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63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지났다. 허나 그동안 이평에게서는 단 한 번의 소식도 전해져오지 않았다. 한제 역시 일부러 신식으로 아들을 살피려 하지 않았다. 이평에게 자유와 선택을 줬으니 막거나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염운성 북부에는 지난 3년 동안 새로운 교파가 하나 생겨났다. 천행파(天行派)라는 이름의 이 교파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만 유행했을 뿐이었으나,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어갔다.
각종 소문도 들려왔다. 천행파의 수장이 선인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그 수장 곁에는 언제나 한 여인이 붙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또다시 7년이 지났고 한제는 더욱 늙어갔다.
그러는 사이 천행파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심지어 기수성에도 교도들이 있었다.
어느 가을 한제는 집 밖으로 나가 평소처럼 멀지 않은 객잔에서 홀로 조용히 술을 마셨다. 눈빛은 흐려져 세상 어떤 것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는 뭔가를 기다리듯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객잔 심부름꾼은 이 노인을 접대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술상을 차려준 뒤 일을 보러 갔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객잔은 시끌벅적해졌다.
“들었어? 천행파의 세력이 이미 염운성의 절반에 이르러 3대 제국 최고 교파로 자리 잡았다지.”
“그럼, 들었지. 나는 며칠 전에 제단에도 가 봤다고.”
“우리 이웃집 장 씨도 천행파 교도인데 매달 양식을 보내준대.”
“대진, 제산(帝山), 진운(尘雲) 세 나라 중 제산국은 거의 모든 백성이 천행파 교도라더군.”
“이거 머지않아 세 나라에서 그 교파를 섬멸하려 할 수도 있겠는 걸?”
“글쎄, 천행파가 나타난 것도 벌써 10년인데 섬멸하려 했다면 진작 손을 썼겠지.”
“그보다 나는 천행파 수장과 그의 곁에 있다는 여인의 관계가 더 궁금해.”
한제는 그런 이야기들이 자신과 전혀 관련 없다는 듯 덤덤하게 술을 마셨다. 그의 시선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이미 중년에 접어든 채 드높은 기세를 자랑하는 이평에게 닿아 있는 듯했다.
★ ★ ★
염운성 북부, 제산국 수도의 화려한 대전에는 준수한 중년 남자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구레나룻은 희끗했고 날카로운 눈썹 아래의 두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푸른 옷을 입은 그는 매우 화려하고도 귀해 보였고 범접하기 힘든 위엄도 흘러넘쳤다.
사내는 고민에 빠진 눈으로 앞에 놓인 탁자 위의 지도를 한참이나 살피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이미 깊은 밤이었다. 달빛이 쏟아졌다.
사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밖으로 나가더니 달빛 너머 먼 곳을 내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도 지금 이곳을 보고 계시려나⋯⋯?”
그때, 부드러운 천으로 된 외투가 그의 몸을 덮었다. 사내는 손을 들어 어깨 위의 부드러운 손을 쥐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안 잤군.”
남자의 뒤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었다.
여인은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밤바람이 차. 들어가서 쉬자.”
사내는 여인의 손을 잡은 채 밝은 달을 올려다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청희, 우리 아버지는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청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이 남자와 10여 년을 함께 살아왔고 그의 아버지와 했던 약속에 대해서도 사실대로 털어놓은 덕에 둘의 관계는 깊어질 대로 깊어졌지만 아직까지도 청희는 소녀처럼 부끄러워하곤 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청희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평은 피식 웃으며 잡은 청희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내 아버지는 곧 당신의 아버지이기도 하지.”
그의 말이 청희의 귀에는 한없이 달콤하게 들렸다.
그녀도 밝은 달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분명 쉬고 계실 거야.”
허나 이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우리 아버지는 지금 날 보고 계실 것 같아.”
세월
한제는 정원에서 먼 곳에 닿아 있던 시선을 거두고는 정원의 큰 나무 밑에 앉았다. 가을바람에 나뭇잎들이 솨아아 흔들렸고 이따금 떨어져 내린 낙엽이 흩날렸다. 이 낙엽들은 결국 나무 아래에 쌓였다. 마치 여행을 나갔던 아이가 피곤에 지쳐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듯이.
또다시 5년이 흘렀다.
천행파의 세력은 이미 세 제국을 완전히 압도한 채 온 염운성으로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러자 결국 제산국에서 국경 내의 천행파를 제압하고 대량의 병사를 파병하여 섬멸을 진행해 나갔다. 이로 인해 염운성의 일반인 세상은 완전히 난리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행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겨우 보름 만에 제산국의 병권을 틀어쥐었고 제산국 문무백관 중 칠 할은 천행파 교도가 차지하게 됐다. 이를 본 대진과 진운 두 나라에서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사자를 보내 천행파와 연계를 시도했고 서로를 침범하지 않기로 협약을 맺었다.
