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18
혈조의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 원신만 남은 그는 허약해진 상태였고 이 황천 안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혈조는 혈조였다. 그런 상태라 해도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끝없는 황천 안에 갇힌 신세였지만 혈조는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살피며 결인을 그리더니 온몸으로 눈부신 붉은 빛을 번득였다. 곧이어 강력한 위압감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혈화(血化)!”
혈조의 온몸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그 원신이 거대한 핏빛 발톱이 되어 곧장 한제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발톱에서 다섯 갈래의 날카로운 빛이 튀어나오더니 한제를 향해 돌진했다.
한제는 체내의 원력을 가동시킨 뒤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콰쾅!
거대한 소리가 퍼져나가며 한제의 몸은 황천 밖으로 밀려 나갔다. 그때, 한제가 낮게 외쳤다.
“천혼(泉魂) 응집!”
그러자 황천 안의 수많은 원한의 기운이 모여들었고 그 안으로 원력이 스며들어 더욱 날카로운 기운을 발산했다. 그러더니 그 원한의 기운들은 하나하나 요석설의 모습으로 변해 혈조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아! 이한제,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혈조는 포효하며 몸을 돌려 핏빛 발톱을 뒤로 휘둘렀다. 마치 황천을 찢어버리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눈앞의 수많은 요석설들이 거짓인 걸 알면서도 그는 결코 그 원한의 기운들을 공격하지 못했다.
황천은 혈조의 발톱에 찢겨나가 큰 구멍이 났다. 혈조는 그 구멍을 통해 황천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요석설의 모습을 한 원한의 기운들이 이를 저지했다.
혈조는 이를 악물고는 핏빛 발톱을 휘둘렀다. 요석설의 모습을 한 수많은 원한의 기운들이 그 발톱의 공세에 곧장 무너져 내렸다.
“꺄아악!”
마치 진짜와도 같은 비명에 혈조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거대한 발톱에 찢긴 황천은 결국 무너져 내렸고 혈조는 결국 황천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한제, 반드시 네놈을 죽여주겠다!”
황천 밖으로 빠져나온 혈조의 표정은 냉랭했지만 사실 그는 심신이 너무도 지친 상태였다. 원한의 기운들이 요석설의 목소리로 내지른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혈조가 밖으로 나온 순간 한제가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구름의 형태를 한 존혼번이 들려 있었는데 그 구름이 펼쳐지면서 혈조를 뒤덮었다.
짝! 짝!
인과의 채찍 역시 그 검은 구름 속에 녹아든 채 계속해서 맹렬히 휘둘러졌다.
“수(收)!”
한제가 낮게 외치자 검은 구름은 미친 듯이 수축하기 시작했고 그 안의 혈조는 끊임없이 저항했다. 허약해지고 지쳤지만 그는 여전히 고고한 혈조였다. 검은 구름은 계속해서 수축하려다가 밀려나기를 반복했고 심지어 무너질 조짐까지 보였다.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드러내며 입을 쩍 벌려 원력 한 움큼을 토해냈다.
이 원력은 검은 구름 안에 녹아들며 막대한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검은 구름은 빠르게 수축했지만 혈조의 반항 역시 더욱 격렬해졌다.
쾅! 쾅!
연이은 폭발음에 검은 구름은 결국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는 혈조가 포효했다.
“나를 봉인하려는 게냐? 네 녀석 수준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
혈조의 포효에 검은 구름은 다시 무너져 내리며 색깔도 흐려져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검은 구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존혼번이 망가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와라, 주요 혼백!”
한제가 크게 외치자 그 구름에서 세 개의 주요 혼백이 곧장 응집되어 혈조의 원신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구름 너머로 검은 연기가 된 기린 마수가 혈조의 원신을 감싼 채 머리를 꽉 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 번째 주요 혼백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혈조의 안팎을 오갔고 그를 관통할 때마다 원신의 기운을 빼앗아갔다. 인간의 모습을 한 마지막 주요 혼백은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연기가 되어 혈조의 사지를 붙들었고 이에 혈조의 움직임은 느려졌다.
