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28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우가 동림성 사람이 아니라면 진가를 대표해 도우를 우리 진가의 외래 장로로 초청할까 하네.”
그 말에 한제는 피식 웃었다.
“안 될 것도 없지. 허나 지금은 장품각이 내 목표일세. 그러니 세 도우의 도움이 필요한데…”
한제의 시선이 육신을 잃은 채 허공에 떠 있는 원신에 닿았다.
육신을 잃은 수련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표정으로 한제의 말을 들었다. 상대는 장품각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장품각을 가동시키기만 하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을 가동시키려면 최소한 두 가문 대표가 동시에 신통력을 발휘해야 했다.
그다음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세 사람이 서로 연합하여 장품각을 가동시키자 누각이 진동했고 네 개의 뿔이 한데 모여들었다.
순간, 뿔이 맞닿은 부분으로부터 부드러운 빛 한 줄기가 발산되더니 빛으로 이루어진 타원형의 문 하나를 형성했다.
“우리 진가 사람이 장품각에 들어간 것은 1백 번에 달하네. 이 누각에서 선술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로지 운에 달려 있지. 이곳에 들어간 사람들이 본 광경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더 이상 도움은 줄 수가 없네. 단, 안에서 오래 버틸수록 진귀한 선술을 얻을 수 있지. 부디 좋은 결과 얻길 바라네!”
한제를 외래 장로로 초청했던 수련자가 포권을 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한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요가 노인의 기억을 통해 4대 가문에게 장품각 안에 함정을 설치할 능력은 없음을 파악했으니, 이것이 함정일 리는 없었다. 게다가 눈앞의 모든 것은 그 기억을 통해 봤던 것과 똑같았다.
한제는 망설이지 않고 법보를 거둔 뒤 그 빛의 문 앞에 섰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한제가 안으로 들어서자 육신을 잃은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찍이 저자에게 저런 실력이 있는 줄 알았다면 우리가 어찌 공격할 생각이나 했겠나? 곧장 길을 터주고도 남았을 텐데… 어쨌든 저자의 수준은 우리와 같으니 기껏해야 네 번째 층이 끝이겠지.”
“허나 저자의 신통력과 법보를 보면… 더구나 모든 힘을 사용한 것도 아닌 듯하더군. 장품각을 여는 데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리고도 남았을 걸세.”
“그래, 저자는 나도 죽일 생각이었어. 내가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육신을 잃은 노인이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됐네, 더 말해서 뭐하겠는가? 저자는 이미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제 저자에게 얼마나 운이 따르는지 두고 보는 수밖에 없지.”
진가의 노인이 느릿하게 말했다.
“진 도우, 정말 저자를 진가의 외래 장로로 초청할 생각인가?”
육신을 잃은 노인이 묻자 진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사람이라면 큰 도움이 될 거야. 도우들, 저자를 두고 나와 쟁탈전을 벌일 생각은 말게! 만약 저자가 정말 우리 진가의 외래 장로가 된다면 요 도우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부탁하건대 모르는 척 해주면 좋겠군. 여 도우의 육신은 우리 진가에서 제공하도록 하지. 송 도우, 자네에게도 사례할 걸세. 물론 저자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말일세.”
★ ★ ★
한제는 기이한 공간에 들어선 상태였다. 사방은 뿌연 안개로 가득해 신식을 펼칠 수도 없었고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사방의 안개가 요동치더니 빠른 속도로 응집됐고 눈 깜짝할 사이 하나의 인영(人影)을 이루었다.
온몸이 안개로 이루어져 있어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얼굴만큼은 또렷했다. 평범한 외모의 상대는 수련자와는 전혀 다른 기운을 풍기면서 덤덤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손바닥이 밖을 향하도록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한제의 눈빛이 굳어졌다. 요가 노인의 기억대로라면 장품각에서는 수준을 측정하는 과정이 있었다.
한제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 사람 앞에 이른 뒤 손을 들어 상대와 손바닥을 맞댔다.
그 순간, 기이한 힘이 상대의 손바닥으로부터 밀려들어 빠르게 한제의 체내를 한 바퀴 맴돌았다. 곧이어 낮은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8품 상선(上仙)! 장품각 4층에 있는 선술을 운에 따라 골라갈 수 있다!”
오른손을 거둔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8품 상선이라⋯⋯. 선인의 수준은 대체 어떻게 구분되어 있는 거지? 지금 내 수준은 양의의 절정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만약 양의의 절정에 이른다면 선인으로서는 어떤 등급이 될까?”
안개로 구성된 사람은 느릿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제는 그 안개가 마저 다 흩어지고 나면 자신이 4층으로 보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장품각이 몇 층으로 나뉘어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높은 층수록 좋은 선술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최상층에 있는 가장 형편없는 선술이라도 최하층에 있는 최고 수준의 선술보다 뛰어나겠지.’
허나 자신의 실력에 따라 보내지는 층이 정해지는 것이니 순응해야 했다. 이 역시 개개인의 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수준이 높을수록 좋은 선술을 얻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안개로 이루어진 사람이 완전히 흩어지기 직전, 한제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그는 심장은 쿵쾅거렸다.