이제 제산국이 사라지고 천행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생겨났다.
천행국의 수도에 선 이평은 용포를 입은 채 지존의 자리에서 천하를 내려다보았다. 청희는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켰다.
천행국 신하들은 왕을 우러러보았다. 그들은 이평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이평 역시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특별히 중시하지 않는 듯했다.
이평의 눈빛은 세상을 뛰어넘어 저 먼 곳에 닿아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염운성의 수련자들도 천행국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점차 손을 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한제의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는 더욱 늙어가고 있었다.
천행국이 세워진 지 5년째 되는 해, 대진과 진운은 협약을 깨고 천행국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도 한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는 온종일 객잔 안에 앉아 주위 사람들이 세 나라에 관련된 소문들을 떠들어대는 것을 들으며 묵묵히 술을 마실 뿐이었다.
예전의 점소이는 친척에게 돈을 빌려 객잔을 인수해 이제 사장이 되어 있었다. 새로 고용된 점소이도 한제를 잘 알고 있어서 그가 들어오자마자 얼른 술상을 차려냈다.
“이제 나이도 생각하셔야죠. 술은 적당히 드세요.”
선량한 점소이는 술을 내오며 친절하게 말했다.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한 주전자만 마시지.”
그 대답에 점소이는 웃으며 다른 손님을 맞았다. 그러다 틈이 나자 문가의 계산대에 기대어 서서 한제의 늙은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뱉어내듯 중얼거렸다.
“이 씨 할아버지의 삶도 기구하군. 저렇게 나이가 드셨는데도 곁에 사람 하나 없다니…”
계산대 뒤에서 주판을 튕기던 사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인네 저택의 계집종에게 들었는데 아들이 한 명 있대. 다만 아주 오래 전에 집을 떠난 뒤로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다지.”
그러거나 말거나 한제는 말없이 술을 들이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해질 무렵이 되자 저택의 늙은 종이 객잔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늙은 주인이 술에 취해 쓰러져 골병이라도 날까 걱정스러워하고 있었다.
종을 따라 달빛이 비추는 길을 지나 저택으로 돌아온 한제의 넓은 방은 등불 하나 밝혀져 있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종을 물린 한제는 정원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시간도 참 빠르구나. 평이 벌써 마흔일곱이니⋯⋯. 어쩌면 벌써 실마리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한편, 세 나라의 전쟁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수련자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묘하게 흘렀으나, 천행국의 왕이 직접 말을 몰고 전장에 나선 뒤로는 또다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수련자들도 분분히 그에게 패퇴해 물러났고 점차 수련자들은 이 전쟁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이는 이평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가 염가 손가 세 가문에서 내린 명령 때문이기도 했다.
막사의 상석에 앉아 있던 이평은 신하들을 모두 물린 뒤 밖으로 나가 멀리 떨어져 있는 기련봉 쪽을 바라보았다.
그도 이제 머리가 완전히 센 상태였다.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지존이 되었으나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오히려 번잡한 일들이 어깨를 짓누르면서 갈수록 피곤해져갔다.
문득 낙월촌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냈던 소년 시절이 떠올랐다.
그가 말없이 기련봉 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청희가 다가와 곁에 섰다.
“저기가 어렸을 때 지낸 곳이라고 했지? 가보고 싶어?”
청희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평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평과 청희는 한 무리의 군사를 이끌고 기련봉 쪽으로 내달렸다. 이평의 눈에 점차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멀리서 밥 짓는 연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낙월촌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수많은 병사들의 기척에 마을 안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전쟁으로 난리인 시기이니만큼 낙월촌 사람들의 경계심도 높아졌는지 어느새 농기구와 횃불들을 손에 쥔 채 하나둘 나타났다.
이평은 말없이 경계심 가득한 마을 사람들을 살폈지만 아는 얼굴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해갔다. 아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알아보기에는 너무 오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게다가 요 몇 년 동안 적지 않은 사람이 전쟁으로 죽었을 터였다.
“뒷산으로 가자. 그곳에 손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곳이 있으니까.”
그가 말을 타고 천천히 이동하자 마을 사람들이 길을 내주었다.
그때, 유약하면서도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이평?”
이평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돌렸다. 40대에 접어든 한 중년 부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늙긴 했지만 평은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낙월촌을 떠나던 날, 자신에게 ‘미워’라고 말하던 바로 그 소녀였다.
그 무렵, 우주 너머에서는 탐랑이 망월로 이루어진 운하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를 씰룩이던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