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20
한제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그 옛날 자신이 좌선했던 곳을 둘러보았고 다소 서글픈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걸었다.
그러자 수많은 구멍이 뚫린 그 벽이 나타났고 예전처럼 그 안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다. 허나 그 서늘함은 당시보다 훨씬 약해진 상태였다.
한제는 계속해서 돌벽을 무너뜨리며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음종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지하 동굴에 이르렀다.
수백 척 크기의 거대한 관 하나가 동굴의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살려줘⋯⋯.”
한제는 아주 미약하지만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허나 그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고 한참 뒤에야 다시 들려왔다.
“너는… 그때 그 수련자인가?”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한제는 말없이 그 거대한 관으로 다가갔다. 일견 평범해 보였지만 사실 수많은 금제로 뒤덮인 관이었다. 게다가 금제들은 모두 최근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 한제는 이 근처에 이르기만 해도 심신이 뒤흔들렸었다. 당시에는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 금제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수백 년 만에 이렇게까지⋯⋯?”
목소리의 주인은 한제가 일전에 이곳에 두 번을 찾아왔음을 기억하는 듯했다.
첫 번째 왔을 때는 축기기 수준에 불과했던 자가 수백 년 후에 찾아왔을 때는 거의 영변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다 저자는 당시에 자신의 피만 얻어갔을 뿐, 도움 요청을 무시했다. 그 일로 그는 무척 분노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데 다시 마주한 상대의 수준은 자신이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그 뒤에 따라붙은, 종으로 보이는 두 수련자 역시 그가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제는 침착하게 그 관을 살피다가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에 닿은 순간 균열이 일기 시작해 머지않아 관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이내 수백 척에 달하는 거대한 관은 그대로 무너져 내려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짙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 안개 속에서 허공에 떠오른 벌거벗은 사내의 거대한 시체가 드러났다.
피부는 푸른빛을 띠었으나 고신의 몸처럼 주름이 지기는커녕 오히려 거울처럼 매끈했다.
또한 보라색이 섞인 푸른 식물이 시체를 뒤덮고 있었는데 이 식물들은 이따금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거인의 신체는 한껏 오그라들었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갔으며, 음산한 안개가 분출되었다.
거인의 미간에서는 옅은 도끼 형태의 문양이 수시로 번득였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구해주시기만 한다면 이 뇌길은 선배님의 탈것이라도 되겠습니다.”
거인은 신식을 통해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과 달리 그 목소리에서는 음흉한 속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애절하고 간곡할 뿐이었다.
한제는 거마족의 선조인 뇌길의 몸을 뒤덮은 푸른 식물을 바라보았다. 그 식물의 뿌리는 뇌길의 체내에 박혀 있었는데 앞으로 몇 백 년이면 뇌길은 그 식물에게 모든 생기를 다 빼앗길 터였다.
“거마족 중 시음종에 잡힌 것이 몇 명이나 되지?”
한제가 덤덤하게 물었다.
“주작성에서는 저뿐입니다. 허나 연맹성역 전체에서는 수많은 거마족이 잡혀갔지요. 시음종은 우리 거마족의 육신에 눈독을 들이고 있지요. 그러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거마족의 육신을 탈취해봐야 천부적인 신통력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시음종 녀석들은 이 푸른 덩굴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 덩굴은 생기를 소모시키면서도 신통력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예전의 한제에게라면 뇌길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는 것들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수련계에서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한제는 말없이 뇌길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뇌길의 몸이 급격하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의 몸을 뒤덮은 덩굴도 격렬하게 꾸물거렸다. 그러더니 이 덩굴들은 이내 차례로 뽑혀 나오면서 빠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이내 수백 척 길이의 끔찍한 모습의 식물 하나가 허공에 나타났다.
그 식물 꼭대기에는 꽃이 하나 있었는데 그 꽃이 활짝 펴지자 그 안에서 날카로운 가시들이 나타나더니 점액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이내 덩굴들이 그 식물의 촉수처럼 뻗어 나왔는데 그중 일부는 뇌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원전의 부전주
“쿠오오!”
날카로운 포효가 울려 퍼지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한제는 그 기이한 식물 안에도 신식이 있음을 파악했다.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선배님, 이 덩굴 안에는 시음종 부전주(副殿主)의 신식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 육신은 그 부전주를 위해 준비된 것이지요. 이 식물이 제 생기를 완전히 흡수했다면 시음종 부전주는 손쉽게 제 육신을 차지했을 겁니다.”
뇌길은 두려운 듯 몸부림을 치며 말했다.
한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음종은 항상 육신을 구하는 데 주력해왔지. 고신의 육신이 희귀한 지금으로서는 차선책으로 거마족의 육신을 목표로 삼았을 거야. 거마족의 육신에 수련자의 신통력이 더해지면 어지간한 수련자는 대항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거마족의 육신에 규열기 수련자의 신통력을 갖게 된다면 본체와 합체하지 않는 이상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한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음종은 너무도 비밀스러운 곳이라 그들이 거마족의 육신을 탈취하려 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허나 나천성역의 대군이 전진해옴에 따라 결국 시음종의 모든 비밀은 폭로될 것이다.
그때, 그 기이한 식물의 덩굴이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달려들었다. 허나 한제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봉선인(封仙印)을 토해냈다. 봉선인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며 수십만 개의 금빛 문양을 내뿜었다
콰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풍이 일며 식물을 향해 돌진했다.
한제는 번득이는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전광을 응집시켰다. 그러자 세상 모든 천둥번개를 통제할 수 있는 한제의 오른손 위로 이내 보라색 번개 공이 나타났다.