혈조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온몸으로 붉은 빛을 번득이며 복잡한 주문을 외웠다. 그 저주가 흘러나옴에 따라 그의 몸에서 번득이는 붉은 빛은 미친 듯이 짙어졌고 점차 사방의 검은 연기와 구름을 보라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혈신, 붕괴!”
낮은 외침이 혈조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빛이 더욱 짙어졌고 그의 원신은 순간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면서 미친 듯이 퍼져나갔다.
그의 머리를 물고 있던 기린 마수의 혼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 힘에 흩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뒤로 물러났다.
혈조 주위를 맴돌던 주요 혼백들도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몸을 관통하던 네 번째 주요 혼백은 손발이 풀린 혈조에게 붙잡혔고 그가 손에 힘을 주자 균열이 일며 연기가 되어 검은 구름 안으로 녹아들었다.
“이한제 이놈!”
혈조는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든 채 두 손을 앞으로 뻗었고 그러자 사방의 검은 구름에 큰 틈이 생겼다. 그는 그 틈을 통해 검은 구름에서 빠져나왔다.
냉랭한 눈으로 이를 지켜보던 한제는 혈조가 검은 구름 밖으로 나온 순간 한 줄기 노란색 빛을 토해냈다. 이 빛에는 모래알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그 모래알은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면서 빠르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1천 척 정도로 커진 모래알은 하나의 산 같았다.
이것이 바로 선계의 조각을 본체로 해 천벌의 제련을 받아 세상이라는 도가니 안에서 보물로 다듬어진 바로 그것이었다.
이 거대한 모래알은 엄청난 선력을 발산하여 혈조를 억누르려 했다.
펑! 펑!
“크아악!”
온몸에서는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이어지면서 혈조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몸에서 번득이던 붉은 빛도 점차 불안정해졌다. 이에 검은 구름 밖으로 빠져나오려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모래알이 엄청난 속도로 하늘에서부터 떨어졌다. 혈조는 어떻게든 위로 솟아오르려 했지만 결국은 짓눌려 버렸다.
거대한 모래알을 떠받친 혈조는 한층 더 허약해졌지만 여전히 온몸으로 붉은 빛을 번득였다.
한데 그때, 인과의 채찍이 나타났다.
짝!
“크아악!”
인과의 채찍에 얻어맞은 혈조의 원신은 더욱 흐릿해졌다. 허나 거대한 모래알에 짓눌려 저항할 수도 없었고 이내의 원신은 거의 무너져 내릴 지경이 됐다.
“크크큭! 천하의 혈조가 이런 꼴이 될 줄이야.”
그는 비참한 표정으로 자조했다.
그때, 한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혈조, 난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러면 요석설과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허나 네가 자폭한다면 다시는 네 딸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 혈조의 눈에 드러났던 광기가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는 조용히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외쳤다.
“수(收)!”
사방의 검은 구름이 순간 끓어오르면서 혈조를 둘러쌌다. 인과의 채찍이 뱀처럼 혈조의 주위를 맴돌았다. 부상을 입은 세 개의 주요 혼백은 다시 한 번 달려들어 미친 듯이 그를 뜯어먹었다.
거대한 모래알은 하늘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위압감은 그대로였고 그 압박에 검은 구름은 더욱 빨리 수축했다. 찰나의 순간, 공 모양으로 수축된 검은 구름은 거대한 깃발이 됐다.
폭이 1백 척에 달하는 깃발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의 존혼번은 그저 검은 색이었지만 지금은 그 바탕에 뭔가가 그려진 상태였다. 바로 혈조의 모습이 생동감 넘치게 그려져 있었다.
그의 몸은 인과의 채찍으로 꽁꽁 묶여 있었고 주요 혼백 세 개가 삼엄하게 맴돌았다. 혈조의 얼굴에는 짙은 슬픔과 분노가 드러나 있었다.
한제는 말없이 존혼번을 바라보았다. 힘겨운 상대였던 혈조를 이겼지만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슬프기까지 했다.
