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60
류미의 단약과 한제의 신통력으로도 이평의 영혼에 담긴 원기를 절반 정도 몰아내는 데 그쳤지만 20년의 평안한 생활에 점점 누그러졌고 8년의 유람으로 정화되었다. 영혼이 진화하면서 이제 그의 영혼 속에 남은 원망의 기운은 한 줄기뿐이었다. 이 한 줄기는 어떤 법술이나 단약으로도 제거할 수가 없는 것으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사라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기련봉 아래에 선 한제는 저 멀리 낙월촌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가서 보고 싶지 않으냐?”
이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가겠습니다.”
한제는 말없이 산봉우리를 올랐다. 이평이 뒤를 따르며 웃었다.
“아버지, 어렸을 때 누군가가 이 기련봉 위에 있는 구름을 한 모금만 마셔도 10년 동안 병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그때 저는 언젠가 아버지가 저를 이곳에 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죠.”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다정한 눈으로 이평을 바라보았다.
꼭대기에 가까워지자 마치 몇 겹의 구름을 밟고 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평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련봉은 분명 장대하지만 아버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보이는 겹겹의 구름층은 어두웠고 이따금씩 전광이 번득였으며, 콰르릉 소리를 냈다. 하늘의 위엄에 이평은 시선을 빼앗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소리가 점점 커지고 습한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어두운 구름이 몰려들면서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내린 비 때문인지 땅에서는 부연 먼지가 일었지만 곧 빗물에 녹아들어 다시 대지로 스며들었다. 마치 하늘을 거스르며 수련하던 수련자가 승천하지 못하고 하늘의 위엄에 다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퍼붓듯 쏟아지는 빗물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는 먼지가 얼마나 될까?
산봉우리 위의 부자는 덤덤하게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비를 뿌리던 구름이 걷혔고 하늘에 걸린 한 줄기 아름다운 무지개만이 한제와 평 앞에 나타났다. 이 무지개는 산봉우리 위의 두 사람에게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한데 그때,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쉭 하고 날아들었다. 그 빛은 콰르릉 소리와 함께 무지개를 부술 듯 달려들었다.
검광 위에는 신선 같은 풍모의 한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서는 푸른 비검이 서늘한 빛을 번득였다.
“엇! 여기 어떻게 사람이…”
그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다가 기련봉 꼭대기에 선 한제와 평을 보고는 당황한 듯했다. 일반인이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엄청난 끈기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감탄한 듯 한제와 이평을 바라보았지만 멈추지는 않고 산봉우리를 넘어 사라졌다.
이평은 눈으로 사내를 쫓았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무척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버지, 저⋯⋯ 저것이 선인인가요?”
이평의 물음에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평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번쩍 고개를 들어 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버지, 저는 정말 수련을 하면 안 되는 건가요?”
한제의 눈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무지개에 닿았다. 그의 눈 깊은 곳에서부터 짙은 슬픔이 차올랐다. 그는 말없어 고개를 저었다.
이평은 더 이상 보채지 않고 그저 멍하니 중년 남자가 사라진 곳만 바라보았다.
기련봉에서 내려오는 내내 이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로 가는 마차에 올랐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차에는 마부와 한제 부자뿐이었기에 마차는 한없이 고요했다.
한제는 짙은 슬픔과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밴 눈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이평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저는 수련을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10년 전, 열일곱일 때 이후 이평이 처음으로 수련에 대해 언급한 두 번째 순간이었다.
한제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너는 수련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
“어째서입니까?”
이평은 한제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불쾌한 듯 물었다.
한제는 고개를 돌려 10년 전 그때처럼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평을 바라보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결국 이평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제야 한제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눈에 담긴 슬픔을 이평은 보지 못했다.
누구도 한제가 왜 이평의 수련을 막으려 하는지 알지 못했다. 손태도 이평도 그랬다. 그 이유를 아는 것은 한제뿐이었다. 그게 류미의 죽음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 그 이유를 말해줄 수는 없었다.
창밖의 풍경만을 바라보며 한제는 침묵했다. 이평 또한 입을 다물었기에 둘 사이의 침묵은 점점 더 짙어져갔다.
한참 뒤, 평은 고개를 돌려 한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의 깊은 주름을 바라보던 이평은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제는 고개를 돌려 온화한 얼굴로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대진(大秦)은 염운성의 3대 제국 중 하나로 그곳에는 여러 부도(副都)가 있다. 기수성(祁水城)은 부도 중 하나였다. 수도에 버금갈 정도로 번화한 이곳에는 하천까지 흐르고 있어 도시는 더욱 붐볐다.
한제 부자는 마차에서 내려 이 번화한 도시에 발을 들였다.
이렇게 화려한 도시는 평의 일생 중 처음 보는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평은 이전의 불쾌함도 다 잊은 듯했다.
