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93
노인의 발밑에서는 전광이 번득여 마치 번개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뇌선전의 영접사다. 나천성역 동쪽 영역의 다른 후보들을 죽인 것이 너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흘러넘치는 듯한 기운을 사방으로 발산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통해 그의 수준이 규열기 중기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백의의 사내는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름과 속한 가문을 대라!”
노인은 기쁨도 슬픔도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낮게 외쳤다.
“동림성(東臨星) 허가의 허정. 경험을 쌓고 오라는 가문의 명을 받았습니다.”
청년의 말은 마치 천둥처럼 사방에 울려 퍼졌고 여러 수련자들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심지어는 찬 숨을 들이마시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이도 있었다.
동림성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것은 향가였지만 유명세를 따지자면 허가가 위였다.
동림성 허가에서는 매 세대의 수련자를 세상에 내보내 한바탕 살육을 자행하게 했으며, 그를 방해하거나 가로막는 이가 있다면 상대의 수련성을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파멸시켰다.
“다른 가문들의 화를 살 것도 걱정하지 않고 1백 명이 넘는 수련자를 죽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
“동림성 허가 사람들은 그 수법이 잔인하기로 유명하지. 이상한 조짐이라도 보일라 친다면 난 곧장 포기할 걸세!”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림성의 허가의 유명세는 너무나 컸고 피비린내 나는 그들의 살육은 수많은 수련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뇌선전의 영접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사흘 뒤 정오에 뇌선전에서의 쟁탈전을 시작한다. 잠시 후에는 뇌선전 사람들이 영패를 나눠주고 머물 곳을 안내해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허목도 있나?”
그 말에 나천성역 서쪽과 북쪽 영역 출신 수련자들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들에게 허목이라는 이름은 동림성 허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심지어 허목이 동림성 허가 출신일 것이라 의심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한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가 허목입니다.”
순간, 모든 수련자들의 눈빛이 모두 한제에게로 집중됐다.
“마도자 허목! 정말 이번 쟁탈전에 참여할 줄이야!”
“허목, 허정, 두 사람은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오른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수련자가 써늘한 눈으로 한제를 자세히 살폈다.
머리가 큰 소년의 얼굴에서도 잠시지만 바보 같은 웃음이 사라졌다.
수려한 남색 옷의 수련자 역시 서늘한 기운을 드러내며 한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허목! 내 사촌 동생 자봉이 잊지 못했던 그 허목이란 말인가!”
남색 옷을 입은 청년의 눈에 한 줄기 살기가 스쳐갔다.
“넌 나를 따라와라. 전주(殿主)께서 보자 하신다.”
뇌선전의 영접사는 한제를 힐긋 보더니 드물게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몸을 훌쩍 날려 먼 곳으로 향했고 한제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수련자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그 뒤를 따랐다.
한제는 영접사를 따라가는 동안 한 마디 질문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왠지 대견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뇌선전은 정말 큰 곳이다. 방금 있었던 곳은 바깥채에 불과하지. 지금 내가 널 데리고 갈 곳은 우리 뇌선전의 안채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하나의 구름을 스쳐 지나가다 보니 장엄한 궁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매우 많았으나 밀집되어 있지 않고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서 멀리서 봐도 그 끝이 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일반인 세상의 황궁도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짙은 선기(仙氣)가 가득 퍼져 있어 꼭 선계 같기도 했다.
한제는 각각의 궁전이 보통 궁전이 아님을 간파했다. 짙게 느껴지는 선기는 땅이 아니라 바로 그 궁전들로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뇌선전에는 총 1372채의 대전이 있다. 모두 역대 뇌선전 전주들이 뇌의 선계에서 가져오신 것들이지!”
노인은 자부심이 가득한 말로 설명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듯 말했다.
“뇌선전은 과연 나천성역의 최고 세력답군요!”
이런 칭찬은 무해하면서도 유익했다.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련을 해온 한제는 자연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은 껄껄댔다.
“허 도우가 앞으로 달성하게 될 업적도 분명 굉장하겠지. 이 뇌선전 안에는 도우가 차지할 만한 자리가 분명 있어!”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전방을 살폈다. 뇌선전 곳곳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신통력으로 보이는 줄기줄기 은빛 전광들이 그 속에서 번득였다.
