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06
“정뇌선, 부뇌선, 그리고 36명의 천강! 너희들에게 봉선석에 이름을 새길 기회를 주겠다!”
그 말에 곧장 눈을 번득이며 나아가 봉선석 앞에 선 허정은 흠칫 놀랐다.
봉선석에는 수많은 이름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 이름들에서는 강력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나천성역에서 널리 이름을 떨친 선배들도 있었다. 이에 이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싶다는 욕망이 더욱 커진 허정은 오른손을 들어 빈 곳에 힘차게 획을 그었다.
그 순간, 돌에서 푸른 빛이 번득이더니 강력한 기운이 뿜어졌다.
허정은 뒤로 한참 밀려났다가 냉소하며 온몸의 원력을 가동한 뒤 미간으로부터 피어오른 검은 연기로 온몸을 감싼 채 손가락 하나를 펼쳐 봉선석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가까스로 자신의 이름을 적은 그는 진이 빠진 듯 창백한 얼굴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설마 저것은…’
한제는 허정의 원신이 반으로 나뉜 뒤 봉선석에 그 반이 흡수됐음을 알아채고는 봉선석에 대한 경계심이 한층 높아졌다.
염뇌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준이 매우 높은 이들만이 봉선석에 이름을 새길 수 있었기에 염뇌자는 허정을 보며 흡족해했다.
뒤를 이어 36명의 천강들이 속속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남궁한과 주행도 그리고 머리 큰 소년을 제외한 누구도 바위에 이름을 남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한제만이 남아 있었다. 허나 그는 침착한 눈으로 봉선석과 그 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바라보며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모든 수련자들의 눈이 집중됐다. 이미 승선지에 들어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은 의아함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봉선석 앞에서 머뭇거리자 주변 수련자들은 갖가지 추측을 해댔다.
고민하던 한제는 결심한 듯 오른손 검지를 봉선석에 댄 뒤 그었다. 순간, 엄청난 힘이 솟아올라 그의 손가락을 튕겨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한제는 체내의 원력을 가동해 검지를 다시 움직였다. 그러자 바위의 반발력은 더욱 거세어졌지만 그 힘은 한제의 원력에 저지당했다. 그리고 손가락과 바위가 맞닿은 곳에서 눈부신 빛이 튀었다.
마지막 획을 그은 순간, 한제는 원신에서 한 부분이 갈라져 빠르게 검지로 몰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한제는 오른손을 들더니 봉선석으로부터 가해진 힘을 빌려 뒤쪽으로 한참 밀려난 후 멈춰 섰다.
염뇌자는 의미심장하게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한제의 원신이 봉선석에 녹아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봉선석 위에 적힌 것은 이한제도 허목도 아닌 마도자였다.
‘허목, 과연 연맹성역 출신답군. 모든 일에 저리 신중한 것을 보면 말이야.’
염뇌자는 곧 시선을 거두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이번 봉선에서 정뇌선, 부뇌선, 그리고 천강으로 발탁된 이들에게 마지막 포상을 하겠다. 너희 38명은 모두 뇌선전과 향가 그리고 공손가를 대상으로 하나의 조건을 요구할 수 있다. 우리 세 세력은 모든 열과 성을 다하여 그 조건을 충족시켜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고 억지를 부리는 경우, 더 이상의 포상은 없음을 명심하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애써 안정시켰다.
애초에 그가 나천성역으로 온 것도 이번 봉선 의식에 참여한 것도 오로지 이 마지막 포상 때문이었다.
“모완⋯⋯.”
한제는 점차 침착함을 되찾아갔다. 허나 마음 한쪽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먼저 나서지 않고 다른 이들이 조건을 제시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 염뇌자를 향해 포권을 하고는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염뇌자는 한제를 바라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허목, 조건을 말하라.”
“제 조건은 파괴되어 잠든 원영에 새로운 육신을 응집시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한제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지만 실제로는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가기라도 할 듯 쿵쾅거렸다.
“허?”
염뇌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향가의 노인을 향해 물었다.
“향가는 오래전부터 접신술(接神術)로 유명했으니 네 조건을 충분히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향 도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미 한제를 썩 마음에 들어 한 향가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 의해 육신을 파괴당하고 큰 부상을 입은 원영인 모양이군. 그러니 잠든 상태겠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일단 그 원영을 꺼내 보거라. 내가 한번 살펴보겠다!”
한제는 잠시 망설였다. 모완은 그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존재였으며, 일평생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허나 그는 이내 저물대를 두드렸고 그러자 그 안에서 부드러운 빛 한 덩어리가 빠져나왔다.
봉선 의식을 시작하기 전, 남몰래 모완의 원영을 천역주에서 꺼내 파멸 심금으로 조심스럽게 봉인해둔 상태였다.
그 빛의 공이 활짝 열리며 빛이 방출됐고 이내 그 안에서 가부좌를 튼 이모완의 원영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그대로 흩어져 사라질 것처럼 너무나 유약해 보였다. 또한 한 층의 빛으로 덮여 있어 성스럽고 순결해 보였다. 마치 인간계로 내려왔다가 한제의 손에 떨어진 선계의 선녀 같았다. 의식도 없는 상태였지만 그녀의 상냥함과 선량함을 느낄 수 있었다.
류미처럼 속세를 초월한 듯한 아름다움도 홍접처럼 고고하고 도도한 느낌도 없었지만 한제의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언제나 모완이었다.
자신의 품에서 빠르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찰나의 순간 모습이 급격하게 변하고 회색 재로 변해 흩어지던 그녀를 지켜보던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 한제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하늘이 널 데려간다면 나는 하늘로부터 너를 다시 빼앗아 오겠다!’