쐐액!
번개 공은 곧장 식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식물은 이미 수많은 금빛 문양들에 뒤덮여 있었고 그 위로 하늘을 쪼갤 듯한 소리와 함께 봉선인이 떨어져 내렸다.
사방의 동굴에 균열이 일었고 돌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리면서 부연 먼지 연기가 피어올랐다.
콰르릉!
때를 같이 해 번개 공도 식물에 꽂혔고 동시에 식물은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여기저기 손상을 입은 식물에서는 전광이 흘렀고 진득한 점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아래에 누워 있던 뇌길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식물에서 이번에는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누가 날 깨웠는가? 그 죄는 목숨으로 치러야 할 것이다!”
그 순간, 규열기 수준의 신통력에 해당하는 기운이 동굴 안에서부터 확산되면서 회오리바람을 형성했다.
그러자 식물을 뒤덮고 있던 금색 문양들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거대한 식물에서 하나의 허상이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채 검은 안개로 휩싸인 한 사람이었다.
그 허상을 보며 한제는 코웃음을 쳤다.
“겨우 규열기 수준의 원신 따위가 이 이한제의 목숨을 어떻게 취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하구나!”
뒤이어 결인을 그린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그의 오른손에서 자모도고(子母道枯)가 발현되며 마수의 뼈가 나타났다.
이 마수의 뼈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두 눈에서 어스름한 빛을 번득였고 그 순간 사방이 살기(煞氣)로 가득 찼다. 동시에 거대한 식물의 촉수부터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흑의인(黑衣人)의 허상은 이런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말없이 한제를 응시하다가 훌쩍 날아올랐다. 그 아래 식물은 순간 무너져 내리더니 흩어져 버렸다.
보라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기운이 붕괴하는 식물로부터 줄기줄기 흘러나와 흑의인의 허상에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의 몸은 실체화되었다.
한제는 덤덤하게 한 걸음 나서며 오른손의 두 손가락을 펼쳐 앞을 가리켰다. 순간 수많은 천둥번개가 나타나 폭풍을 이루더니 한제의 손짓에 따라 곧장 흑의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흑의인은 음침한 얼굴로 곧장 뒤로 물러나면서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둥그런 검은색 막을 소환했다.
쾅!
천둥번개의 폭풍이 그 막에 꽂히자 하늘을 뒤엎을 듯한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동굴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
“도우, 말로 하게! 난 시음종 원전(怨殿)의 부전주 유청운일세!”
흑의의 사내는 기겁해 재빨리 몸을 물리며 다급히 말했다. 좀 전까지는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자신을 깨운 자가 규열기 수준임을 알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게다가 상대 뒤쪽 선 소년도 규열기 수련자였고 거구의 꼭두각시는 비록 규열기 수준은 아니었지만 못해도 양의의 절정 수준은 되어 보였다.
강력한 상대를 셋이나 눈앞에 두고 보니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게다가 그는 지금 제대로 된 육신조차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거마족의 육신을 얻은 후라면 모를까, 지금은 도망치는 것조차 어려울 듯했다.
유청운은 쓰게 웃었다.
“도우, 내 방금 막 잠에서 깨다 보니 말실수를 좀 한 모양이네. 이해해주게. 혹시라도 도우가 관심 있다면 거마족의 육신을 넘겨줄 테니 친구가 되는 건 어떤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한제는 말없이 사내를 추격했다. 그의 발아래에서는 옅은 파문이 일어났다.
‘규열기 수준의, 그것도 저토록 허약한 상태인 원신이라니! 저 원신만 있으면 타산을 규열기 수준으로 올릴 수 있어!’
유청운은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이 반쯤 폐허가 된 주작성을 선택한 것은 주작성이 약간 구석진 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수련자라면 별다른 관심조차 두지 않을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용히 수천 년 정도를 보내면서 거마족의 육체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면 곧장 원전의 전주 자리를 탈취하러 나설 계획이었다.
한데 거마족 육체 탈취를 거의 눈앞에 둔 지금, 규열기 수련자가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건 보나마다 다른 부전주들의 모략일 거야! 그놈들이 저자에게 무슨 조건을 약속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내게 육신이 없는 틈을 타 내 원신을 소멸시키라고 했겠지. 제길! 다른 부전주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부하들을 경계조차 세우지 않고 그토록 신중하게 굴었는데… 그런데도 발각되다니!’
유청운은 착 가라앉은 얼굴로 도망을 치면서도 조심스럽게 한제 일행을 살폈다. 허나 아무리 봐도 낯선 자들이었다.
비록 그가 연맹성역 안의 모든 수련자를 본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규열기 수련자라면 다 봤을 터였다.
애초에 규열기 수련자가 연맹성역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다.
가장 의아한 것은 저 기이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소년은 분명 규열기에 이르러 있었지만 그에게서는 조금의 경지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체내에서 짙은 한 줄기 선력만이 느껴졌을 뿐이다.
‘설마⋯⋯ 선인이란 말인가!’
흠칫 놀란 유청운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친구가 되자더니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겐가?”
한제가 피식 웃은 순간, 그의 발아래에서 나타난 파문이 확산되더니 이내 모습이 사라졌다.
“축지성촌!”
유청운은 기겁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 순간, 그의 원신은 반짝이는 빛으로 무너져 내려 작은 은하수를 이루어 폭발적인 속도로 달아났다.
‘부전주 놈들이 날 죽이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군! 축지성촌까지 사용할 수 있는 자를 데려오다니, 대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한 거야!’