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2
무표정한 한제를 바라보며 임두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열흘만 더 주십시오. 제 사촌형님이 열흘 뒤 서재를 지키는 순번이 되는데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탁본을 떠올 수 있을 겁니다.”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한제가 침착하게 말했다.
“정말로 가져온다면 내가 화분국을 떠날 때 네 영혼의 정혈은 돌려주겠다.”
말을 마친 그는 양웅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네게는 당장 영혼의 정혈을 줄 생각이었으나, 네 손에 들린 그것 때문에 안 되겠구나. 목숨은 살려주겠으나 영혼의 정혈은 다음 기회를 봐야겠다.”
양웅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한제와 눈이 마주치면서 극심한 공포를 느낀 그는 털썩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엎드리며 손에 들고 있던 옥패를 내밀었다. 긴장된 기색이 확연히 느껴졌다.
한제는 그를 보지도 않고 이번에는 자홍을 바라보았다. 자홍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살짝 들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배님, 신도술은 굉장히 기이한 법술입니다. 저는 반년 전 한 번 보기는 했으나 기억이 남지 않아 기록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고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문파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역외 전장에서 돌아온 제자이니 분명 신도술을 참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신도술은 마량의 기억에서 찾은 것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허나 전신전은 신도술 참관 자격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전신전의 제자들은 결단기에 이르거나 문파에 혁혁한 공을 세워야 자격을 얻어 장로의 보호 아래 신도술을 참관할 수 있었다.
자홍에게는 신도술을 기록해오게 했지만 역시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제는 전혀 실망하지 않고 세 사람을 자세히 살피며 침착하게 말했다.
“날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내 심기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내가 조나라로 떠날 때 영혼의 정혈은 모두 돌려줄 생각이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돌아가라. 임두, 열흘 뒤 이곳에서 기다리겠다.”
말을 마친 한제는 방향을 돌린 뒤 몸을 훌쩍 날려 긴 무지개로 날아갔다.
임두는 연신 그러겠다고 답하면서 허리를 숙였다.
양웅은 식은땀으로 적삼이 흥건한 상태였다. 가벼운 바람이 살랑 일자 땀이 식어 몸이 덜덜 떨려올 정도였다. 그는 방금 자신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홍은 양웅을 힐끔 보더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 ★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빛을 번득이며 전신전에 가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 세 사람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와는 관계없이 전신전의 원영기 고수들 앞에서 발각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전신전의 원영기 시조들은 이미 자신이 마량의 몸을 빼앗은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전에도 이런 추측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세 사람의 모습이 이런 추측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었다.
그때,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한제의 귓가에서 울렸다.
“젊은 친구, 내 제자의 정혈을 돌려주는 것이 어떤가?”
매끄럽고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한제는 우뚝 멈추었다. 그의 앞에 모여든 구름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이루며 다가왔다.
걸음이 가볍고 사뿐사뿐한 그 여인은 하늘처럼 푸른 궁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옷의 밑단에는 삼각형 모양의 비취색 천이 빽빽하게 둘러져 나풀거렸고 허리춤에는 많은 장식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여인에게서는 충만한 영기와 타고난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
한제는 뒷걸음질하여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을 저물대에 댄 채 냉랭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원영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지만 무척 긴장한 상태였다. 저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원영기 고수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선배님의 제자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한제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 제자의 이름은 주자홍이지.”
여인은 이슬처럼 맑은 웃음을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감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이곳에서 1천 리 이상 떨어지고 난 뒤에 곧장 정혈을 돌려주겠습니다. 그게 싫으시다면 이 후배는 죽는 한이 있어도 정혈을 부숴버릴 겁니다.”
여인은 한제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긴장할 것 없어. 자네에 대해서는 자홍에게 이미 들었으니까. 세 사람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자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지. 마량의 몸을 가져간 대가가 그 정도라면 충분해. 그러니 그 일에 대해서는 따로 말 않겠어. 자홍을 살려준 것만으로도 자질구레한 수고를 던 셈이니.”
내심 흠칫 놀란 한제는 여인을 몇 번 힐끔거리다가 그녀의 얼굴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참 침묵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불쾌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1천 리 밖으로 벗어난 뒤에는 반드시 정혈을 돌려주겠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아름다운 자태로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1천 리라. 마량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마량, 1천 리는 나에게 숨 몇 번 쉬는 사이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불과해. 만약 내가 죽이려고 한다면 몇 만 리 밖으로 도망치지 않는 이상, 아무 소용도 없을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겠다면 지금 가도록 해.”
한제는 두 말 않고 무지개를 그리며 날아갔다. 반 시진 뒤, 그는 이미 3천 리 밖에 있는 한 화산 분화구에 이르러 있었다. 체내의 영력을 조정한 그는 곧장 미간에 손을 댔다. 그러자 하얀색의 빛 하나가 그의 미간에서 솟아나왔다.