그는 곧장 저물대에서 보탑을 꺼냈다. 그리고 가만히 보탑을 두드리자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의 시체가 나타났다.
한제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더니 체내의 원력을 가동해 그 여인의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거의 흩어져 사라지려던, 연기로 이루어진 사람의 손바닥에 여인의 손바닥을 댔다. 심장이 격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그 순간, 안개로 이루어져 거의 흩어질 지경이었던 사람이 경미하게 진동했고 잠시 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9품 선군(仙君)! 장품각의 9층에서 선술을 살펴서 골라갈 수 있다!”
한제의 두 눈이 흥분으로 번득였다.
여인의 시체를 다시 보탑 안에 들여보낸뒤 보탐을 저물대에 챙겨 넣은 한제의 심장은 아직도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그에게 이렇게 격렬한 감정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운에 따라 골라가는 것과 살펴보고 골라가는 것은 전혀 다르지!”
★ ★ ★
연기로 이루어진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계단이 나타났다. 위로 뻗어 있는 계단의 끝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결심을 굳히고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밟고 올라온 계단들은 서서히 흩어졌다.
한편, 한제에게 문을 열어준 세 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도중 장품각에서 한 줄기 밝은 빛이 튀어나오는 것을 본 진가 노인이 말했다.
“허 도우가 어떤 선술을 얻게 될지 궁금하군.”
육신을 잃은 여가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준과 운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밀접한 관계는 아니지만 일정한 때에는 분명한 작용을 해. 저자는 4층에서도 비교적 좋은 선술을 얻게 될 거야.”
송가 노인은 말없이 장품각에서 발산된 빛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뭔가 이상한데?”
다른 두 사람도 흠칫 놀라며 장품각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표정이 급변했다.
장품각에서는 한 줄기 빛이 나타난 뒤 네 개의 빛줄기가 더 나타나더니 먼저 나타난 빛과 평형을 이룬 채 하늘로 솟아올랐다. 고리 모양 파문들이 하늘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섯 갈래의 빛줄기라… 저자는 5층까지 갈 수 있는 모양이군!”
여가 노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허 도우를 과소평가한 모양이군. 수준이 양의의 절정에 이르렀거나 어쩌면 벌써 규열기의 경계에 발을 들인 상태인지도 모르지.”
송가 노인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진가 노인이 미간을 구겼다.
“정말 그의 수준이 규열기에 이른 상태였다면 이 뇌의 선계에 들어올 수 없었을 거야. 설마⋯⋯?”
그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장품각에서는 또 한 번 빛이 나타났다. 이번에 나타난 두 개의 빛줄기 역시 곧장 하늘로 솟아올라 이미 나타나 있던 다섯 갈래의 빛줄기와 평형을 이루었다.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오른 일곱 갈래 빛줄기는 매우 화려했다.
“마… 말도 안 돼! 일곱 갈래의 빛줄기… 그건 불가능해!”
송가 노인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른 두 노인의 눈빛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가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7층에 들어가려면 어느 정도 수준이어야 하는 거지? 허목의 수준은 절대 그 정도가 아니었어. 이게 대체⋯⋯.”
그때, 장품각에서는 또다시 두 갈래의 빛줄기가 튀어나왔다. 총 아홉 갈래의 빛줄기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모습에 세 사람은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다섯 갈래까지는 허목이라는 자가 수준을 숨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일곱 갈래의 빛줄기가 나타났을 때는 천운이 따른 모양이라 여겼다. 허나 아홉 갈래의 빛줄기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다.
뇌의 선계가 처음으로 열리고 이 대륙을 봉인했던 그때, 각 가문의 선조들이 오른 것도 기껏해야 8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9층은 아직 그 누구도 오르지 않았던 곳이었다.
선제(仙帝)의 신통술
노인들이 경악하고 있을 무렵, 한제는 계단을 따라 묵묵히 오른 끝에 결국 마지막 계단에 이르렀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하나의 누각이었다.
누각은 크지 않았는데 양쪽 벽에는 열 칸이 넘는 선반이 있었다. 그리고 각 선반마다 안에는 선옥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문 너머 벽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그려진 그림이 한 폭 걸려 있었다. 나무의 절반은 나뭇잎이 노랗게 말라 있었고 그 아래에 동자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림의 상단 좌측 여백에는 글이 한 줄 적혀 있었다.
바람을 부리고 비를 부르네. 콩을 뿌려 병사로 만드네. 땅이 갈라지고 산이 무너지네. 달은 어두워지고 하늘은 맑아지네.
그림을 바라보며 한제는 생각에 잠겼다.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림에 적혀 있는 글에 흥미가 느껴졌다.
“바람을 부리고 비를 부른다? 이는 분명 두 가지 신통술을 이르는 것이겠지. 콩을 뿌려 병사로 만드는 것 역시 신통술일 거야. 땅이 갈라지고 산이 무너지는 것도 바람을 부리고 비를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겠지. 허나 달은 어두워지고 하늘은 맑아진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도통 파악할 수 없었던 한제는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고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무척 간결해 심지어 책상 하나 없었다. 바닥에는 돌로 된 깔개뿐이었는데 누군가가 그 위에 아주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던 것처럼 살짝 파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