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14
그러니 분신이 죽는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만약 이런 상황에 어딘가에 숨어서 더 수준을 높인 다음에 나서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한제라고 할 수 없었다. 결과가 어떻든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는 법이었다.
“고신으로서의 존재를 들킬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설사 들킨다 해도 그게 어떻단 말인가?”
고신이 물려준 기억의 유산에 담긴 수많은 공격용 신통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방어용 신통력은 4성급 고신이 된 이래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고신족이 어린 고신을 보호할 때 쓰는 화령(化靈)이라는 신통술이었다.
화령술이란 한 수련성에 녹아들어 영력을 흡수하는 대신 온몸을 영기로 만들어 수면 상태에 접어들게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쓴다면 고신과 동등한 수준의 존재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수련자의 신통력과는 차원이 다른 고신이 신통력이었다.
“유일하게 걱정스러운 것은 탁삼이다. 하지만 8성급 고신인 그가 빠져나왔다면 곧장 다른 수준 높은 수련자들이 알아차렸겠지.”
혈성에는 수많은 혈노(血奴)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혈조에게 통제되는 이들로 그들의 원신에는 혈조의 낙인이 찍혀 있어 혈조가 살면 그들도 살고 혈조가 죽으면 그들도 죽었다.
혈노의 대부분은 혈조가 사방의 수련국에서 억지로 끌고 온 이들로 혈조는 이들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천부적 자질이 있는 소년들을 모아 그들에게 혈단(血丹)을 먹인 뒤 혈위(血衛)로 제작하여 혈성을 지키게 했다.
혈조는 자신의 딸을 제외한 모두에게는 태생적으로 메마르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혈성을 통틀어 혈조와 그의 딸 요석설을 제외한 모든 생명들은 전부 그들의 노예나 다름이 없는 셈이었다.
혈각(血閣) 밖 제단 위에 앉아 있던 자심은 피곤한 기색이 어린 얼굴로 수시로 혈각을 돌아보았다. 혈각은 혈조가 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곳으로 그 누구도 그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때, 몇 갈래의 핏빛이 먼 곳에서 빠르게 다가오더니 자심 앞에서 네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원력의 파동으로 볼 때 넷 모두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든 수련자인 것 같았다.
“마님, 또 한 무리의 혈노들이 죽었습니다.”
한 노인이 고개를 숙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심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적지 않은 혈성의 혈노와 혈위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벌써 7할 이상이 죽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자심은 상당히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을 혈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마님, 혈조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또 다른 노인이 고개를 들고 자심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물었다.
“무엄하다. 감히 그런 것을 묻다니!”
자심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냉랭하게 일갈했지만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이전이었다면 절대 이런 질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혈조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상태였다.
노인은 냉소하며 몸을 돌려 나아갔다.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동시에 약간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의 몸에도 역시 혈조의 낙인이 찍혀있었지만 지금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난 6천 년 전 혈조에 의해 낙인이 찍혔고 여태까지도 혈조의 허락 없이는 혈성 밖으로 반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혈조에게 뭔가 이상이 생겼다. 그렇다면 나 역시 곧 죽게 되겠지. 그렇다면 죽더라도 나의 고향에서 죽을 것이다!”
노인의 표정에 슬픔이 차올랐다.
자심 근처에 있던 세 노인은 하늘 가장자리로 어물어물 사라져가는 옛 동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세 노인 역시 말없이 세 줄기의 빛이 되어 곧장 하늘로 솟아올랐다.
“겁도 없구나! 혈조께서 돌아오시면⋯⋯.”
자심이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노인이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끄럽다! 혈조의 장난감에 불과한 주제에… 진정한 주인마님도 아닌 네게 우리가 허리를 숙인 것은 혈조 때문이었다! 혈조가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이 혈성에서 근 1만 년을 보내오는 동안 본 너와 같은 혈조의 노리개만 해도 수십 명이 넘는다!”
말을 마친 그는 하늘로 솟구쳐 올라 이내 사라졌다.
자심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 줄기의 붉은 빛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자 아직 혈성에 남아 있던 혈노들의 눈에 갈등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는 곧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그들은 하나둘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자심은 결심한 듯 몸을 돌려 혈각으로 향했다.
단번에 혈각 앞에 이른 그녀는 혈조가 혈각을 열 때 쓰는 수법을 떠올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
한데 그때,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순간 짙은 위압감이 온 혈성을 뒤덮었다. 흠칫 놀란 자심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안색은 순간 하얗게 질려버렸다.
“저… 저게… 뭐지?”
한편, 네 노인은 그 무렵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각자 몸을 돌렸다.
한데 막 흩어지려던 그들은 순간 뭔가를 느낀 듯 한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서는 새카만 우주에 돌로 이루어진 긴 강이 한 줄기 날아들고 있었다. 그 강의 위에는 1천 척에 달하는 거인이 서 있었는데 그 거인의 두 눈은 짙은 살기로 번득였다.
네 노인은 순간 서로를 얼른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네 줄기의 빛이 되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혈성으로 돌진해오는 거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혈조, 너에게도 오늘과 같은 날이 오는구나!’
네 노인은 거의 동시에 이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들을 뒤따라 날아오른 수많은 혈노들은 하늘로 진입하자마자 한제의 본체를 보고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하지만 혈성을 덮치려 달려드는 그에게 맞서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혈노들은 모두 얼른 자리에서 벗어났고 심지어 몇몇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혈성을 바라보았다. 혈성의 멸망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듯…
혈노들에 대해 단박에 파악한 한제는 멈추지 않고 대량의 돌 조각들을 이끈 채 빠른 속도로 혈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혈성과 바짝 가까워진 순간, 한제는 양손으로 각각 하나의 돌 조각을 쥐더니 힘껏 내던졌다.