혈조와의 전투에는 너무도 곡절이 많았다. 위기도 많아 조금만 방심했더라면 곧장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당시 망월에게서 도망쳤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위험했다.
“너와 나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었다. 만약 당시 네가 요석설을 데리고 얌전히 떠났다면 이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혈조를 먼저 건드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제 역시 살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혈조의 약점인 요석설을 이용해야만 했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수단을 가릴 여유는 없었다.
“혈조, 난 네 부정(父情)에 감탄했다. 나 역시 아들이 하나 있지. 그래서 네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넌 내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지. 애초에 요석설이 내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았더라면 내 어찌 혈조의 딸과 갈등을 빚으려 했겠는가? 더구나 난 네 딸을 붙잡고도 손 한번 댄 적 없다.”
한제는 존혼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혈조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면 네 딸은 나를 공격해도 되지만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인가? 네가 딸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겠으나, 이는 부당하다! 네게 기회를 주겠지만 아직도 나를 죽이겠다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이는 네 딸 요석설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식을 키우되 교육하지 않는 것은 아비의 잘못이라지. 난 1천 년 전 깨달은 이 말을 넌 여태 깨닫지 못한 것이냐?”
그 말을 끝으로 한제는 존혼번을 거두었다. 혈조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러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부끄러움을 야기할 질문만을 했고 그것이면 족했다.
허공에 떠 있는 선계의 조각을 향해 손을 뻗자 그 선계의 조각은 노란 빛을 번득이면서 줄어들더니 결국 한 알의 모래알이 되어 한제의 입으로 들어왔다.
한제는 지난날의 힘들었던 흔적들을 지워버리려는 듯 옷을 툭툭 턴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뇌의 선계에서 최대한 강해져야 해. 내 신통력으로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 다행히 지금의 내 수준이라면 선인의 저택들에 들어갈 수 있어. 선술을 구해야 한다! 모완, 조금만 기다려. 반드시 동림성에 가서 너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고 말 거야!’
한제는 오른손을 미간에 댔다. 수준이 상승하면서 모완을 소생시킬 가능성이 조금 커졌다. 그가 나천성역에 온 것은 능천후 등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모완을 살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함이 더 컸다.
한제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 시각 그의 앞에 있는 조각에서는 이원이 힘겹게 도망치고 있었다.
허나 이제 한계에 달해, 그는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를 쫓는 이들이 마치 이원을 가지고 놀 듯이 굴었기에 여태 살아 있는 것뿐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큰 치욕을 주는 것은 뒤쫓아 오는 사내가 자신을 과녁으로 삼아 끊임없이 각종 신통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 곁의 노인은 무정하고 냉랭한 기운을 발하며 이따금 청년에게 무언가 조언을 했고 그때마다 이원은 더욱 극심한 고통과 치욕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 그가 저물대 공간에서 가져온 여덟 자루 단검 중 남은 것은 세 자루뿐이었다. 나머지는 그가 술법을 발휘할 때 노인이 가져가더니 단검에 걸린 이원의 신식을 지운 뒤 청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청년은 그것을 다시 곁에 있는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비통함과 분노가 이원의 마음을 잠식해갔다. 은방울처럼 간드러지는 여인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더욱 자극했다.
요가 (2)
이 무렵, 이원의 상처는 더욱 심각해진 상태였다. 도망치느라 돌보지 못한 오른팔은 이미 썩어가기 시작해 하얀 벌레들이 고물고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이 벌레들은 구더기가 아니라 그를 뒤쫓는 청년이 내보낸 일종의 독충이었다.
이원은 심지어 자신의 체내에도 그리고 원신 안에도 그 하얀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이제는 그 벌레들을 기르는 자양분이 된 것만 같았다.
이원의 속도는 점점 더 느려지고 있었다. 온몸은 피곤함에 절었고 그는 더욱 짙은 죽음의 기운에 뒤덮였다. 그의 얼굴은 이제 창백한 것이 아니라 붉은 병색을 띠었다.
“소주(少主)님, 저자의 힘이 다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