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15
“크아아!”
소년은 핏발이 선 눈으로 몸부림을 쳤고 끊임없는 펑 소리와 함께 수많은 문양들이 무너져 내렸다.
한데 그때, 한제가 움직였다.
첫 걸음을 내딛자 발아래 파문이 일었고 다음 걸음을 내딛자 허공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마치 어디라도 한걸음에 이를 것만 같았다.
축지성촌!
몇 걸음 만에 소년의 곁에 이른 한제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만 펼쳐 도념과 원력이 섞인 음양의 도안을 소환해냈다.
흑백의 기운이 맴도는 그의 손가락이 다가가자 소년을 감싼 금색 문양들이 비켜서며 길을 내주었다. 한제의 손가락은 전광석화처럼 소년의 미간에 닿았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며 곧장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로 그는 미간으로부터 느껴지는, 타들어가는 듯한 작열감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흑백의 기운이 맴돌자 소년의 거대한 머리는 무너져 내리듯 줄어들었고 뻗어 나왔던 정맥들도 급속도로 수축했다.
“우웩!”
소년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허나 이는 계획된 것으로 그가 토해낸 피는 짙은 선기를 담은 채 한제에게 덮쳐들었다.
규열기에 이른 소년의 선기가 담긴 피에 닿는다면 육신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음에도 한제는 덤덤했다. 그는 마치 피할 생각도 없는 듯 가만히 다가오는 피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定)!”
규열기 초기의 수준으로 발휘한 정신술(定身術)은 지금까지와는 그 위력 면에서 비교조차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정신술이 발휘된 순간, 청수가 한제의 체내에 남겨준 콩 모양의 선원(仙元)이 급속도로 회전하면서 한줄기 힘을 세상에 녹여 넣었다. 이에 정신술의 위력은 전에 없이 강력해졌다.
짧은 한 마디에 코앞으로 닥쳐온 소년의 피는 그대로 멎어버렸다. 뒤로 물러나려 했던 소년 역시 두려움에 떨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종
한제는 침착하게 소년의 피를 피해 오른손 두 손가락으로 다시 한 번 상대의 미간을 두드렸다.
‘크으으!’
소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몸만 바르르 떨며 나가떨어졌고 몸 곳곳에서는 피 안개가 터져 나왔다. 정신술의 위력은 그때까지도 유지되고 있었고 한제는 소년을 뒤쫓았다.
바로 그때, 한제의 표정이 순간에 변했다. 하늘에서 검광이 줄기줄기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주작성 밖에 모여 있던 나천성역 수련자 수백 명이 결국 뭔가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이들이 등장하자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고 주작성 수련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다.
한제와 소년을 본 나천성역 수련자들의 표정도 급변했다.
한제는 재빨리 몸을 날리면서 정뇌선(正雷仙)의 신분을 상징하는 선보(仙寶), 천호기(天虎旗)를 꺼내 들었다.
깃발이 휘날리던 순간, 천호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보라색 기운이 피어올라 맹호의 모습을 이루었다.
보라색 기운으로 이루어진 호랑이는 하늘에 떠 있는 수백 명의 나천성역 수련자들을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쿠오오오!”
한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오른손 두 손가락으로 소년의 미간을 다시 두드리며 외쳤다.
“난 지금 이자와 해야 할 것이 있으니 너희들은 밖을 지키고 있도록 해라. 명을 어기는 자는 처단하겠다!”
펑!
소년의 몸은 곧장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땅에 처박혔다. 동시에 땅에는 깊은 구덩이가 생겼고 이에 대지가 진동했다.
눈치가 빠른 나천성역 수련자들은 망설임 없이 빠르게 물러났다. 그들은 이런 상황인 줄 알았다면 절대 주작성에 달려들지 않았을 터였다. 두 선사(仙使)끼리의 전투에 그들은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전투에 관여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속속 물러났고 이 놀라운 광경에 주작성 수련자들은 한제가 나천성역 수련자들 사이에서 무척 높은 지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제는 깊은 구덩이에 처박힌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술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어, 온몸이 피로 뒤범벅 된 소년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올려다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제는 차가운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푸른빛이 번득이더니 이내 주작성 상공에 뇌운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 구름 안에서 번득이던 전광은 한제의 손을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의 한제의 오른손에는 번개로 이루어진 공이 하나 생겨났다. 그 공은 수많은 전광을 발산하고 있어, 마치 번개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소년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일선천(一線天)에서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광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있었다.
“허 형, 근 2천 년 동안 힘겹게 수련해왔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소년은 바짝 졸아든 눈으로 번개 공을 바라보며 다급히 말했다. 지금껏 공격력이 강한 신통술을 발휘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한제는 자신을 죽일 마음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상대의 마음을 돌릴 기회는 남은 것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충실한 종이다.”
한제의 싸늘한 대꾸에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저는 승선지(升仙池)에 들어가 경지를 녹인 관계로 도념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상관없다. 네가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조금의 상해도 입지 않고 나의 종으로 삼을 수 있는 술법이 있으니까. 허나 네 마음에 조금의 반감이라도 있다면 이 술법은 효력을 잃을 것이고 너는 목숨을 잃게 된다. 알겠느냐?”