콰르릉!
거대한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돌 조각은 마치 유성처럼 혈성으로 돌진했다.
한데 그때, 돌연 한 줄기 핏빛 장막이 나타나 날아들던 두 개의 돌 조각을 부수었다.
한제의 두 눈은 더욱 싸늘하게 변해갔다. 이내 그는 두 팔을 마구 휘둘렀고 거대한 돌 조각들이 하나둘씩 혈성으로 내던져졌다.
쾅! 콰르릉!
셀 수 없이 많은 돌 조각들이 날아들었다. 핏빛 장막은 강력했지만 혈조의 통제가 없는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1각 정도를 버티던 핏빛 장막은 이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대량의 돌 조각이 혈성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돌 조각 하나가 혈성에 부딪힐 때마다 고리형 파문이 일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자심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지면의 떨림과 파멸적인 힘에 그녀의 온몸과 마음도 떨려왔다. 그녀는 거대한 돌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마다 지면이 격렬하게 뒤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는 대체 어떤 힘이 이런 신통력을 가능케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 무서워⋯⋯.”
자심은 이를 악물었지만 마음속은 이미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혈각을 바라보며, 혈조가 혈각을 열 때 그렸던 결인을 그렸다. 혈성에서 지낸 몇 년 동안 혈조가 혈각을 열 때마다 그 결인을 유심히 보고 기억해온 것이다.
혈각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나, 혈조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또한, 혈성 안에서는 내란이 일어나 혈노들이 달아나는 중이며, 외적의 침입까지 더해진 상황이었다.
자심은 결심을 굳히고는 더욱 빠르게 두 손을 놀리며 결인들을 계속해서 그려냈다. 그러자 혈각은 순간 붉은 빛을 번득이면서 하나의 통로를 내어주었다. 자심의 눈이 흥분의 빛으로 반짝거렸다.
바로 그때, 하늘이 돌연 또 한 차례 어두워지더니 지면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심은 흠칫 놀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그녀는 멍해지고 말았다.
하늘에는 키가 1천 척에 달하는 거인이 나타나 있었다. 그의 냉랭한 눈빛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곧게 자심에게 닿아 있었다.
자심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거인과 계속해서 떨어지는 거대한 돌 조각들을 바라보던 그녀의 마음속에서 짙은 두려움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여 혈각을 바라보더니 곧장 그 안에서 뻗어 나온 빛의 통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그 통로에 닿은 그 순간…
“꺄아악!”
그녀의 입에서는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통로 안의 붉은 빛이 몸에 닿자 그녀의 피부는 빠르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부패한 피부에서는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고 심지어는 원신마저 무너져 내렸다.
한제는 순식간에 푸른 연기로 흩어진 여인을 보다가 혈각에서 뻗어 나온 붉은 빛의 통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손으로 혈각을 움켜쥐었다. 혈각과 그 반경 1천 척의 지면까지 그의 손에 뜯겨 나와 버렸다.
그 순간에도 하늘에서는 돌 조각들이 계속해서 떨어지면서 혈성을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한제는 한손에 혈각을 쥔 채 빠르게 지면에서 벗어났다.
콰르릉!
거대한 소리와 함께 혈성은 점점 더 폐허로 변해갔고 파문이 퍼져나가면서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잠시 후,진동하던 혈성에서 튀어나온 한제는 이내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졌다.
사방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혈노와 혈위들 중 그를 막으려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한제가 사라진 쪽을 향해 포권을 하기도 했다.
한제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의 눈은 마치 보이지 않은 족쇄에서 풀려난 듯 아득해졌고 이내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가보지 못한 각자의 고향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음의(陰意)
혈성의 멸망은 연맹성역에 그리 큰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게다가 혈성은 외진 곳에 있는 탓에 멸망 사실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려졌다.
혈각을 움켜쥔 채 달아나는 동안 한제의 체구는 서서히 줄어들어 보통 사람 크기가 되어 있었다.
혈각도 봉인해 크기를 줄인 후 한입에 꿀꺽 삼켜 체내의 영력으로 감쌌다. 혈각은 너무도 특이했기에 자세히 연구해볼 생각이었다.
한제는 어느 6급 수련성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가부좌를 틀었다.
영혼을 통해 느껴지는 분신과의 연결은 차차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수많은 수련자들의 주의를 끌게 됐지만 다행히 누구도 고신이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다. 사실 고신은 지금의 수련계와 너무나 동떨어진 존재였으니 당연했다.
★ ★ ★
나천성역 뇌의 선계 허공, 그중 어느 한 지면이 천천히 꿈틀거리고 하늘에서는 범상치 않은 구름층이 빠르게 응집되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전광이 번득였고 천둥소리도 이따금씩 들려왔다.
잠시 후, 한 줄기 번개가 그 구름층에서부터 대지 위로 내리꽂혔다.
콰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이 번개는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고 셀 수 없이 많은 미세한 전광이 되어 땅속 깊은 곳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한제에게로 스며들었다.
한제의 몸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뒤이어 수없이 많은 천둥번개가 응집되더니 다시 한 번 내리쳤다. 그 충격에 지면의 가장자리는 무너질 기미까지 보였다.
한편, 혈조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각의 육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혈신 반쪽이 그 육지 깊은 곳에 있음을 그 혈신 반에 깃든 원력이 빠르게 뭔가에 의해 흡수되고 있음을 똑똑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더없이 깊은 원한의 대상을 무의식중에 돕고 있는 형국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섣불리 나서지는 않고 신중하게 전방의 육지를 감싼 구름층을 바라보았다. 그 안의 힘이 천천히 무르익으면서 강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