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76
“그동안 별일 없었나?”
노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나리, 모두 순조로웠습니다. 다만 오는 동안 나천성역의 요가에서 나리를 추살(追殺)하려 한다는 소문이⋯⋯.”
한제는 피식 웃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더는 언급하지 마라. 이제 너희는 이 청령성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면 된다. 난 몇 달쯤 폐관수련을 할 것이니 보호를 부탁한다.”
노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는 곧장 순간이동으로 횡운봉(橫雲峰) 위에 이르렀다. 횡운봉은 그가 떠났던 때 그대로였다.
동굴 안으로 들어간 한제는 곧장 사방에 진을 배치해 반경 1만 리를 완전히 봉쇄한 후에야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호흡하기 시작했다.
몇 시진 뒤, 밤이 찾아왔다. 달빛이 동굴 입구로 쏟아져 들어오며 바닥을 밝히는 광경은 퍽 아름다웠다.
한제는 두 눈을 뜨면서 탁한 숨을 뱉어냈다. 뇌의 선계를 떠나온 뒤로 그는 무척 지쳐 있었다.
한순간도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련성으로 돌아온 한제는 이제야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동굴 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한참 그 적막을 즐기다가 불쑥 혼잣말을 내뱉었다.
“요가가 이대로 추격을 끝낼 리 없어.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큰 솥을 꺼냈다. 그 솥에서는 고래(古來)의 기운이 가득 피어올랐다.
한제는 원신의 정기를 뿜어내 그 솥을 뒤덮고 제련하기 시작했다. 제련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한제가 숨을 들이마시자 솥은 작아지더니 결국 한 줄기 빛이 되어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림자에서 타산이 걸어 나오더니 가부좌를 틀고 곁에 앉았다. 중상을 입은 타산의 눈빛은 어둑했다.
이어서 한제가 저물대를 두드리자 요빙운이 빛을 번득이며 나타났다.
곤극 채찍으로 휘감겨 있는 요빙운의 바깥쪽은 존혼번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위로 수십만 개의 금빛 문양이 번득이고 있었다.
서늘한 눈으로 요빙운을 바라보던 한제는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순간 가장 바깥쪽에서 요빙운을 감싸고 있던 금빛 문양이 하나둘 떠오르면서 사방을 뒤덮더니 동굴 안을 물들였다.
검은 안개 형태의 존혼번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요빙운의 가녀린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요빙운의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고 안색은 죽은 사람처럼 어두워 금방이라도 생명이 꺼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체내는 거대한 원력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 힘을 원신과 융합시킬 수는 없는 상태였다.
한제는 요빙운을 바라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선위로 제련하는 것이 가장 좋겠군. 허나 그전에 일단 힘을 빌려야겠어.”
한제는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만 펼쳐 요빙운의 미간을 두드렸다. 그의 원력이 빠른 속도로 가동되면서 손가락을 따라 요빙운의 체내로 흘러들어 회오리가 되더니 그녀의 체내에서 분리된 원력을 흡수하면서 더욱 커졌다.
한제는 무척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작업을 이어갔다.
회오리는 점점 많은 원력을 흡수했고 더 이상 통제하기가 어려워진 순간 한제는 회오리를 맹렬히 흡수했다.
요빙운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면서 여기저기 찢겨져 나간 옷이 바람에 휘날리듯 나부꼈다.
동시에 덜덜 떨리는 그녀의 체내로부터 칠공을 통해 회오리가 빠져나와 사방을 짙은 원력으로 가득 채웠다.
한제는 재빨리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사방을 메웠던 원력은 연기가 되어 모두 그의 입으로 흘러들었다.
원력을 흡수한 한제의 두 눈에서 빛이 번득였고 얼굴이 약간 불그스름해졌다. 그의 원신은 끊임없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하늘 끝에서 아침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내 밤의 어둠과 한기가 물러가고 온기가 차올랐다.
요빙운은 동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침 햇살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으나, 그 안에는 한 줄기 슬픔이 배어 있었다.
