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29
한제는 그 깔개로 다가갔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깔개였지만 막상 손을 뻗어 보니 한제의 손은 그 깔개를 관통했다.
“허상인가?”
한제는 신중한 눈으로 좌우의 선반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좀 전까지의 기쁨은 씻은 듯 사라진 상태였다.
좌우 선반에는 선옥들이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눈앞의 깔개처럼 허상으로 변해 있었다.
한제는 쓰게 웃었다.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눈으로만 볼 수만 있을 뿐 만질 수는 없는 것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마치 허상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4층에 가는 게 나을 뻔했군. 그곳은 이렇지는 않을 테니까.”
한제는 다시 찬찬히 방 안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닿은 것은 정면의 벽에 걸려 있는 그 그림이었다.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 그림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선군 정도나 되어야 들어올 수 있는 9층이라면 절대 간단하지 않을 터. 이 허상의 광경도 내가 보기에만 그런 것일 뿐 선군의 눈에는 실체화된 것으로 보일지도 몰라. 어쨌든 이 방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저 그림이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한제는 차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는 9층에서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영 마뜩찮았지만 저 그림이 관건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심신을 연 한제는 온 정신을 그 그림에 집중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침착해졌고 그는 그림으로부터 눈도 떼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한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그 그림은 한제의 머릿속에 선연히 떠올랐다. 한제는 마치 그 그림 안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참 후에 두 눈을 뜬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 층의 막이 있어서 그 안에 녹아들 수가 없군.”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그림의 나무 밑에 있는 동자를 응시했다.
순간, 한제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던 동자가 지금은 두 손으로 모종의 결인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 7일 동안 한제는 그림에 집중한 결과 동자의 손동작이 두세 시진에 한 번씩 변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변화는 너무나 미묘해서 집중하지 않는 이상 파악하기 힘들었다.
지난 7일 동안 한제는 그 동자의 모든 손동작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고 8일째 되던 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동자가 그렸던 결인들이었다. 하나하나의 결인을 그려낼 때마다 누각이 진동했다. 한제는 흠칫 놀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마저 결인을 그려나갔다.
그 후로도 결인을 그려낼 때마다 누각이 진동했는데 그럴수록 누각 전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깜짝 놀란 한제는 더욱 빠르게 결인들을 그려냈다. 그러자 누각은 몇 차례 진동한 뒤 멈춰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한제는 그림을 바라보면서 점점 더 빠르게 결인을 그렸는데 점차 자신의 육신이 그 그림에 녹아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결인을 그려낸 순간, 한제의 머릿속에서는 뭔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푹 고꾸라졌다. 한제의 원신 역시 눈앞이 흔들리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시야가 다시 또렷해졌고 주위를 둘러본 한제는 깜짝 놀랐다.
그가 있는 곳은 허공으로 뒤에는 나무 한 그루가 놓여 있었다. 그 나무의 절반은 잎이 노랗게 말라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은 흔들리면서 솨아아 소리를 냈다.
고개를 숙인 한제는 자신이 도포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림 속에 들어와 있었고 그 그림 안의 동자가 되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본 한제는 우측 상공에 검은색의 묵적(墨跡)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 그림에서 본 문장이었다.
바람을 부리고 비를 부르네. 콩을 뿌려 병사로 만드네. 땅이 갈라지고 산이 무너지네. 달은 어두워지고 하늘은 맑아지네.
그 짧은 글은 한제의 시선이 닿자 먹물로 방울방울 변해가더니 빗물처럼 사방으로 떨어졌다. 순간 허공은 사라지고 그 대신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서는 허상의 인영들이 하나하나 나타났는데 그들의 생김새는 또렷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결국 한제는 가부좌를 튼 수많은 인영들로 빽빽이 둘러싸이게 됐다.
수군거리는 대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제는 그 내용을 단 하나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갑자기 모든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허공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의 모습 역시 흐릿하고 모호했지만 모든 것을 압박하는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그는 가부좌를 들고 앉은 채 미소를 짓는 듯했다. 그러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소자요께서는 장품선각(藏品仙閣)의 최초 개장을 위해 그림을 그리실 것이네. 선군 윤필께서 이를 감상하라고 나를 초대하셨지. 내가 여러 선우(仙友)를 초대한 것은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나의 도를 들려주기 위함일세. 이것이 바로 나의 도일세!”
말을 마친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검은 빛깔의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바람은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는 동안 아홉 마리의 흑룡이 나타났는데 이 용들은 강력한 기세를 풍기며 하늘과 땅의 색을 변하게 했다.
특히 그 검은 바람이 사방을 종횡무진할 때, 아홉 마리의 흑룡은 일제히 입을 쩍 벌리며 음산한 바람을 토해냈다.
그 바람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담겨 있어서 머리가 저릿할 정도였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그 바람에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것이 바로 바람을 부리는 호풍(呼風)! 바람을 부리면 모든 영혼의 불을 꺼뜨릴 수 있다네!”
한제의 심신이 진동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격렬한 통증이 몸을 찢을 듯 끊임없이 이어졌고 결국 한제의 원신은 부서져 버렸다.
