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61
보라색 옷의 청년은 완전히 넋이 나간 채 한제 부자를 바라보았다.
청희 역시 멍하니 평과 한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모습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한제의 입이 열렸다.
“이 이한제의 아들에게 네놈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 없다!”
단 한 번의 용서
노인은 지금 금단이 깨지면서 흘러나온 단기가 체내로 흩어져 있는 상태라 입만 뻥끗해도 그 단기가 빠져나갈 터였다. 그리고 단기가 빠져나간다면 수준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단약을 먹은 덕에 단기가 흘러나오는 속도는 서서히 느려졌지만 그 효과는 미미해 영기가 옅은 안개처럼 피부를 통해 발산되고 있었다.
보라색 옷의 청년은 한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자일 줄은 몰랐군. 훌륭해. 허나 염운성에서 손가에게 밉보인다는 것은⋯⋯.”
청년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한제가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청년은 경련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쓰러졌다.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 청년은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인과 청희라는 여인은 사제 관계일 것이고 저 청년이 어느 수준 높은 수련자의 직계 가족이거나 일반인 중 귀족 신분일 터였다. 허나 한제는 청년의 신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현재 수준이라면 염운성에서는 선조에 해당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의 아버지가 평범한 수련자가 아님을 단박에 알아차린 이평은 찬 숨을 들이켰다.
그때, 멍하니 한제 부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청희가 잠시 망설이더니 앞으로 두 걸음 나서며 공손하게 말했다.
“선배님, 이번 일은 저희의 잘못⋯⋯.”
허나 한제는 그녀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그 반응에 청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이평이 미소를 지으며 청희에게 말했다.
“저는 이평이라 합니다. 청희 아가씨도 수련자입니까?”
가뜩이나 여인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외모의 이평이 환한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자 청희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축기에 이르지 못한 이상 스스로를 수련자라 칭할 수 없다 하셨지요. 오늘의 일은 저희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떠나셔야 합니다. 방금 스승님께서 소리 전달 옥패를 부수셨으니 머지않아 누군가가⋯⋯.”
바로 그때, 갑자기 술집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세찬 바람과 함께 세 명의 노인이 들어섰다.
“스승님!”
청희가 얼른 자세를 고쳐 잡으며 공손하게 외쳤다.
세 노인 중 한 명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하고 있는 결단기 수련자를 형형한 눈빛으로 훑어보더니 곧장 한제 부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한제의 영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맞은편의 청년에게 시선이 닿은 순간,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천부적인 자질이 굉장하군! 특히 영혼에는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어. 수련자가 된다면 놀라운 수준이 될 것이다! 저 둘은 절대 겉보기만큼 간단한 상대가 아니야!’
그때,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을 하고 있던 노인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단기가 흩어지는 것도 불사하고 외쳤다.
“작은아버지! 저자가 절 해쳤습니다!”
그가 한제를 가리키며 외치자 방금 들어선 노인이 혀를 차더니 결인을 그려 결단기 수련자의 미간에 찍었다. 그러자 결인은 빠른 속도로 뻗어나가 그물을 형성하더니 단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두었다.
임시적인 조치를 마친 노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매서운 공격을 하다니, 이는 우리 손가를 업신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태로다.”
한제는 노인을 본 척도 않고 술주전자를 내려놓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평아, 가자.”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의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평은 조용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밖으로 향하며 청희를 향해 살짝 웃었다. 청희는 더욱 얼굴이 붉어져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까 노인이 자신을 공격할 때 이를 막아주려 했던 모습 때문인지 이평은 청희에게 호감이 생겼다.
그때, 좀 전에 술집에 들어선 세 노인이 한제 부자 앞을 가로막았다.
“똑바로 말을 한 다음에 가도 늦지 않을 듯한데!”
허나 한제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그저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콰르릉!
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걸음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세 노인의 심신에 격렬한 충격을 가했다. 마치 한제의 걸음에 심신을 짓밟힌 듯한 느낌이었다.
나중에 들어선 두 원영기 중기 수준의 노인들은 이 한 번의 충격에 표정이 급변해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제의 몸에서는 선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나, 세 노인이 평생 봐왔던 그 어떤 신통력보다도 강력했다. 이는 어느 이름난 가문의 선조나 되어야 발휘할 수 있는 기세이자 스스로의 도를 가진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이었다. 이 정도라면 문정기 수준의 수련자라 해도 이 신통력에 대항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가장 앞에 선 노인은 원영기 후기 절정에 이르러 천도를 깨닫는 과정에 놓인 상태로 이미 화신기에 반 발짝 정도 들여놓은 상태였지만 당연히 한제의 기세를 견뎌낼 수 없었다. 마치 영혼을 직접 공격당한 듯한 느낌에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제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술집을 빠져나갔다. 평은 그 뒤를 따라 술집을 빠져나가는 순간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청희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청희의 얼굴은 불타오르듯 더욱 붉어졌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가주지. 허나 다음은 없다!”