지난 밤, 한제의 원신은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원력을 흡수했다.
이를 자신의 힘과 섞는 과정을 통해 원신의 상처는 점차 회복됐고 지금은 완전한 상태로 되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회색 빛의 혼탁한 숨을 뱉어낸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곧장 손을 들어 요빙운의 미간을 또 한 번 두드렸다.
여인의 체내로 들어간 그의 원력은 다시 한 번 회오리를 형성하여 그녀의 체내에서 분리된 원력을 빨아들였다.
“이 여인의 모든 원력을 흡수하면 내 수준은 적잖이 높아질 것이다. 경지의 깨달음만 얻는다면 규열기에 이를 수 있어!”
한 차례 폭풍이 나천성역을 휩쓴 후, 수많은 수련자를 학살한 거대하고 흉악한 마수 망월은 뇌선전에 의해 생포됐다.
그 과정에 대해 아는 사람은 굉장히 적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모든 나천성역 수련자들이 알게 됐다.
순식간에 뇌선전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고 심지어는 상고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수련자 가문을 넘어 나천성역에서 가장 강한 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 천강(天罡) 36명, 지살(地煞) 72명으로 이루어진 총 108명의 선인을 뽑는 봉선(封仙) 의식이 진행됐다.
“선계는 붕괴되고 선인은 쇠락했지만 후세 중에도 선인은 존재한다. 뇌선전에서는 그 새로운 선인들을 봉할 것이다. 그리고 이 108명 안에 드는 이와 그가 속한 가문은 선인의 일족이 되어 영원히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또한 선인들은 연맹성역과의 전쟁에서 통솔자가 될 것이며, 그의 가문은 자신들만의 수련성을 얻게 될 것이다.”
뇌선전의 봉선이 시작되자 나천성역의 모든 수련자는 가슴이 뜨거워졌고 각 수련자 가문의 직계 후손들은 봉선이 되기 위해 나섰다.
선인 책봉을 놓고 경쟁하는 자가 너무 많아 뇌선전에서는 나천성역의 동서남북 네 구역에 봉선 구역을 각각 하나씩 설치하기로 했다.
뇌선전에서 파견한 이는 각 구역에서 봉선 후보 108명씩 총 432명의 수련자들을 대상으로 최종 선발할 예정이었다.
뇌선전 반경 10만 리 안는 전투 금지 구역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누구든 그 구역 안에서 사적으로 결투를 벌일 경우 그 가문이 뇌선전의 손에 멸족당할 터였다.
봉선 예정일이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이 소식이 한 차례 폭풍을 불러일으켰다면 뒤이은 뇌선전의 발표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았다.
바로 108명의 봉선을 뽑은 후 연맹성역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뚫고 곧바로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에 온 나천성역은 열광했다. 모든 수련자는 준비 태세에 들어갔고 선인으로 책봉되어 연맹성역의 수련자들을 죽일 날만을 기다렸다.
짙은 살기가 나천성역 전역에 진동했다.
허나 한제는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동굴 안에서 폐관수련을 시작한 지 열흘이 넘은 시점이었다.
그동안 한제는 계속해서 요빙운의 체내로부터 원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규열기 중기 수준이었던 요빙운의 짙은 원력은 차차 한제의 일부가 되어갔다. 이에 따라 한제의 수준은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다. 그녀의 원력은 매우 강력해 열흘이 지났는데도 전체의 3할 정도밖에 흡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무렵, 한제의 수준은 한 단계 올라 양의의 절정에 이르렀고 이제 규열기까지는 단 한 걸음만 남은 상황이었다.
허나 그의 앞에 놓인 길은 아주 깊고 넓은 고랑과도 같았다. 원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천도에 대한 깨달음과 경지의 변화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과의 경지는 생사윤회의 경지보다 훨씬 현묘했지. 이에 대한 깨달음은 종잡을 수가 없어. 인과⋯⋯ 인과라⋯⋯.”
한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세상 모든 것은 인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과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허상일 뿐. 그 실체를 찾으려 하는 것은 안개 속을 더듬는 것처럼 헛되고 어려운 일이지.”