바로 그때, 한 줄기의 부드러운 힘이 허공에서 나타나 부서진 한제의 원신을 감쌌다. 그러더니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제의 술법은 비범하지. 이 술법은 소자요의 그림 위에 시로 쓰일 것이며, 그 그림은 장품각의 9층에 걸리게 될 것이다. 훗날 어느 운 좋은 자가 그림 속으로 들어와 깨달음을 얻고 이 술법을 장악할지도 모르지!”
그 순간, 한제의 원신은 먹물이 된 듯 상대의 붓에 의해 두 글자로 쓰였다.
“호풍!”
그와 동시에 강력한 힘 한 줄기가 그 두 글자로부터 뿜어져 나와 한제의 원신을 다시 응집시켰다.
한제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고 저도 모르게 그림 속에서 튀어나와 누각의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육신으로 되돌아왔다.
부르르 경련한 한제는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에서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았고 귓가에는 좀 전에 그 목소리가 아직도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운인가⋯⋯?”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정면의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좀 전의 모든 일이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다.
“선제, 선군,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소자요.”
한제는 그림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그림의 화풍이 저물대 공간에서 보았던 그림과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개의 그림은 같은 사람이 그린 것이다.
한제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몸을 돌려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방금 얻은 선술에 비하면 그곳의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자 발아래에 계단이 나타났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한제의 눈빛이 어렴풋하게 빛났다. 그림 속에서 본 광경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선술, 호풍…”
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 어느덧 맨 아래층에 도착해 있었다. 뒤이어 한 걸음에 그는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편, 장품각 앞의 세 노인은 지난 며칠 동안 점차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이성을 잃을 지경이 됐다.
그들은 9층에 어떤 선술이 있을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일 터였다. 그런 만큼 그들의 욕망은 강렬해져갔다.
그때, 빛으로 이루어진 장품각의 문이 번득이더니 한제가 나타났다.
그는 노인들을 보지도 못한 것처럼 멍한 얼굴로 그들 곁을 지나쳐 갔다.
세 노인은 곧장 한제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셋 모두 상대의 눈에서 탐욕을 볼 수 있었다.
‘미안하군, 허 도우. 자네를 가문에 들이는 것보다는 9층에 있는 선술을 손에 넣는 것이 더 낫겠어. 더구나 자네의 지금 상태를 보니 우리에게 운이 따르는 듯하군!’
진가 노인이 살기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세 사람은 각자 가장 강렬한 법보와 신통술을 가지고 한제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진가 노인 앞에 은빛 침들이 떠올랐다. 각 침이 푸른빛을 번득인 순간, 노인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침에서 거대한 허상 하나가 떠올랐다. 온몸에 선기가 맴돌고 있는 허상은 노인의 손짓에 따라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송가 노인은 음양을 나타내는 도안을 꺼내 내던졌다. 그러자 도안은 강력한 원기를 가득 품은 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한제에게 돌진했다.
노인이 도안 뒤에서 오른손으로 기이한 결인을 그리자 긴 머리카락의 허상 한 줄기가 나타났다.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는 머리카락에서는 짙은 녹색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마지막으로 여가 노인의 원신은 입을 쩍 벌려 반짝이는 작은 부채를 토해냈다. 그 부채를 잡고 휘두르자 보라색 화염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여섯 마리의 화룡(火龍)으로 변해 한제를 포위하며 포효했다.
세 사람의 눈은 이미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한제를 죽이고 그가 9층에서 얻은 선술을 손에 넣고 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이 쏘아 보낸 신통력과 법보는 순식간에 한제의 곁에 이르렀다.
한편, 한제의 눈빛은 여전히 흐릿했고 그의 머릿속은 선술 호풍의 불가사의한 변화로 가득했다.
한데 세 노인의 신통술과 법보가 곁에 이른 순간, 한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세 사람을 등진 채로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리듯 외쳤다.
“호풍!”
그 순간, 새카만 바람이 한제의 오른손에서 나타났다. 이 바람은 순식간에 불어나더니 미친 듯이 퍼져나갔고 하늘은 그 바람에 밀려난 듯 어두워졌다.
장품각(藏品閣)
온 대지가 진동하면서 짙은 기운이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이 모든 것은 이 검은 바람, 그 선술 때문이었다. 대지는 이 선술을 기억하는 듯했고 하늘도 이 선술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바람은 나타나자마자 곧장 한제 뒤의 세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가 노인의 은빛 침은 그 바람에 닿은 순간 티끌처럼 휘말리며 부서져 버렸고 그 위에 나타난 허상의 인영도 태풍 앞의 촛불처럼 픽 하고 사라졌다.
“이… 이것이…?”
진가 노인의 눈에 두려움이 들어찼다. 머리가 저릿해질 지경이었다. 마치 사신의 숨결 같은 검은 바람에 노인의 심신은 와들와들 떨렸다. 반항할 의지조차 생겨나지 않았다. 하늘의 위엄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향을 틀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허나 순간이동을 발휘하려는 순간, 그의 몸은 펑 하고 터져버렸고 원신도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송가 노인의 법보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음양의 도안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육신이 바람에 휘말리는 사이 화들짝 놀란 그는 원신만 빼내 재빨리 도망쳤다.
여가 노인도 들고 있던 부채가 검은 바람에 날려 흩어져 버리자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검은 바람은 마치 언제 나타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고 한제의 눈빛은 어느새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선술 호풍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