한제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와 손가 수련자들의 귀에 떨어졌다. 그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두 눈에는 충격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평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손가와 인연이 있는 건가요?”
“인연이 있지. 일찍이 손가 후손들이 1백 년 동안 평안할 수 있도록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나저나 청희라는 아이, 괜찮더구나.”
한제는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아들을 힐긋 바라보았다. 이평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얼굴은 붉어진 상태였다.
한제는 기수성 북쪽에 큰 정원이 딸린 집을 마련했다. 방도 적지 않았고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집을 팔면서 남겨둔 종들도 몇 있었다.
한편, 이 무렵, 손가의 기수성 지부에서는 한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때문에 엄청난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염가의 선조와 떠돌이 거사가 사라진 뒤, 20여 년에 걸쳐 손가는 손석 덕분에 이전의 염가가 차지했던 것보다도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제 염운성에서 대체 불가능한 가문이라 할 수 있었다. 이에 손가 사람들은 점점 기고만장해져갔다.
손가 기수성 지부의 대전 안에는 세 명의 화신기 수준 장로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술집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이런 자리가 처음인 청희는 잔뜩 긴장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결단기 수준 수련자인 그녀의 스승 역시 곁에 서 있었는데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그의 수준은 이미 결단기에서 축기기 후기로 떨어진 상태였다.
“그자가 정말 그렇게 말했던가?”
손가의 세 장로 중 붉은 얼굴의 노인이 실눈을 뜬 채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원영기 후기의 노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분명 이번 한 번만 넘어가주겠다, 다음은 없다, 그리 말했습니다.”
그 말에 푸른 옷을 입은 또 한 명의 장로가 차게 코웃음을 쳤다.
“무엄한 자로군! 우리 손가를 도발하는 이가 또 나타난 것인가? 눈빛 한 번에 결단기 수련자의 금단을 깨고 걸음 한 번에 원영기 수련자 세 명을 놀라게 했으니 그 수준은 최소한 영변기에 이르렀을 터.”
“영변기면 뭐 어쩔 텐가? 우리 손가는 선조께서도 아직 살아계시고 1백 년 동안 비호해 주겠다던 그 선배의 약속도 있네. 그분은 천환성의 환가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분 아닌가!”
세 장로 중 마지막 한 사람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자의 성은 무엇이던가?”
붉은 얼굴의 장로가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그러자 영변기 후기의 노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저 방계 혈통 계집이 그들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으니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붉은 얼굴의 노인이 청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알고 있느냐?”
청희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릅니다.”
“겁도 없구나.”
붉은 얼굴의 노인은 단박에 청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간파하고는 대노해 고함을 질렀다.
청희는 한층 더 고개를 숙였다.
“정말 모릅니다.”
붉은 얼굴의 노인은 차게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다, 오늘은 모두 이만 물러가라. 본부에 알렸으니 머지않아 영변기 수련자들이 올 것이다. 그리고 저 계집은 마음에 다른 뜻을 품었으니 손가에서 쫓아내라!”
★ ★ ★
한제의 저택 정원 안.
문에 걸려 있던 편액은 이미 새것으로 바뀐 상태였다. 그 편액에는 한제의 필체로 ‘이가 저택’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집 안에 남아 있던 종들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때문에 저택에는 그리 썰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달빛이 쏟아지는 깊은 밤, 뒤뜰 서재에 한제 부자가 마주앉았다.
“평아, 너는 19년 동안 평안한 삶을 살았고 이후 8년간 산과 바다를 돌아다녔다. 앞으로 30년 동안은 부귀한 삶을 살게 할 것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어봐야 하듯 부귀빈천 역시 모두 겪어봐야 하는 법이다.”
한제의 말에 평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 혹시 이건 제가 수련하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에 대한 보상인가요?”
한제 역시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두 눈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한제가 마음속에 묻어놓은 비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허나 그는 아들이 수련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도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한 줄기 원망이 남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평아, 내가 막는 것이 아니라⋯⋯ 너는 수련을 할 수 없는 것이란다.’
한제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에 어린 슬픔은 너무나 짙어 쉬이 흩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부귀란 무엇입니까?”
평이 조용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