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94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네 개의 큰 진이 배치되어 있는 뇌선전의 바깥채였다. 모든 후보자가 숙소로 안내되었는지 텅 비어 있었다.
한데 한제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푸른 물결 문양으로 장식된 옷을 입은 그 여인은 무척 수려했고 피부는 백옥 같았다.
“허목 선배님이십니까?”
여인의 목소리 또한 청아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진선이라 합니다. 사자님의 명으로 선배님을 기다렸지요. 여기 선배님이 이번 봉선 쟁탈전에서 사용하실 영패입니다. 앞으로 머물 곳도 영패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선은 공손한 표정으로 저물대 안에서 손바닥만 한 영패를 꺼내 한제에게 건넸다. 그러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뺨이 발그레해져서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련에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그 영패를 이용해 저를 부르시면 됩니다. 뇌선전에서는 이번 봉선 쟁탈전에 참여하는 수련자분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지원해드릴 예정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더욱 붉어진 얼굴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물러났다. 그 모습이 흐릿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그녀는 은근히 치맛자락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한제는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영패를 신식으로 훑었다. 옥패와 비슷한 영패 안에는 뇌선전의 간단한 지도와 활성화되지 않은 전송진이 들어 있었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영패에 기록된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눈 깜짝할 사이 사흘이 지나갔다. 지난 사흘 동안 한제는 내내 눈을 감고 좌선한 채 자신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려 애썼다.
그날 정오, 뇌선전 안은 열기로 후끈거렸다. 또한 전송진의 빛이 끊임없이 번득이면서 수많은 수련자가 나타났다.
많은 이가 이번 봉선 의식을 관람하기를 원했다. 그중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4대 주성(主星) 안의 각 가문 사람들이었다. 허나 이들도 바깥쪽에서만 이번 쟁탈전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나천성역에서 요가에 버금가는 신공가와 전가처럼 주성의 수련자 가문보다 훨씬 뛰어나고 명망도 높은 가문 사람들이 도착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선계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수련자 가문 사람들이 뇌선전에 발을 들였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뇌선전과 함께 이번 봉선 의식을 주관하는, 상고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두 가문 사람들이었다.
그 수를 모두 합치자 수만 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뇌선전의 안내에 따라 안채를 중심으로 허공에 마련된 자리에 착석했다.
서자봉
봉선 쟁탈전이 벌어지는 전장은 뇌선전 안채의 광장이었다.
전광으로 채워진 이 광장 바깥쪽에는 짙은 선기를 풍기는, 백옥으로 된 자리들이 있었는데 그 수는 10개가 조금 넘었다.
염뇌자가 그중 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곁에는 눈을 감은 채 좌선 중인 청수 선군(仙君)이 있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에 조금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관람하러 온 수련자의 수가 점점 더 늘었다. 향가의 선조도 허공에 허상으로 나타나 염뇌자에게 포권을 하더니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검은 옷을 입은 공손가의 사내도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허상으로 나타나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뒤이어 요가 등 선계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4대 수련자 가문 사람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요가에서 온 이는 혈신자로 그와 나머지 세 가문 사람들은 이곳에 도착한 뒤 백옥으로 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들은 청수를 애써 외면했다.
신공가의 선조는 열운자와 함께 도착하여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가문의 선조들도 속속 도착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떴을 때, 염뇌자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나천성역 봉선 쟁탈전을 시작한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뇌선전 안에 울려 퍼졌고 그에 따라 하늘에서 서로 크기가 다른 수백 개의 전송진이 나타났고 각각에서 한 명씩의 수련자들이 나타났다.
물론 한제도 그들에 포함되어 있었다.
혈신자는 고개를 들고 음산하고 기묘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이내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이 쟁탈전을 관람하는 이들 중에도 한제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서자봉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 한숨을 내쉰 그녀의 눈에서 혼란한 빛이 드러났다.
그녀는 뇌의 선계에서 돌아온 이래 줄곧 한제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한제가 요가에 쫓기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애가 탔다.
하지만 도울 방법은 없었기에 그녀는 내내 좌불안석했고 한제가 요가의 추격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너무도 기뻐했다.
다만 그 기쁨 뒤에는 짙은 씁쓸함이 따라붙었다.
“어쩌면 선배님은 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서자봉은 무척 아름다웠고 그녀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수련자 가문의 걸출한 수련자 중 그녀에게 연모의 마음을 드러낸 자도 많았다. 심지어 같은 가문에서 가장 우수한 수련자인 사촌 오빠 서자묵 역시 그녀를 깊이 애모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구애에도 냉담하게 일관했고 심지어 혼인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녀가 꿈꾸는 것은 가문의 선조처럼 수준 높은 여자 수련자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한제를 만나고 난 뒤 변해버렸다. 그녀 자신조차 이런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애를 써도 1백 명이 넘는 수련자들을 데리고 뇌선전의 전송진으로 달려들었던 한제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잊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다시 보게 된 한제의 모습에 그녀는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멍하니, 가까워지고 싶지만 가까워질 수 없는 그 사내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한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백옥으로 된 자리에 앉을 자격까지는 없었지만 그녀는 서가의 선조였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그녀는 서자봉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악연이로군!’