한제는 뇌선전에 들어온 이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적지 않은 금제들을 본 상태였는데 만약 영접사 노인 없이 혼자서 이 안으로 들어섰다면 그 금제들에 번번이 가로막혔을 터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뇌선전 안채의 중앙에 진입했다. 이곳에는 푸른 돌로 바닥이 깔린 거대한 광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서는 전광이 수시로 번득였다. 매우 큰 광장은 멀리서 봐도 1만 척이 넘을 것 같았고 전광으로 채워진 연못 같아 보였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그 전광의 물결이 솟구쳐 올랐는데 마치 그들을 삼키려는 거대한 입 같았다.
노인은 저물대에서 붉은 과일을 꺼내 들더니 그것들을 쩍 벌어진 입에 던져 넣었다.
광장을 채운 전광으로부터 낮은 포효가 울려 퍼졌고 붉은 열매가 하나하나 사라지며 즙이 되어 전광 안으로 녹아들었다. 이에 일렁이던 전광은 잠잠해졌고 더 이상 한제와 노인을 가로막지 않았다.
“승선과!”
한제는 단번에 그 과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허 도우는 승선과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건가? 이곳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뇌의 선계 안에서 문을 보호하고 있던 뇌령(雷靈)의 분신이지. 누구든 뇌의 선계 안으로 들어가려면 승선과를 이 뇌령에게 바쳐야 하네. 그러지 않으면 녀석은 결코 들여보내주지 않거든. 우리 뇌선전의 선대 전주께서는 막대한 신통력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마침내 뇌령을 한 가닥 분리했고 그 분신을 이곳에 두어 뇌선전을 지키는 신수(神獸) 중 하나로 삼았지!”
한제는 전광으로 채워진 광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노인을 따라 뇌선전의 동부에 이른 한제는 저 멀리 다른 궁전보다 몇 배는 더 큰 대전을 보게 됐다.
한 마리 거대한 마수가 그 앞에 엎드려 있었는데 멀리서도 강력한 위엄이 느껴졌다.
대전에서 몇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른 노인은 멈춰서더니 웃으며 말했다.
“허 도우, 전주(殿主)께서는 도우만을 보기를 원하시니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야 하네!”
한제는 대전을 바라보다가 노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내가 무슨 선배인가. 전주께서 허 도우를 혼자 부른 것을 보니 앞으로 절대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 같은데… 그때는 더 친하게 지내도록 하지.”
고개를 저은 노인도 포권을 하더니 몸을 돌려 자리에서 떠났다.
한제는 신중하게 신식을 펼치며 나아갔다.
대전에 가까워지자 그 앞에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도 큰 산봉우리가 우뚝 솟은 것처럼 느껴졌다.
‘염뇌자.’
한제는 놀란 기색 없이 염뇌자에게 다가가 포권을 했다.
“염뇌자 선배님을 뵙습니다.”
“내가 자네를 마도자 허목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연맹성역의 이한제라고 불러야 하나?”
한제를 돌아보며 그렇게 묻는 염뇌자는 다소 놀란 듯했다.
“규열기?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한제는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사실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한데 선배님께서 저를 부르신 것이 단지 제 진짜 이름을 알아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염뇌자는 기특한 손자라도 보듯 웃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좋아, 과연 나와 연이 닿은 자답군. 난 자네가 허목이든 이한제든 상관치 않아.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연맹성역에서 벌어질 전쟁에 자네가 참여하기를 원하느냐는 것이지.”
“제 힘은 미약하니 참여한다 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한제의 덤덤한 대답에 염뇌자가 피식 웃었다.
“규열기 수련자의 힘이 어찌 미약하다 할 수 있겠는가?”
염뇌자는 웃고 있었지만 그 눈에서는 서늘한 빛이 번득였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께서 저를 그리 중하게 보신다면 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108명의 선인을 발탁하려 하는 것은 나천성역과 연맹성역 사이의 전쟁을 위해서였다. 한제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런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좋아, 내가 주었던 신물(信物)은 잘 가지고 있도록. 앞으로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이전에 약속했던 선물이라고 봐도 좋아.”
염뇌자는 소매를 휘둘러 광풍을 일으켰다. 그 광풍은 한제 앞에서 회오리를 일으켰고 그 안에서 번득이는 전송진이 나타났다.
“이 전송진을 이용해 돌아가게. 사흘 뒤, 나는 몇 명의 도우와 함께 봉선(封仙) 의식을 보러 갈 거야. 자네의 사형인 청수도 함께 갈 걸세.”
말을 마친 염뇌자는 몸을 돌려 대전으로 향했다.
“선배님. 제 뇌수는 돌려주시지 않을 생각입니까?”
한제의 당당한 물음에 염뇌자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불쑥 답했다.
“통로를 뚫고 나면 돌려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염뇌자는 대전으로 들어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한제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회오리 속의 전송진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