한제는 길게 숨을 뱉어내며 요빙운을 바라보았다.
“인과⋯⋯ 당시 나는 천역주를 얻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도환을 만나는 결과를 낳았지. 또한 내가 등력을 죽인 것이 원인이 되어 등화원이 나의 가족을 죽인 것이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등화원이 그런 짓을 벌인 것이 원인이요, 내가 그의 일족을 말살한 것이 결과⋯⋯. 이 원인과 결과들은 모두 교차되어 있다. 오늘의 원인이 내일은 다른 자의 결과가 될 수 있는 법.”
인과의 경지는 너무도 현묘하여 한제는 아직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경지의 깨달음은 억지로 얻을 수가 없어. 적당한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완벽히 이해하기란 힘들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인과라는 두 글자만 놓고 보면 간단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었다.
꿈의 도(道)
“수련을 하면 할수록 앞으로 나아가기란 더욱 힘들어지지. 필요한 원력이 더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이 더욱 문제다.”
한제는 쓰게 웃었다.
“인과의 경지는 어떻게 강화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깨달음은 너무도 어렵군. 아무리 많이 이해하고 깨달아도 허상일 뿐이니⋯⋯.”
한제는 긴 한숨을 뱉어냈다. 생각을 접으려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자꾸 인과의 경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요령의 땅에서 고요(古妖) 배이라의 도움 아래, 나는 기이한 상태에 접어들면서 살육 선결의 폐단을 알아냈다. 그때 나는 은연중에 세상의 모든 도가 배이라의 수많은 분신이 되어 그의 체내로 녹아들던 것을 보았지. 그 광경은 당시 천운자가 신통술을 발휘했을 때 봤던 광경과 흡사했다.”
한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혼잣말을 이어갔다.
“천운자가 수련한 도는 천운(天運)의 도. 그가 신통술을 발휘하자 수많은 천운자가 나타났고 그들은 뛰어난 선술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지. 당시 나의 수준으로는 그것을 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 신식의 공간 속에서 모든 천운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선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도였어!”
한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당시 천운자의 신식의 공간 안에서 봤던 광경들을 떠올렸고 그럴수록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강해졌다.
“그래, 천운자는 분명 수많은 도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도들을 대체 어디에서 얻어낸 거지?”
한제는 문득 첫 번째 선위가 제련되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천운자가 허운산을 삼켰다고 했지.”
그 순간, 한제의 눈빛이 변했다.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한 빛이었다.
그는 요빙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인과의 도는 모두 허상이야. 내가 본 수련의 세 번째 단계에 따르면 모든 천도는 결국 본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인과의 도 그 본원은 무엇인가? 난 아직 알지 못한다. 허나 지금 그 경지를 실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삼켜야 한다. 다른 이의 경지를 삼켜 상대의 인과를 느끼고 도념을 깨달아 내 인과의 경지로 삼는 거야!”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오른손으로 요빙운의 미간을 눌렀다.
두 손가락이 요빙운의 미간에 닿기 직전, 한제는 우뚝 멈추었다.
“경지를 삼킨다면⋯⋯ 상대의 도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겠지. 허나 천도에는 끝이 없고 대도(大道)에는 한이 없다. 한 번 남의 도를 삼킨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만 할 거야. 그럼 천운자처럼 돌아올 수 없는 길에 오르게 되는 거겠지. 허나 그렇다고 삼키지 않는다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인과의 도는 허상으로 남게 될 테니… 삼키느냐, 마느냐…?”
이렇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만 거듭하는 것은 사실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요빙운에게 측은지심이 생겼다기보다는 자신의 도를 앞으로 어떻게 깨달아 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도를 선택하는 이 한 걸음은 정말이지 중요했다. 수련자의 일생은 도를 수련하면서 진행된다.
모든 수련자의 도는 서로 다르며, 개인의 깨달음과 경험에 따라 그 도 역시 수천수만 가지로 분화됐다. 말하자면 세상 모든 것이 도가 될 수 있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