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07
허나 그 빛이 향한 곳은 허공이 아니라 이원이었다.
그 순간, 이원의 몸을 억누르던 압박감이 약간 풀어졌다. 그러자 이원은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미간을 눌렀다. 그의 미간에서는 갓난아이 팔뚝 굵기의 검은 선이 튀어나오더니 한 줄기 금제의 낙인이 되었다.
“파멸심금(破滅心禁)!”
이원의 외침에 금제는 빛을 내뿜으며 미친 듯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붉은 인영이 강림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기세가 퍼져 나갔다. 반경 1천 척을 억누르던 압박감이 곧장 흔들렸고 파멸의 금제는 흩어지는 대신 수천만 개의 검은 선으로 변했다. 이 검은 선들은 서로 조합되면서 기이한 문양을 이룬 뒤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서로 기이하게 연계된 금제가 흩어진 순간, 이원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진정한 파멸금을 발휘하는 것은 그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봉인!”
그의 외침에 금제들은 빠르게 퍼져나가 붉은 인영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때, 인영의 온몸에서 피처럼 붉은 빛이 폭발하듯 뿜어지면서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 붉은 빛은 금제들이 몰려든 순간 번쩍이기 시작했다. 한데 금제들은 돌연 자폭하기 시작했고 온 하늘이 격렬하게 뒤흔들렸다. 대륙이 불안정해지면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했다.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약간 풀어진 순간, 한제는 이원을 붙잡고 발을 굴러 붕괴 직전의 전송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전송진에서 밝은 빛이 번쩍이더니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에 한제는 왼손으로 강하게 후려쳐 전송진을 빛으로 흩어버렸다.
반경 1천 척 안이 순간 적막에 휩싸였다. 피처럼 붉은 인영은 천천히 걸어와 이미 사라진 전송진 위에 선 채 말없이 주위를 살폈다.
한참 뒤, 그는 한쪽 발로 지면을 세차게 굴렀다.
쾅! 쩌적!
한 줄기의 거대한 균열이 그의 발아래에서부터 퍼져 나가더니 대지가 둘로 나뉘었다. 주위는 온통 끔찍한 균열로 가득했다.
규열기 수준을 뛰어넘는 수련자의 기세에 대륙은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온통 균열로 가득 찼다. 그리고 곧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공간의 균열이 점점 많아지더니 끊임없이 모든 것을 삼키기 시작했다. 지면의 균열 또한 그 허무 속에 녹아들었다.
반 시진 뒤, 이곳의 하늘은 더 이상 하늘이 아니었고 허무로 변해버린 땅 역시 땅이라 할 수 없었다. 뇌의 선계의 조각 중 하나가 이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 격렬한 변화에 그 조각에 있던 몇 명의 나천성역 수련자들은 화들짝 놀라 달아나려 했다. 허나 무사히 도망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조각이 붕괴되며 모든 것을 흡수해버릴 듯한 회오리가 한바탕 일었다. 뇌광의 사슬들 역시 이 회오리에 이끌려 그 회오리의 중심으로 빨려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슬들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조각들까지 영향을 받으면서 뇌의 선계 전체가 거대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이동했다.
허나 이런 상황을 야기한 당사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심지어 뇌의 선계가 전부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기세였다.
“이한제, 다음에는 절대 도망치지 못한다!”
인영은 몸을 홱 돌려 한 발을 내딛더니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다름 아닌 혈조였다. 그는 뇌의 선계에 들어온 이래 다른 것은 일절 신경조차 쓰지 않고 가능한 한 최대의 속도로 조각들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조각에 도착할 때마다 그는 곧장 신식을 펼쳐 그 조각을 훑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딸, 그리고 딸을 사로잡은 한제뿐이었다.
★ ★ ★
어두운 하늘에서는 수시로 금제의 빛이 번득였다. 그리 높지 않은 하늘은 새카만 색으로 뒤덮인 채 강렬한 압박감을 내뿜었다. 땅에는 작은 산들이 기복을 이루며 늘어서서 산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이따금 하늘에서는 균열이 벌어지며 서늘한 기운을 발산한 뒤 천천히 맞물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귀를 찌를 듯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1백 척 높이에 세워진 제단이 갈색 땅과 긴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망가졌고 잔뜩 균열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심지어 제단 꼭대기까지 이어진 것도 있었다.
제단 위 평평한 대에서 밝은 빛과 함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사람, 한제는 또다시 죽음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만약 세 번째 눈의 신통력과 이원의 파멸금이 없었다면 전송진을 눈앞에 두고도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고 틀림없이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혈조⋯⋯.”
한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때, 창백한 얼굴의 이원이 전송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하기 시작했다.
한제는 말없이 그 옆에 앉아 신식을 펼쳐 사방을 관찰하면서 경계를 섰다. 허나 머지않아 신식을 거두어야만 했다. 매번 신식을 펼치기가 무섭게 하늘에 수시로 나타나는 균열이 집어 삼켜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안전하겠군.’
한제는 묵묵히 산골짜기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혈조가 여기까지 쫓아왔다. 그리고 내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날 공격했어. 내 혼을 거두어 요석설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거겠지.’
한제가 저물대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딸을 내어줘도 혈조는 계속해서 날 쫓아올까?’
함정
한제는 선위를 소환해 이원의 보호를 맡긴 후 결인을 그려 사방에 보호막을 생성했다. 이어서 저물대를 두드리자 금제로 이루어진 빛 덩어리가 튀어나오더니 사람 몸집만큼 커졌고 마치 연꽃이 피어나듯 펼쳐졌다.