한제는 그것을 보지도 않고 다시 몸을 하늘로 날렸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그 여인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하나의 정혈을 위해 원영기 고수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이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홍의 정혈을 돌려주기로 했다.
몇 분 뒤, 자홍의 정혈을 놓아둔 화산 분화구 위에 여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가 오른손을 뻗자 자홍의 정혈은 곧장 그녀의 손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귀엽다는 듯 그 빛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잘 챙겨 넣은 뒤 한제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자홍을 구해준 것과 망설이지 않고 정혈을 풀어준 공을 사, 마량의 몸을 빼앗은 일은 덮어주마.”
★ ★ ★
이틀 동안 한제는 잠깐씩 쉴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여인은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한제는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저 멀리 한 곳에 고정됐다.
그때, 멀리서 갑자기 몇 갈래의 빛이 날아들었다. 그 빛들은 한제를 발견한 듯 곧장 방향을 틀어 다가왔다.
일고여덟 명의 젊은이는 빠른 속도로 한제의 곁으로 다가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게 앞서 있는 남자는 옥처럼 흰 얼굴에 용모가 준수했다.
축기 후기에서 결단기의 경계의 수준에 이른 그는 보라색 망토를 입고 있었으며, 발아래에는 비취색 빛을 반짝이는 비검이 그를 받치고 있었다. 명문가 자제의 느낌이 나는 남자였다.
그의 곁에는 붉은 옷의 여자가 한 명 있었는데 아름다운 얼굴은 창백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여운 마음이 들게 했다.
청년은 거만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더니 곁에 있는 여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완아, 저 녀석이야?”
여인은 한제를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듯 웃더니 남자를 향해 말했다.
“오라버니, 저 사람은 아니야. 그 사람은 변신술에 능하긴 하지만 기질까지 흉내 내지는 못해.”
청년의 눈에 깃든 서늘한 기운이 금세 풀어지더니 한제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도우, 너무 노여워 마. 난 낙하문의 이기경이야. 갑자기 접근해온 건 미안하게 됐어.”
한제는 청년의 말을 듣고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런 오해 정도야,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 편이니.”
그러자 이기경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우도 시가 대회에 출전하겠지?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겠어.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여기에서 작별해야겠군.”
말을 마친 그는 다시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하더니 일행과 함께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뒤 한제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저물대를 두드렸다. 철조각이 그의 앞으로 붕 떠올랐다가 땅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철조각이 땅에 박혔고 쿵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인영이 십여 장을 날아 진흙탕에 처박혔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외모의 그는 유독 눈에서만 영기가 번득였다. 그는 연거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도우, 오해야, 오해!”
그러면서도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훌쩍 날린 후, 비검을 타고 한제에게 다가왔다.
“도우, 나는 손유재라고 해. 이 일은 오해야. 고의로 도우를 뒤따른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낙하문의 나쁜 계집이 나를 궁지에 몰아서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거든. 지금도 녀석들은 나를 찾고 있지만 도우를 따라가다 보면 이기경 그 자식도 다시는 도우 근처로 오지는 않을 테니까.”
한제는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손유재는 얼른 뒤따르며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도우는 어느 문파 소속이지? 난 사마종의 제자인데.”
한제는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입을 꾹 다물고 속도를 높여 손유재와의 거리를 벌렸다. 손유재는 두 발을 재촉해 열심히 뒤쫓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한제의 앞을 가로막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우, 방금 그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어. 다 그 계집 때문이지. 아, 도우, 시가 대회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겠구나. 같이 가는 게 어때? 난 계곡에 아는 사람이 많아서 어떤 물건이든 충분히 얻을 수 있거든. 심지어 주나라의 응기 수준 계집들을 살 수 있는 곳도 알고 있지.”
한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를 보며 손유재는 어째서인지 심장이 덜컥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상대는 단순한 축기 중기 수준의 수련자였다. 자신은 축기 후기였으니 전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가 웃으며 말했다.
“도우, 어떤가?”
한제는 속으로 손유재를 비웃으면서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부탁 좀 하지요.”
손유재는 흠칫 놀랐다. 한제가 이렇게 호쾌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얼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 먼저 실례한 건 나니까. 내게 맡겨두라고. 도우, 도우를 어떻게 부르면 될까?”
“마량이라고 합니다. 전신전의 제자죠.”
손유재는 히죽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다가 소리를 죽여 말했다.
“마량. 듣자하니 너희 전신전에 주자미라는 절세 미녀가 있다던데… 우리 종파 사람이 반년 전에 그 여인을 보고 너무 고와서 한눈에 반했다고 했거든. 넌 전신전의 제자니까 잘 알겠지.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