의 도가 승화될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흡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두렵기도 했던 것이다.
한제는 지금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생사윤회의 경지 중 생(生)에 대한 깨달음이 많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지금 인과의 도가 승화하려는 기색이 보였지만 급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한제의 수련에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 심지어 앞으로 그의 성취를 결정짓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해 한제는 알 듯 말 듯했다. 다만 선택할 수 있었다면 이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모든 수련자가 갈망하는 기회를 얻고자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 ★ ★
봄이 가고 가을이 가기를 반복하면서 또다시 6년이 지나갔다.
가을이 왔을 때, 손태는 한계에 봉착했다. 예측했던 것보다 조금 더 앞당겨진 이별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누워 있었는데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제 부자뿐이었다.
이평은 열여섯 살이 되었다. 이제 외모는 류미와 너무나도 닮아 남자인데도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두 눈은 한제처럼 흑백의 구분이 명확했다.
아이는 총명했고 아는 것도 많았다. 예를 들면 눈앞의 손태가 오래전부터 자신과 아버지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매우 공손하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런 공손함이 말이나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 느낄 수 있었다.
“손태, 그때 그 약속 꼭 지키겠네.”
전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모습의 한제는 침상에 누운 손태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떠나다
손태는 두 부자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지금 그는 조용히 마지막 남은 수명을 태우고 있었다.
그는 한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은혜와 원한으로 얽힌 상대가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동시에 눈앞이 흐려졌다. 마치 수백 년 전 우(雨)의 선계로 돌아온 것처럼.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가다가 마침내 덤덤하지만 늙은 얼굴이 들어왔다.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나 짧았군.”
손태는 미소를 머금은 채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 드리운 죽음의 기운이 순간 절정에 이르렀다가 순간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할아버지⋯⋯.”
이평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는 손태의 평안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울기 시작했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눈빛은 덤덤했다. 생사와 윤회를 간파한 그에게 이런 일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손태의 묘는 낙월촌의 뒷산에 마련되었다.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묻혔다.
이평이 새긴 묘비에는 ‘손태의 묘’라고 쓰여 있었고 낙관으로는 ‘의손자 이평’이라고 새겨졌다.
이평이 열두 살 되던 해, 손태는 그를 의손자로 삼았다. 한제 또한 저지하지 않았다. 손태의 나이는 그보다 많았으니 이평의 할아버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손태의 묘에 시체는 없었다. 그의 시체는 이미 뼛가루가 되어 한제의 저물대에 들어 있었다. 손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세월의 흐름은 한제의 젊은 모습을 앗아감과 동시에 마을 아녀자들로 하여금 한제에 대한 흥미를 잃게 했다. 이제 그녀들의 흥미는 자연히 장성한 이평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평은 제 아버지를 닮아 매우 냉정했다. 평소에는 말수도 많지 않았다.
손태가 죽은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한제는 정원에서 나무로 조각을 하고 있었다. 이평은 그 옆에 앉아 잠자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제의 얼굴에는 주름도 져 있어 노쇠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조각을 할 때에는 집중해서 칼을 대야 한다. 한 번의 칼질을 모두 기억해야 해. 그래야만 장인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어!”
한제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이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제와 마찬가지로 나무를 들고 조각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석양이 지면서 부자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두 사람의 동작은 거의 같았고 심지어는 표정도 무척 닮아 있었다. 저녁 해가 떨어지면서 그림자는 옅어졌지만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느낌만큼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이내 저녁 해가 완전히 떨어져 대지가 어둠에 잠겼다.
“잘 생각해봤느냐?”
정원의 등불을 밝히며 한제가 덤덤하게 물었다.
옆에 앉은 이평은 다 완성되지 않은 조각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한제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아들이 내려놓은 조각을 자세히 살폈다. 다소 조악한 조각은 겨우 3할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이평이 조각한 것은 손태였다. 약간 고고한 기색이 어린 손태의 두 눈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두 손은 각기 다른 결인을 그리고 있었다. 기이한 기운이 그의 몸에 응집되어 있었고 발아래에는 색색의 구름이 깔려 전설 속에 나오는 신 같았다.
“아버지, 왜 제가 손태 할아버지께 선인의 법술을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이평이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물었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태는 이평을 의손자로 삼은 뒤 몰래 수련을 시키려 하기도 했다. 물론 한제가 그를 모를 리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