한제가 성 동쪽의 화려한 술집으로 들어서자 점소이 하나가 얼른 웃으며 다가와 2층 창가 자리로 안내하더니 곧 술상을 차려냈다.
이평이 들어온 순간부터 술집 안의 수많은 여인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허나 이런 상황에 어렸을 적부터 익숙해진 이평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한제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덤덤하게 술만 들이켰다. 평 역시 음식은 잠깐 맛만 좀 보고는 그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부터 우리는 이곳에서 살 것이다. 살 집을 알아보러 가야겠다.”
술잔을 내려놓고 덤덤하게 말하는 아버지를 보고 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여기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내내 산과 바다만 보고 다니다가 이렇게 번화한 도시를 보니 갑자기 속세로 나온 느낌이네요.”
평이 말을 마치자마자 옆자리에서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허! 촌놈이었군! 그래 보이더라니…”
그곳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백발의 노인으로 무척 엄숙해 보였다. 두 눈은 살짝 어두웠지만 온몸에서 귀태(貴態)가 흘렀다.
그 곁에 앉은 남자는 무척 준수하고 위풍당당했다. 보라색 옷에는 금색 실로 수가 놓여 있어 모르긴 몰라도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인 것 같았다.
다른 한 명은 이제 막 스물쯤 된 듯한 여인으로 폭포처럼 흘러내린 삼단 같은 머리가 탐스러웠다. 절세미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력 있는 외모였다.
비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보라색 옷의 사내였다.
“그래, 촌놈이니 기수성 같은 곳은 처음일 테지.”
목소리를 낮출 생각이 전혀 없었는지, 그 말은 평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평은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한제는 그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심드렁한 눈으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때, 계집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웃겨요?”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웃기고말고! 청희 사매는 재미있지 않아?”
허나 청희라 불린 여인은 불쾌한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본 청년은 차게 코웃음을 쳤다. 그가 이평을 비웃은 것은 이평이 들어선 순간 저 냉담한 청희마저 고개를 들어 그를 힐긋 훔쳐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여인에게 마음이 있지 않았다면 고작 이런 곳에서 밥을 먹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데 그런 청희가 이제 저 계집애처럼 생긴 놈을 두둔하는 듯한 기미까지 보이자 청년은 한층 더 불쾌해졌다.
그는 평을 위아래로 훑더니 피식 웃었다.
“여인이었다면 절세의 미인이 됐겠군. 허나 사내 외모가 저래서야⋯⋯ 창기나 돼야 딱 어울리겠군.”
보라색 옷의 사내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이평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리 늠름한 용모이니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게도 짐승으로 태어났군. 저리 짖는 것을 보면 개가 맞는 모양이야.”
순간, 사내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허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곁에 앉은 백발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정아헌(静雅軒)이 언제부터 저렇게 교양 없는 자가 들락거리는 곳이 되었지? 예의를 가르쳐줘야겠구나!”
말을 마친 노인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던졌다. 젓가락은 번개 같은 속도로 이평의 양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대로라면 이평은 평생 두 손을 쓸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청희의 손이 젓가락을 뒤쫓았으나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한데 그 순간, 젓가락은 힘을 잃더니 툭 떨어져 버렸다. 한제는 조용히 술주전자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냉랭한 눈으로 백발노인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의 눈빛… 허나 그 순간, 백발노인은 몸서리를 쳤다. 마치 수많은 번개가 머릿속에서 터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상대의 눈빛은 예리한 검처럼 그의 심신을 꿰뚫고 영혼에 낙인을 남겼다. 혼백을 흩고 금단을 깨뜨려버릴 듯한 힘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노인은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뻣뻣해졌고 두 손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바들바들 떨렸다.
상대의 시선이 닿자 노인은 미간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동시에 심장이 쿵쾅거렸고 마치 발가벗겨진 채 철천지원수의 앞에 놓인 것처럼 온몸이 서늘해졌다.
“우웩!”
노인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그 선혈에는 금색도 약간 섞여 있었다. 약간 파괴된 그의 금단이 선혈에 섞여 나온 탓이었다.
단 한 순간, 단 한 번의 눈빛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노인은 결단기 수준의 수련자였다. 결단기 수련자가 거리낌 없이 일반인에게 공격을 날리는 행태에 한제는 살기를 내뿜었다. 심지어 저 노인이 건드리려고 한 자는 다름 아닌 한제의 아들이었다.
“너⋯⋯.”
노인이 앉아 있던 의자가 퍽 하고 부서지더니 노인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얼른 저물대에서 단약을 찾아 삼킨 뒤 소리 전달 옥패를 꺼내 부수었다.
술집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수많은 손님이 혼란에 빠졌지만 눈치가 빠른 이들은 허겁지겁 밖으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