허공에 떠오른 한제는 저 아래 잔뜩 모여든 수련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백옥으로 된 자리에 앉아 있는 열 명이 조금 넘는 이들은 모두 혈조보다 수준이 결코 낮지 않았고 심지어 그중 몇몇은 혈조를 월등히 능가하기도 했다.
하늘에 325개의 전송진이 모두 나타나고 그 안으로부터 쟁탈전 참가자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자 염뇌자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봉선은 세 개의 관문과 여섯 개의 길, 그리고 일선천(一線天)으로 나뉘어 있다! 천(天), 지(地), 인(人)의 세 관문은 수준을 시험할 것이고 여섯 갈래의 현묘한 길은 도의 윤회를 시험할 것이다! 세 관문과 여섯 갈래의 길을 통과하면서 108명의 후보를 추린 후 이들은 생사를 가르는 전투를 치러야 한다. 이 전투에서 가장 많은 이를 죽인 상위 36명은 천강(天罡)으로 봉해진다. 천강은 봉선석(封仙石)에 이름을 남길 영광을 얻게 되지.”
그 말에 뇌선전에 거센 파도가 일었다.
향가의 선조와 검은 옷을 입은 공손가의 사내 역시 흠칫 놀랐고 심지어는 청수 선군 역시 짙은 한기를 품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고 시대 선역에서 뇌의 선계에 남겨두었던 그 봉선석 말인가?”
“바로 그 돌이지!”
염뇌자는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으로는 이 돌은 원고 시대 선역이 남긴 물건이라 그 위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원고 시대 선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지? 그 봉선석이 뇌선전에 있을 줄이야…”
향가 노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원고 시대 선역은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열릴 선역에는 봉선석에 이름을 남긴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지. 이는 그저 소문일 뿐이지만 원고 시대 선역에 관한 유일한 단서이기도 해!”
곁에 있던 공손가의 중년 사내가 침착하게 말했다.
사방은 침묵에 휩싸였다.
대부분의 수련자는 봉선석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심지어 원고 시대 선역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수련자도 많았다. 그저 향가 노인처럼 수준 높은 수련자들의 말을 통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짐작할 뿐이었다.
“뇌의 선계가 무너져 내렸을 때, 봉선석은 수많은 파편으로 쪼개졌다. 우리 뇌선전에서는 그것을 얻은 바가 없으니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것도 없다. 이 봉선석은 그 선배님께서 달 마수를 거뒀을 때 그 안에서 찾아내신 거야.”
그 말에 백옥 좌석에 앉아 있던 수련자들도 더는 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천(天), 지(地), 인(人)의 세 관문 중 첫 번째 관문은 인의 관문이다! 그 안에서 열을 셀 때까지 굳건히 버티는 사람은 통과다! 나소, 전광의 연못으로 들어가라!”
염뇌자의 목소리에 한 줄기 푸른 빛이 먼 하늘 끄트머리에서 질주하듯 달려오더니 그의 앞에 섰다. 그 안에서 나타난 청의의 중년 사내가 수많은 후보 수련자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전주(殿主)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날려 광장으로 향하더니 뒷짐을 진 채 푸른 돌 위에 섰다. 무척 고고한 모습이었다.
모든 수련자의 시선에 그에게 집중됐다.
“뇌선전의 나소다!”
“3백 년 전 이미 규열기 중기에 이른 후로 폐관수련에 들었다고 했는데 그가 인의 관문의 문지기로 나타날 줄이야!”
“나소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특히 그 신식의 변화는 이름난 수련자들도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중에 나소는 수백 개의 전송진과 그 안에서 나타난 수련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내 눈에는 너희 중 누구도 108명의 선인으로 봉해질 자격이 없다. 너희를 죽이는 것은 개미를 짓눌러 죽이는 것보다도 더 쉬우니까! 자 이제 내가 지목한 사람은 아래로 내려오도록!”
그 말에 대부분의 수련자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소는 다른 말 없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가 지목한, 나천성역 북쪽 영역에서 온 수련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차게 코웃음을 친 나소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허공에 커다란 손이 나타나 광풍을 일으켰고 주위의 수련자들까지 미친 듯한 바람에 휩쓸리게 만들었다.
이어서 그 커다란 손은 지목된 수련자를 번개처럼 틀어쥐고는 곧장 아래로 끌고 내려와 광장 한쪽에 내던졌다.
그 수련자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음의의 수준에 불과한 그는 그 커다란 손에 붙잡힌 순간 온몸의 원력까지 얼어붙을 듯한 서늘함을 느꼈고 광장에 내던져지자마자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나소는 다소 불쾌해하는 모습이었다. 나소는 의식에 대해 그는 애초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만약 전주가 부탁해오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규열기 후기에 이르기 위해 폐관수련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첫 번째 관문의 문지기가 되기로 결심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긴 했다.
짜증이 난 나소는 곧장 신식을 펼쳤다. 그러자 구름과 바람의 기세가 바뀌었다.
그의 신식은 신기하게도 체내에서 그 형상을 바꿀 수 있었는데 금색 갑옷을 입은 거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거인이 허공을 밟을 때마다 콰르릉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거인은 모습을 드러낸 뒤 곧장 쾅, 쾅 소리를 내며 좀 전의 그 수련자에게로 다가가 매섭게 주먹을 휘둘렀다.
“컥!”
주먹에 닿기도 전에 그 수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옷과 머리카락은 마치 광풍에 휘날리듯 뒤로 나부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