“동의합니다!”
한제가 모완의 원영을 꺼낸 순간,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서자봉의 눈빛이 흔들렸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그녀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그랬구나. 저분이 이 쟁탈전에 참가한 것은 저 여인을 위해서였어. 자신의 여인을 위해 이런 위험까지 무릅쓰다니… 저 여인은 원영이 망가진 상태라 해도 영원히 잠든 상태라 해도 행복할 거야.’
한편, 청수는 한제와 모완의 원영을 바라보며 슬픈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 전, 자신도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완의 원영을 보자마자 향가 노인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는 한동안 원영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지?”
한제는 1천 년이 넘는 수련으로 다져진 자제력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목소리로 답했다.
“7백 년이 다 되어 갑니다.”
향가 노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원영을 변하지 않게 7백 년이나 보존해오다니, 대단하구나. 하지만 7백 년은 너무나 길어. 원영기 수련자를 어떻게 7백 년이나 보존한 거지? 육신 한 점조차 남지 않은, 그 원영만을? 게다가 이 원영은 거의 죽은 상태로군. 허목, 조건을 바꿔야겠다.”
노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허목을 배려해 조건을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허나 노인의 목소리는 예리한 바늘처럼 한제의 심장을 찔러왔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한제는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 그에게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정녕 방법이… 없는 겁니까⋯⋯?”
향가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자세히 모완의 원영을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여인의 수명이 다했을 때 넌 특수한 방법으로 그 원영을 추출하여 자양했을 것이다. 허나 하늘이 정한 운명이 바뀔 뻔했던 순간, 이 여인의 원영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네가 여태 보존해왔지만 사실 이 여인은 이미 죽음의 가장자리에 있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내 능력으로는 널 도울 수가 없구나. 이 여인은 본래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야. 억지로 남겨둬 봐야 너에게나 이 여인에게나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여인을 윤회의 굴레로 되돌려놓는 것뿐이다.”
한제는 부르르 떨더니 몇 걸음 물러났다. 이내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를 토했고 비참한 미소를 지으며 모완의 원영을 바라보았다.
모완과 지냈던 시간들이 눈앞에서 스쳐갔다. 극심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면서 뼈에 새겨졌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1천 년이 넘는 삶에서 눈물을 흘린 일이 손에 꼽을 정도인 한제가 지금 펑펑 울고 있었다.
허나 모완을 바라보던 한제의 마음속에서는 이내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화염이 피어올랐다.
‘모완, 나는 하늘로부터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어!’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모완의 원영을 쥐더니 펼쳐졌던 봉인을 다시 회수하여 공으로 되돌렸다.
향가 노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한제를 지켜보다가 돌연 입을 열었다.
“허나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 한제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수천수만 개의 천둥번개에 적중당한 것만 같았다.
“다만 그 방법은 대가가 너무나 크다. 이 여인이 살아날 수 없는 것은 수명이 없기 때문이야. 만약 충분한 수명을 부여할 수 있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지. 허나 칠석술(七夕術)이라 불리는 이 신통술은 내가 발휘할 수가 없다. 오직 우리 향가에서 내내 폐관수련 중이신 선조 어르신만이 할 수 있지.”
한제는 노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이내 노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칠석술을 발휘하려면 이 여인과 매우 가까운 이의 생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거부반응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이 여인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 상대의 수명은 줄어들지. 게다가 그 줄어든 수명만큼 여인의 수명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네가 생기의 9할을 넘긴다 해도 이 여인이 살아나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
한제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한 노인은 결코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수명을 넘긴 자는 원래의 수명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러니 잘 생각해봐라. 동의한다면 너를 선조 어르신께 데려가 도울 수 있도록 해보겠다!”
그 짧은 순간, 이 장면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수련자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심지어 저 여인이 살아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기를 희생할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인가?
한데 그들이 그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한제가 곧장 대답했다.
“동의합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 한제는 그윽한 눈길로 금제의 공을 바라보았다. 그 목소리는 약간 떨려왔고 눈빛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모완도 그 목소리를 들은 듯 원영이 약간 떨렸다. 몸부림을 치며 눈을 뜨려는 듯했으나 끝내 그럴 수 없었다.
수명은 생기에서 기인하기에 생기가 강할수록 수명은 늘어난다. 수련자의 수준이 높아지면 생기가 점점 강해지고 그래서 수준이 높을수록 수명도 늘어나는 것이다.
향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봉선이 끝난 뒤 나와 함께 동림성으로 가자.”
그때, 기억을 헤매던 청수가 여전히 슬픈 눈빛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허목, 나도 너와 함께하겠다!”
한제는 감격한 눈빛으로 청수에게 포권을 했다. 청수는 한제에게 동림성에서 무슨 변고라도 맞게 될까 우려하는 것이다. 그가 함께한다면 모든 일이 더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 분명했다.
뒤이어 나머지 사람들이 분분히 조건을 제시했다. 허정과 남궁한은 뇌선전의 장선각(藏仙閣)에서 임의의 선술 하나를 배울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36명의 천강들도 각자 원하는 것을 얻으면서 봉선 의식은 끝이 났다.
염뇌자가 백옥 좌석에서 둥실 떠올라 밝은 눈빛을 번득이며 낮게 외쳤다.
“도우들, 나를 도와 연맹성역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뚫도록 하세. 곧 전쟁이 시작될 걸세!”
염뇌자는 허공에 떠올라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그의 정수리에서 검은 빛이 발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