말을 마친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기괴한 문양 하나가 그의 손에 응결되었고 체내에서는 콩 모양의 선원이 회전하면서 선력을 발산했다. 이렇게 발산된 선력은 한제의 오른손을 타고 그 기괴한 문양에 녹아들었다.
이내 한제의 손에서 어두운 금빛의 문양이 소환되었다.
그가 얻은 선제(仙帝) 청상의 옥패에는 선위 제련법만이 아니라 봉인조공술(封印操控術)도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시험해본 결과 그 위력은 옥패에 기록된 것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에 한제는 다양하게 분석을 해보았지만 결국 그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허나 나중에 선원의 존재를 알게 된 뒤에야 겨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 술법은 선원이 없으면 완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제는 체내의 선원을 가동해 결인을 하더니 소년의 미간에 찍었다.
그 순간, 한제는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을 곧장 죽일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동시에 그는 봉인조공술과 선위의 차이도 파악할 수 있었다.
선제 청상은 선위보다 이 봉인조공술을 먼저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선위는 고신을 모방하여 만든 존재라면 이 봉인술은 선인이 종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또한 선위는 육신의 강도에 중점을 두었고 신통술은 그다음이었다. 제련에 성공하면 절대 주인을 배반하지 않으며, 주인이 원할 때에만 비로소 해방될 수 있다.
반면 봉인조공술은 충성도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신통술로 발현되는 효과인 만큼 시간이 흐르거나 다른 원인에 따라 주인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미간에 봉인이 떨어진 순간, 소년은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의 선원(仙元)이 체내에서 가동되면서 미간에 찍힌 것과 똑같은 문양을 원신에 찍었다.
소년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공손하게 한쪽에 섰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새로운 종을 힐긋 살피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이 수련성 밖으로 나가 나천성역 수련자들을 적절히 파견하고 돌아와라.”
소년이 부복하며 답하더니 몸을 훌쩍 날려 사라진 후에야 한제는 이 익숙한 수련성을 찬찬히 살폈다.
이곳은 그가 태어난 곳이자 수련의 첫 번째 단계에 입문한 고향이었다. 많은 기억과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수백 년 만에 고향 수련성으로 돌아온 심경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내가 알고 지냈던 이들 중 몇이나 남아 있을지⋯⋯.”
한제가 씁쓸하게 뇌까리는 동안 모습을 드러낸 타산이 그의 뒤에 섰다.
잠시 후, 소년이 하늘에서 내려와 타산과 마찬가지로 한제의 뒤에 섰다. 무척 침착하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몇 갈래의 빛이 하늘을 갈랐다. 그중 두 갈래가 유독 빨랐는데 바로 주무태와 운작자였다.
한제는 그들이 채 다가오기 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둘의 귀에는 그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좀 쉬어야겠네.”
그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그 안에는 주무태의 심신을 뒤흔들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이에 주무태는 공손해짐과 동시에 심경이 복잡해졌다.
“수백 년 만에 저 정도 수준에 이르다니⋯⋯.”
주작의 지위를 수백 년간 지켜온 주무태는 재빨리 충격을 억누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운작자에게 포권을 한 뒤 몸을 돌려 떠나갔다.
운작자 역시 무척 놀란 상태였다.
당시의 한제를 떠올려보면 지금과 같은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술집에서 자신을 위해 술값을 내주던 젊은 청년의 모습을 이어서 선유족과 주작국 사이의 전투를 떠올린 운작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꼭 그랬어야 했을까 싶었다.
약속이나 한 듯 주무태와 운작자는 한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기에 의식을 잃지 않았던 몇몇 수련자 외에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주무태와 운작자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은 한제의 목소리에서 한 줄기 슬픔을 읽을 수 있었고 그가 누구의 방해도 없는 곳에서 안정을 취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며칠 뒤,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익숙한 광경을 둘러보며 한제는 느긋하게 걸었다. 그는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하늘이 석양으로 물들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무렵이면 그 외로움은 더욱 짙게 느껴졌다.
멀리서 보면 한제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온 나그네나 연로한 노인 같아 보였다.
그의 뒤로는 타산과 소년이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타산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의 임무는 한제를 지키는 것으로 만약 누군가가 한제에게 적대심을 품는다면 가장 먼저 공격에 나설 것이었다.
반면 소년은 복잡한 마음을 쉽사리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한제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렴풋한 익숙함을 느꼈다. 그가 걷는 이 길은 본래 이렇게 넓지 않은 시골길이었다. 그럼에도 분명 익숙했다.
그의 슬픔이 더욱 짙어져갈 무렵, 길의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시끌벅적한, 큰 도시가 있었다. 성문에는 보라색 바탕에 금색 테두리가 둘러진 편액에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황조성(皇祖城).
한제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았다. 당시의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아버지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었다.
“변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