그 안에는 요석설이 긴 머리를 양어깨 위로 늘어뜨린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1백 년이 넘게 감금되어 있던 탓에 그녀는 매우 초췌해진 상태였다. 속눈썹을 떨며 눈을 살짝 뜬 그녀는 한제를 본 순간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기쁨도 슬픔도 읽어낼 수 없는 눈빛이었다.
“네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내 아버지가 발휘한 혈술이로구나. 그리고… 네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지는군.”
한제는 그저 멀거니 요석설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 풀어주려는 건가? 아버지께 널 죽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게 하려는 속셈이겠지?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이다. 나 또한 널 그렇게 쉽게 죽일 마음은 없으니까!”
한제를 비웃던 요석설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짙은 원한이 들어찼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널 풀어주든 아니든 내가 맞게 될 결과는 같단 말이로군.”
요석설은 한제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날 죽일 엄두가 안 나겠지. 날 죽이는 것은 날 풀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다고 나를 봉인해둔다면 넌 영원히 내 아버지에게 쫓기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붙잡히겠지. 그럼 결국 나는 풀려날 테고…”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요석설을 바라보다가 이내 오른손을 들어 그녀에게 몇 갈래의 금제를 더했다. 그러자 빛 덩어리는 다시 수축하여 작은 공이 되어 저물대로 되돌아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는 먼 곳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풀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은 내가 아니라 혈조에게 달려 있다.”
결심을 굳힌 듯 한제의 눈에 담긴 번민과 두려움은 사라졌다. 이내 그는 사방에 펼쳐두었던 금제를 거두고 호흡 중인 이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원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탁한 숨을 길게 뱉어냈다. 그리고는 두려움이 깃든 눈으로 입을 열었다.
“허 형, 그자는 누구입니까?”
한제는 이원을 향해 포권을 했다.
“나 때문에 이 형까지 말려들게 됐군요. 그는 혈조라는 자로 매우 강력한 수련자입니다. 저와는 원한이 깊지요.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간 뒤로는 각자 갈 길을 갑시다. 이 형까지 또 이 일에 연루되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오.”
한제의 말에 이원은 쓰게 웃었다.
“네 번째 등급까지 수련한 파멸금에 심금까지 발휘했는데도 피하다니… 그자는 쇄열기 아니면 정열기 수준의 수련자겠지요. 그 정도 수준이라면 나천성역에서도 손꼽히는 자겠군요. 대체 어쩌다 그런 자의 화를 산 겁니까? 휴⋯⋯ 만약 내 파멸금이 일곱 번째 등급에 이른다면 그자를 봉인할 수도 있을 텐데 안타깝군요.”
한제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형,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간 뒤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이원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자의 수준이 높다 한들 우리가 먼저 나서 그를 도발하지 않고 숨어 다닌다면 그도 별다른 수는 없을 겁니다. 좋습니다, 일단 이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 허 형 말대로 출구부터 찾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는 신식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저 공간의 균열에 삼켜버려지거든요.”
한제의 말에 이원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훌쩍 날려 제단 아래로 가더니 흙을 한 줌 쥐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앞으로 몇 발짝 나아가 어느 나무에서 가지를 꺾더니 살짝 핥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
“허 형, 그 꼭두각시를 좀 빌립시다!”
이원이 천천히 날아오르자 허공에서 갑자기 공간의 균열이 나타나면서 그를 삼킬 듯 벌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한제는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한 듯한 이원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선위 꼭두각시에게 명령을 내렸다. 선위는 온몸으로 금빛을 번득이면서 훌쩍 뛰어올라 이원 곁으로 다가갔다.
균열이 나타난다 해도 선위 꼭두각시의 주먹질로 형성된 회오리가 그 균열을 흩어버릴 터였다. 효과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대로 보호 작용은 할 수 있었다.
이원이 점점 더 높이 날아오름에 따라 공간의 균열도 점점 더 많아졌고 선위 꼭두각시는 그때마다 한 줄기 금빛 회오리를 일으키며 이원의 사방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허공으로 떠올라 먼 곳을 내다보던 이원은 어느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그때, 갑자기 이원 아래쪽 허공에 보통의 균열보다 몇 배는 더 큰 균열이 나타났다. 그 균열은 곧장 엄청난 흡입력을 발휘해 금방이라도 이원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이원이 흠칫 놀란 그때, 주위에 대량의 균열이 연달아 나타났다. 선위 꼭두각시가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일 듯했다.
한제는 몸을 앞으로 날리며 저물대에서 산수도가 그려진 병풍을 꺼냈다. 병풍은 허공에서 펼쳐지면서 대부분의 균열을 가로막았고 한제는 그 틈에 재빨리 다가가 한손으로 이원을 잡아끌었다.
거대한 균열이 맞물리면서 이원을 삼키기 직전에 두 사람과 선위 꼭두각시는 가까스로 벗어나 지면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 무렵, 하늘에 펼쳐져 있던 병풍은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균열들에 망가져가고 있었다. 한제는 병풍을 거두어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허 형,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이원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묻더니 대답할 틈도 없이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인들은 보통 저물대가 아니라 자신이 마련한 공간을 사용했지요. 그 공간은 그곳을 만든 선인이 죽은 뒤에도 무너지지 않지만 다시 열기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한제의 표정도 변하기 시작했다.
“이 형의 말은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이곳이 선인의 저물대와 같은 공간이란 말입니까?”
이원은 얼굴 가득 화색이 돈 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겁니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이 공간은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안정적인 상태였다면 우리는 이곳에 들어올 수도 없었겠지요. 이곳의 흙이며 산, 숲, 바위도 모두 밖에서 들여온 겁니다!”
한제는 이원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조심스레 물었다.
“이 형, 그렇다면… 이곳이 무너진다면 이 안에 있는 모든 것들도 다 함께 파멸되는 것 아닙니까?”
이원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